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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09화 (509/556)

난 할 수 있어 509화

콧노래를 부르며 어슬렁어슬렁 문 앞까지 도착한 장백주 실장은 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회장님 계시나?”

“아, 네. 근데 지금 손님이 계셔서요.”

‘나보다 더 약삭빠른 놈이 이 회사에 있었다니.’

장백주 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손님이라니, 누구.”

“로튼 프룻츠 조대찬 대표님이요.”

“아아, 조대찬 대표님…….”

장백주 실장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뚫어져라 문을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그냥 가긴 아쉬워서 비서한테 화풀이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야, 조대찬 대표가 밖에서나 대표지 여기서도 대표인가?”

“…예?”

“엄연히 사내 직책이 있는 사람이잖아. 비바체 사외이사라고 해야지.”

“아…….”

이름이 사외이사인데 웬 사내 직책.

비서는 속으로 적극적으로 반박하면서도 겉으로는 얌전한 표정을 지었다.

장백주 실장은 쯧, 혀를 찼다.

“일 좀 똑바로 해라.”

그는 톡 쏘고는 비적비적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비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보던 업무에 다시 시선을 옮겼다.

불청객이 왔다 간 줄도 모르는 서원웅은 대찬의 말에 집중했다.

대찬은 서원웅의 부탁에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결국 인사가 만사지.”

“인사.”

“옛사람들 중에 솎아 낼 사람은 솎아 내고, 쓸 사람은 확실히 쓰고. 솎아 낸 자리는 새로운 사람을 발굴해서 채워 넣고.”

“솎아 낸다라…….”

“네가 그 작업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네 사내 장악력이 결정되는 거야.”

옳은 말이다.

서원웅은 대찬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대찬을 보낸 서원웅은 김태준 사장, 왕윤수 사장, 장백주 실장을 불러 앉혔다.

서씨가 필래의 머리라면 김왕장은 머리를 받치는 목이고 어깨고 허리였다.

좀 전의 헛걸음 때문에 장백주 실장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서원웅은 그들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많이 부족한 걸 압니다. 앞으로 적극적인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장백주 실장은 씩 웃었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잘할 테니.”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심껏 보좌하겠습니다.”

왕윤수 사장은 가만히 서원웅 부회장을 바라봤다.

“그룹의 장악이 가장 중요합니다. 앞으로 얕보여선 안 됩니다. 저희한테도 과한 존대는 삼가십시오.”

“그러죠.”

서원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윤수는 대찬과 비슷한 말로 인사치레를 대신했다.

“앞으로 저희 셋을 불러 모아 의논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겁니다. 밀실정치는 구세대의 유물입니다. 저희에게 휘둘리지 마시고 탁 트인 곳에서 부회장님의 경영을 하시면 됩니다.”

왕윤수 사장의 말이 장백주 실장은 불편했다.

김과 왕은 밀실 밖에서도 충분히 제 기량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장백주 실장 자신은 콩나물이라는 걸 잘 알았다.

깜깜한 밀실에서만 잘 자랄 수 있는 콩나물.

볕 드는 곳에서는 발휘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서원웅은 씩 웃었다.

“고견 감사히 듣겠습니다. 대신 오늘만 세 분을 모시고 말씀 나눠야겠습니다. 제가 중요한 결정을 해서요. 세 분께 미리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중요한 결정이요?”

“네, 제가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새로운 인사배치를 고려했습니다.”

왕윤수의 관자놀이가 뜨끔했다.

대찬이 떠나고 김왕장을 불러 앉힌 그 사이, 서원웅은 혼자 집무실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는 대찬의 말대로 솎아 낼 사람을 결정했다.

김왕장도 그 솎아 내는 작업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서원웅은 심호흡을 하고 입술을 뗐다.

“왕윤수 사장님은 누가 뭐래도 우리 그룹의 사정을 가장 깊고 자세하게 아는 분입니다.”

“네, 틀린 말은 아니죠.”

왕윤수 사장은 쓸데없는 겸양은 부리지 않았다.

“제가 어제까지 지냈던 경영개선실장 자리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앞으로 경영개선실을 우리 그룹의 컨트롤타워로 삼을 생각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원웅은 이어 김태준 사장을 바라봤다.

“김태준 사장님께서는 필래케미칼을 맡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필래케미칼은 서청수 회장이 미래먹거리로 일찍이 점찍어놓은 중요 계열사였다.

김태준 사장에게 필래의 미래를 진두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의 소임을 맡긴 것.

