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10화
김태준 사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회장님께서는 호주에서 극비리에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치료라기보다는 조금 생명을 연장하는 정도지만.”
대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필래에서 단 두 분만 아시는 일을, 저한테 말씀하셔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회장님과 각별하다고는 하나 조 대표님은 외부인입니다.”
“네, 저는 회장님이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습니다.”
“알리지 않아도 된다면 알리지 않았을 겁니다.”
대찬은 잠깐 침묵하다 입을 뗐다.
“그 말씀은… 저한테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겠죠.”
“맞습니다.”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속내를 능히 내다봤다.
“그렇다면… 승계작업과 관련된.”
“맞습니다.”
그저 애틋한 마음과 절절한 심경을 공유하자고 대찬에게 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누구나 약해진다지만 서청수 회장은 그 정도로 무른 사람은 아니었다.
김태준 사장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마냥 슬픔에 젖어있을 때가 아닙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워낙 급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아직 승계작업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시겠죠.”
서청수 회장의 지분이 그대로 서원웅에게 전달된다면야 승계작업이라고 불리는 거창한 사업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상속세였다.
50%에 달하는 세율을 감당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이 보유한 필래지주의 지분은 30%가 넘었다.
필래지주의 시가총액은 대략 8조.
30%로만 잡아도 서청수 회장이 보유한 지분의 가치는 대략 2조 4천억 원이었다.
그럼 상속세는 그 절반인 1조 2천억 원을 초과한다는 뜻이었다.
어디 재산이 그뿐인가.
필래그룹의 계열사 곳곳에 서청수 회장의 지분이 뿌려져 있었고, 보유한 부동산 등을 포함하면 적지 않은 재산이 추가되었다.
지분을 팔아치우자니 경영권이 위태롭고 그렇지 않자니 세금 낼 현금이 없었다.
분납으로 최대한 늦춰봤자 저 큰돈을 적어도 5년 안에는 갚아야만 했다.
세금을 그 무엇보다 아까워하는 재벌은 상속세를 줄이려고 별짓을 다한다.
똥물이라도 원샷 하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승계작업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식은 회사를 물려받을 2세에게 쌈짓돈을 쥐여 주는 것이었다.
2세의 이름으로 별 볼 일 없는 회사를 하나 만든다.
그 회사에 계열사의 일감을 몰아준다.
회사가 커진다.
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킨다.
그럼 2세는 떼돈을 번다.
그 외에도 유명짜한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빠 새의 부리에서 아기 새의 부리로 통통한 벌레를 옮겨줄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물리적인 시간이 꽤 소요되기 마련이었다.
서원웅이 후계자로 낙점된 것이 여러 해였기에 그를 점찍자마자 작업을 시작했다면 무난히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청수 회장을 비롯한 총수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쉽게 내려보내지 않기 마련이었다.
그게 자신의 후계로 낙점된 자식이라 할지라도.
서청수 회장은 적어도 10년은 더 현역으로 뛸 작정이었다.
췌장암이 그의 운명에 들어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냉혹하고 철두철미한 재벌도 이런 인간적인 허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대찬은 김태준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속세 문제가 크겠군요.”
“문제는 상속세뿐만이 아닙니다. 서승학 씨의 문제가 남습니다.”
“…아.”
대찬은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쳐진 자식이었지만 그래도 자식은 자식이었다.
서청수 회장이 유산을 몽땅 서원웅에게 상속하라고 지시해도 법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서원웅과 서승학이 협의를 하면 서원웅에게 유산이 모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서승학이 미쳤다고 그렇게 해줄 리가 만무했다.
김태준 사장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셈법은 간단합니다. 소송으로 가면 서승학 씨도 법정상속비율의 절반을 취할 수 있습니다.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죠.”
“…그렇겠네요.”
산 넘어 산.
