난 할 수 있어 511화
“그 말은 퍽 냉혹하구만.”
“어쩔 수 없습니다, 회장님.”
서청수 회장은 가만히 대찬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말은, 회사에 이익이 된다면 회삿돈을 투입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예, 이익이 된다면 응당 투입해야죠.”
“그건 오히려 내가 바라는 게 아니라 자네가 바라는 바일 테지.”
“쌍방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길입니다.”
“막힘없이 말하는 걸 보니 손에 패가 들린 것 같은데.”
서청수 회장의 말에 대찬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호주까지 날아오는 시간이 꽤 길어서 생각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해보게.”
“필래 비바체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뭐, 뭐라고……?”
서청수 회장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그 역시 대찬이 과감한 제안을 해올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필래 비바체를 통째로 삼키겠다는 말을 할 줄이야.
좀체 표정의 변화가 없는 서청수 회장의 안면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대찬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로튼 프룻츠가 비바체를 인수하게 해주시면, 총력을 기울여 필래그룹의 경영권을 방어해내겠습니다.”
“비바체는 원웅이 지분이 상당하지.”
“예. 그렇습니다.”
“비바체를 매각하면 그 대금을 갖고 충분히 경영권을 방어해낼 수 있어. 자네한테 이렇게 우는 소리 안 해도 된다는 소리야.”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승산은 올라가지만 장담하긴 어렵습니다. 아시잖습니까.”
“…….”
서청수 회장은 부정하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이 보유한 필래지주 지분은 30%.
그가 사망한 후, 유언을 통해 서원웅에게 지분 전체를 상속하겠다고 해도 법이 정한 한도는 그 절반인 15%였다.
나머지 15%는 서원웅과 서승학이 나눠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우호지분을 다 합쳐도 서원웅 진영의 지분은 40% 아래로 주저앉는다.
비록 그 아성에 도전할 세력이 지금은 지리멸렬했다고 하나, 언제든지 다시 침투할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다.
필래그룹의 수많은 계열사 중에 하나라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필래지주는 필래그룹 지배구조에 최정점에 위치한 지주회사.
불안정한 경영권은 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대찬은 서청수 회장을 바라봤다.
“원웅이가 납부해야 할 상속세는 역대 최고액이 될 겁니다. 투명하고 상식적인 결정은 찬사를 받을 만하지만 아무 출혈 없이 그걸 충당해낼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알짜 계열사를 넘기는 건 과다출혈이야.”
“알짜 계열사 하나를 넘기는 게 십수 개 계열사를 넘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서청수 회장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뇌리에는 오만 생각이 교차했다.
죽을 사람을 앞에 두고 냉정한 협상을 하려는 모습에 정이 떨어지다가도.
인정에 휩쓸려 똥하고 된장도 구분 못하는 바보 천치는 아니구나,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보기는 봤구나 하는 대견한 감정이 뒤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섭섭하게 구는가, 씁쓸하다가.
하긴, 따지고 보면 저 비바체는 조대찬이 손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걸 돈 받고 파는 일이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가만히 바라봤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구만. 자넬 처음 본 게 코흘리개 대학생 때였는데.”
“예… 코흘리개였죠.”
“허생전에서 허생이 부자한테 돈 빌리러 가는 장면에서 허생의 코에 맑은 콧물이 흘렀다는 말이 나오던데. 그 콧물이 이 콧물이었구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생은 지금으로 치면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경제사범이 돼서 감방에서 썩고 있을 겁니다. 칭찬인가요?”
“끝까지 비비꼬는 스타일은 여전하네. 그저 수완이 좋다는 뜻으로 한 말이야.”
“하하…….”
대찬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결국 화제는 다시 필래 비바체로 돌아왔다.
대찬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일단 공은 서청수 회장에게 넘어가 있었다.
필래 비바체를 넘길 것인가 넘기지 않을 것인가.
그걸 결정해야 조건을 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청수 회장도 급하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는 성정은 아니었다.
그는 커피로 속을 덥히고는 대찬에게 말했다.
“필래 비바체는 누구나 탐내는 알짜야.”
“알고 있습니다.”