가장 잘 풀리는 경우는 서승학이 서원웅의 경영권을 인정하고 얌전히 지분을 처분하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도 그 지분을 누가 취하느냐에 따라 서원웅의 경영권을 얼마든지 위협할 수 있었다.
가장 안 풀리면 서승학이 적장자로서 제 몫을 취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수가 있었다.
이러면 서청수 회장의 사후 필래그룹은 전쟁터로 변하고 말 것이었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임의로 조 대표님과 교섭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회장님께서는 조 대표님과 단둘이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저더러 호주로 가라는 뜻인가요.”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신 줄은 알지만.”
“알겠습니다. 이 정도의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가야죠.”
“결례 좀 잠깐 저지르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는 한참 힘을 준 채로 대찬의 손을 쥐다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찬아, 부탁 좀 하자. 회장님, 그리고 서원웅 잘 도와줘.”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바로 호주에 갈 채비를 했다.
그의 일정은 로튼 프룻츠 직원들에게도 비밀이었다.
이 일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아니,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패닉에 빠질 것이다.
필래그룹은 그야말로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할 테니까.
서청수 회장의 전처인 백양옥 여사가 일으킨 난도 그 위기에 비하면 약과일 것이다.
대찬은 자신이 그 도화선이 되는 것은 극구 사양이었다.
그래서 수행원도 따로 없이 홀로 호주로 떠났다.
서청수 회장은 병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시드니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을 달리면 보이는 도시, 울런공(Wollongong).
그곳의 한적한 별장에서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찬은 서청수 회장 측에서 준비한 차량을 타고 별장에 도착했다.
대찬의 얼굴은 무거웠다.
보안 문제로 별장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대찬은 사람이 없어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 현관을 두드리니,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아, 어머니.”
“오랜만에 뵙죠?”
서원웅의 어머니, 양윤희였다.
그녀는 대찬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친근함을 표하곤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먼저 방 안으로 들어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여보, 조대찬 대표 왔어요.”
양윤희가 서청수 회장을 부르는 ‘여보’라는 호칭이 대찬의 귀에 간지럽게 들렸다.
서청수 회장은 가래 끓는 목소리로 대찬을 불러들였다.
“조대찬, 안으로 들어와.”
대찬은 긴장 탓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로 걸어 들어갔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양윤희가 그를 부축했다.
서청수 회장은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볼이 움푹 패고 머리에는 윤기가 없었다. 어깨는 살이 빠져 뼈 모양이 그대로 보였다.
다만 부리부리한 눈빛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대찬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부러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어 안타깝습니다.”
“나만큼 안타깝겠나. 이리 와서 앉아.”
“…예.”
서청수 회장은 빙긋 웃으며 양윤희에게 말했다.
“커피 좀.”
“몸에 안 좋아요. 차 드세요.”
“커피 마실래. 그거 마신다고 수명이 얼마나 줄겠나. 한 5분 줄까? 그 정돈 줄어도 돼.”
양윤희는 받아치기 어려운 농담에 씁쓸한 웃음만 짓고 밖으로 나갔다.
서청수 회장은 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환자 특유의 단내가 대찬의 코에 끼쳤다.
대찬은 내색하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멍한 표정으로 큰 창을 통해 보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사람이란 게 이렇게 우스운 존재야. 이렇게 한순간에 초라해진다고.”
“오히려 제 눈에는 대단해 보이십니다. 눈빛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으십니다.”
“날 놀리는구만.”
“놀리는 게 아닙니다, 회장님.”
서청수 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죽을 때가 다 됐는데도 고향에 못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봐. 이보다 더 한심하고 초라할 수가 있나.”
“…….”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자리를 털고 건강해진 모습으로 한국 땅을 밟으실 겁니다.
웬만한 병이라면 그렇게 인사치레를 했겠지만, 그런 인사치레조차 대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양윤희는 대찬과 서청수 회장 몫의 커피를 내오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앞으로는 한가한 농담이 아니라 다 죽어가면서도 놓지 못하는 그놈의 돈 얘기가 이어질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앙상한 무릎을 주무르며 대찬에게 말했다.