“공개입찰에 들어가면 돈 있는 놈들은 쌈짓돈을 싸들고 달려들 거란 말이지.”
“예.”
“그럼 자네는 적어도 저들보다는 훨씬 나은 제안을 하는 게 맞겠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바체의 가치는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만큼 돈을 왕창 주겠다는 뜻인가?”
“아시다시피 비바체는 우리사주조합의 비중이 큰 회사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저지른 일이지. 비바체에 있을 때 유명무실했던 우리사주조합을 엄청나게 뻥튀기 시켰으니까. 지금 얼마나 더 커졌지? 한 7프로쯤 되나?”
“정확히는 8.5%입니다.”
허, 서청수 회장은 탄식했다.
“이런.”
“우리사주조합의 비중이 이렇게 큽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비바체 구성원들의 저에 대한 지지는 유효합니다.”
서청수 회장은 피식 웃었다.
“남들이 그런 소릴 하면 건방 떨지 말라며 쏘아붙였겠지만, 자네가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군.”
“저는 우리사주조합을 포함하여 지분 과반을 취득할 생각입니다. 아마 다른 회사가 인수를 노린다면 우리사주조합을 배제하여 과반을 취득하려 할 겁니다.”
“그렇겠지.”
“저는 8.5%의 지분을 덜 사들이는 만큼, 원웅이를 포함한 비바체의 지배주주들에게 더 큰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으음… 그건 괜찮은 생각이네만.”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아무리 로튼 프룻츠가 상승가도에 있다고는 하지만 비바체의 시총은 로튼 프룻츠 보다 커.”
“알고 있습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배가 터지지 않는 건 어린왕자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자넨 아직도 동화책 끼고 자는 어린애가 아니잖나.”
대찬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지금껏 실패를 모르고 달려온 경험이 독이 되지 않기를 바라네. 오만은 한순간에 모든 걸 수포로 만들어버려.”
“유념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계산을 마쳤습니다.”
“단순히 비바체를 제값보다 비싸게 파는 정도라면 나는 이 거래를 수락할 의사가 없네.”
“필래지주가 보유한 자사주 3퍼센트, 저희 지분과 교환하시죠.”
“…지분을 교환하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습니다. 경영권 방어에 도움이 안 되죠. 하지만 저희와 지분을 교환해서 그 지분이 저희 소유가 된다면 의결권을 갖습니다.”
“그렇겠지.”
“3퍼센트의 아군이 생기는 셈입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서청수 회장은 슬며시 웃었다.
“지분교환을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거 아닌가.”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바체 매각의 독점적인 교섭상대로 로튼 프룻츠를 지정하는 대가치고는 어째 좀 가벼운 것 같은데. 그 정도 제안은 다른 회사도 할 수 있어.”
“다른 회사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회사가 저희만큼 믿음직합니까?”
“로튼 프룻츠가 신뢰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압도적인 메리트라고 보기는 힘들어.”
“저는 이미 사재를 동원해 필래지주의 지분을 취득하겠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지분교환까지 합하면 원웅이가 경영권을 지키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
대찬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그랬다.
게다가 시가총액 8조 원 규모의 필래지주 지분 3%면 이제 막 3조를 돌파한 로튼 프룻츠의 지분을 8% 보유할 수 있었다.
기존에 보유했던 필래의 지분까지 합치면 로튼 프룻츠에서도 필래를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쥐고 있다.
그러니 이 동맹은 대찬과 서원웅의 우정이 사라진다 해도 유효할 것이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비바체를 얼마에 인수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건 자체는 아귀가 맞는군.”
“쌍방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필래는 알짜 계열사를 잃고, 로튼은 욕심부리다 배가 찢어지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네.”
“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협상이 고비를 넘기자 서청수 회장은 긴장의 끈이 탁 놓였다.
그는 병상에 눕듯이 몸을 묻었다.
잠깐 오간 대화에도 그의 눈에는 피로감이 짙게 묻어 나왔다.
“회장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음?”
대찬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는 달리 말을 망설였다.
서청수 회장은 웃으며 재촉했다.
“사람 충분히 놀라게 해놓고 이제 와서 뭘 망설이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여기서 더 뜯어가겠다고?”
“상속세에 대한 문제입니다.”
“음?”
“병마 때문에 이미 고통이 깊으신데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주제넘고 분별없다는 거, 잘 압니다.”
“됐어. 말해봐.”
“지금 상황에서는 서원웅 그리고 서승학 씨가 유류분을 1대1로 나눠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
“…이건 회장님께서 배우자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멀뚱히 바라봤다.
‘역시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인가.’
대찬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풉.”
서청수 회장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푸하하! 상속세 줄이게 마누라를 들여라?”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서청수 회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아니야. 그래, 합리적인 생각이지. 마누라가 끼면 승학이 녀석이 가져갈 재산이 줄어드니까.”
자식이 가져가는 재산이 1이라면 배우자가 가져가는 재산은 1.5였다.
그러니까 만약 서청수 회장이 부인을 들이면 그 부인이 1.5, 서원웅이 1, 서승학이 1을 가져가는 셈이었다.
이를 서청수 회장의 필래지주 지분 30%를 놓고 따지면 이랬다.
만일 배우자 없이 서원웅과 서승학만이 상속받게 된다면.
서청수 회장의 필래지주 지분 30%의 절반인 15%를 서청수 회장의 유언에 따라 서원웅이 갖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15%를 서원웅과 서승학이 7.5%씩 나눠 갖게 된다.
그런데 만일 서청수 회장에게 부인이 생긴다면.
그 15%가 부인 6.42%, 서원웅 4.28%, 서승학 4.28%로 나뉘게 된다.
부인이 1.5, 서원웅이 1, 서승학이 1을 가져가는 것이니.
서청수 회장이 부인을 들이게 된다면 서승학의 지분은 기존보다 3% 이상 낮아지게 되는 셈.
확실히 이쪽이 합리적이었다.
한참 웃던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을 내가, 그리고 김왕장이가 생각 못 했을 거 같아?”
“무, 물론 아니겠죠.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김태준도, 왕윤수도 나한테 그런 소릴 하지 않더군.”
“…….”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감히 그런 소리를 하지는 못하는 거겠지. 심지어는 그 얼음장 같은 왕윤수도 입술만 벙긋하고 입 밖으로 꺼내질 못하는 거야.”
대찬의 얼굴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아니야. 그 말은 했어야 해. 왕윤수나 김태준이 정말 나를 생각했더라면, 했어야지.”
“…….”
서청수 회장은 푸근하게 웃었다.
“자네는 정말 원웅이를 위하는구만. 사실 말이야, 자네가 이해타산만 따진다면 그 말을 안 하는 게 나았지. 지분이 아슬아슬할수록 원웅이는 몸이 달아오르고 자네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지니까.”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마냥 자본가처럼 굴지 않고 아들의 친구로서 험한 말도 서슴없이 해주니.”
대찬은 그런 서청수 회장의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은 웃으며 대찬의 손을 잡았다.
“그래, 맞는 말이야. 부인을 맞이해야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힘을 다해 바깥의 양윤희를 불렀다.
“윤희! 잠깐 이리 들어와 봐.”
그 말에 양윤희는 문간에 몸을 기대고 서서 말했다.
“재미없는 얘기는 다 끝났나요?”
“끝났어. 대신 조대찬이 재밌는 얘기를 해줬어.”
“무슨 얘기예요?”
서청수 회장은 헤벌쭉 웃었다.
“나랑 결혼식을 올려줬으면 하는데.”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에요?”
“재밌지? 조대찬이가 권유한 일이야.”
대찬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러니까 제가 드린 말씀은 단지 서류상의…….”
“서류상의 작업은 이미 끝내놨어. 윤희랑 나는 서류상으론 이미 부부야.”
“아…….”
서청수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우리 결혼식 주례를 좀 봐주게.”
“예?”
“내가 여기에 와있는 걸 아는 사람은 우리 둘하고 김태준, 왕윤수, 그리고 자네가 전부야. 근데 오래 날 모신 녀석들한테 이런 소꿉놀이를 보이기엔 좀 부끄럽잖나.”
“아들 친구에게는 괜찮으십니까.”
“이런 로맨스는 젊은 사람이 더 잘 이해해주지 않을까?”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