“자네도 많이 바쁠 테니까 쓸데없는 얘기는 관두세.”
“지금 회장님과 나누는 모든 대화가 저에게는 쓸데없지 않습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구만.”
“일정은 넉넉히 비워뒀으니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서청수 회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야. 오래 말하면 호흡이 달리고 머리가 굳어. 조금이라도 빨리 용건을 말하는 게 나아.”
“…….”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가만히 응시했다.
“자네가 서원웅의 백기사가 되어줬으면 하는데.”
서원웅이 경영권을 지켜내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심껏 그리할 생각입니다.”
“일전에 화이트이글이 수건 던지고 팔아버린 지분을 여러 곳에서 사 갔는데, 영국 투자은행에서도 대거 인수했었지. 기억하나?”
“예, 기억합니다.”
“영국 투자은행 쪽에서 가져간 지분이 한 3퍼센트 정도 돼. 그걸 자네가 인수해줬으면 해. 그쪽에서도 충분한 용의를 보였어.”
3퍼센트라면 2천 4백억 가량.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극동일보 임직원조합에서 제 지분을 좀 뺐으면 하더군요. 그쪽에 대거 팔아치우고 현금 마련해서 인수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잠깐, 개인 돈으로 하겠다는 건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굳이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뭐 있나.”
무리해서까지 지분을 사들일 필요는 없다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회삿돈, 즉 남의 돈을 놔두고 왜 아까운 사재를 동원하냐는 것.
대찬은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하, 서청수 회장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또 그 말라비틀어진 정의론인가? 회삿돈으로 필래지주 주식을 사들이는 건 횡령이나 다름없다는 그런?”
“정의론까지는 아니고요. 그래야 제가 떳떳할 수 있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자네는 알다가도 모르겠네. 언제 보면 여우처럼 약삭빠르다가 언제 보면 또 곰처럼 둔하고 미련해.”
“저는 여우로만 보이는 사람은 약삭빠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약삭빠르게 보이는 거지.”
“허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필래지주에 회삿돈을 밀어 넣을 순 없습니다. 이건 단순히 옛 직장에 대한 애사심과 원웅이에 대한 우정의 소산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 3퍼센트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을 뿐이야. 내가 자네에게 거는 기대는 그 정도가 아니야.”
“그 정도가 아니라뇨.”
“지주회사에 원웅이 지분이 생각보다도 적어.”
“네, 알고 있습니다.”
서청수 회장이 생존해있는 지금. 필래지주의 경영권은 안정적으로 보장되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 개인이 소유한 지분이 30%를 넘어갔다.
또 그가 실질적으로 소유한 필래제과가 5%의 지분.
그리고 서원웅을 지지하는 서청운 사장의 계열사 지분까지 포함해 2.5%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를 견제하던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은 백양옥 여사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이후 손을 털고 나가 지분이 전혀 없었다.
백양옥 여사 역시 그녀가 이사장으로 있는 벽호문화재단과 벽호학원이 보유한 필래지주의 지분을 상당량 매각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5%의 지분은 보유하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의 경쟁자가 이렇듯 모두 지리멸렬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서청수 회장이 사망한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 공백을 파고들려는 세력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3퍼센트라도 큰 도움이기는 하지만 자네가 더 큰 역할을 해줬으면 해.”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가 있으십니까.”
서청수 회장은 얇은 환자복의 밑단을 잡았다가 놓았다.
“일단 로튼 프룻츠의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겠지.”
“…….”
“자네가 명실 공히 부호의 반열에 오르긴 했지만, 필래 같은 큰 회사를 개인의 힘으로 떠받치기는 역부족이니까.”
“로튼 프룻츠에 이익이 될 수 없다면 회삿돈을 투입할 수 없습니다.”
대찬의 대답에 서청수 회장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