역시 본사의 갑갑한 정치놀음보다는 화끈한 비즈니스맨의 역할을 선호하는 김태준 사장은 흔쾌히 그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 다음은 장백주 실장의 차례였다.

서원웅은 장백주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 실장님만큼 회장님을 잘 보필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하, 과찬입니다.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앞으로 부회장님을…….”

서원웅은 장백주 실장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역시 회장님의 곁에는 장 실장님이 계셔야 합니다. 연봉을 100% 인상해드리겠습니다.”

“…예?”

장백주 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원웅은 웃으면서 그에게 당부했다.

“앞으로도 회장님을 잘 모셔주십시오. 가끔 보면 혈육인 저보다 장 실장님을 더 의지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장백주 실장은 서원웅의 말에 즉각 예, 라고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서원웅의 말은 친절했지만 냉혹했다.

너는 서청수 회장의 순장조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서원웅도 그런 의도로 말한 게 맞았다.

그가 보기에 장백주 실장은 그저 진돗개였다.

진돗개는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이 아닌 존재는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다.

주인의 아들도 진돗개에게는 주인이 아니었다.

장백주 실장은 왕윤수나 김태준과는 달리 글로벌 감각도 부족하고 인망도 좋지 않았다.

한 가지의 장점이라면 주인을 우직하게 따르고 조직 내의 군기를 기가 막히게 잡는다는 점.

그게 필요한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따라서 서원웅은 그를 중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장백주 실장은 대찬이 말한 ‘솎아 낼 옛사람’의 조건에 너무나도 완벽하게 부합했다.

김왕장은 서원웅과의 면담을 마치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김태준과 왕윤수는 장백주 실장을 흘끗 보고 흩어졌다.

그에게 더 건넬 말이 없었다.

장백주 실장은 일언반구 말도 없이 사라지는 김태준과 왕윤수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는 입술을 꽉 물었다.

‘자기들은 알 바 아니라 이거지……. 싸가지 없는 새끼들.’

그러나 장백주 실장의 심중에 가장 얄미운 건 김과 왕도, 서원웅도 아니었다.

‘아까 조대찬이 서원웅을 구워삶아서 이 모양 이 꼴이 됐어.’

모든 건 조대찬 때문이다.

장백주 실장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시각, 대찬은 마강국과 필래타워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대찬이 간단히 짜장면이나 먹자고 했더니 마강국은 잔뜩 부은 얼굴로 투정을 부렸다.

“간만에 서울 나왔는데 짜장면이 뭡니까? 비싼 것 좀 드시죠.”

“혹시 자기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 비싼 거 먹자고요.”

대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그럼 뭐 점심부터 한정식 거하게 차려먹고 그러려고?”

“한정식 좋네. 한정식 먹자고.”

대찬은 마강국에게 눈을 흘기고는 그의 원대로 해주었다.

한정식집은 반찬 가짓수가 많으니 차리는 데도 오래 걸렸다.

상이 절반 정도 차려졌을 때, 대찬의 전화벨이 울렸다.

김태준 사장이었다.

“아, 사장님. 아까 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필래타워에 있었습니다. 연락드리려다가 업무시간이라 바쁘실 거 같아서.”

“한번 연락을 주시죠. 뵙고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장님, 갑자기 웬 존대를 하고 그러세요.”

“존대 안 할 도리가 있습니까. 사원 대리 대하듯이 틱틱거리기에는 너무 거물이 되셔갖고.”

“거물이라뇨. 당치 않으십니다.”

“조 대표님한테 반말 찍찍 갈겼다가는 서 회장님한테 조인트 까입니다. 그냥 존대 들으세요.”

대찬은 멋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아, 네.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데.”

“저 아직 서울입니다. 필래타워 앞에 한정식집 아시죠.”

“초림정이요.”

“네, 지금 저희 직원과 막 식사하려던 참인데 사장님 식전이시면 오시겠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조 대표님 성공하긴 하셨나 봅니다. 미팅도 아니고 평일 점심을 그렇게 거하게 드시고.”

“…….”

대찬은 구구절절 마강국의 핑계를 대려다가 꼴이 더 우스워지니 침묵했다.

김태준 사장은 금방 도착했다.

대찬은 일어나 그를 맞았다.

마강국도 일어나 그에게 꾸벅 허리를 꺾었다.

김태준 사장은 씩 웃으며 대찬, 마강국과 악수를 나누고 착석했다.

대찬은 우선 김태준 사장에게 식사를 권했다.

“음식 나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식사하시면서 말씀 나누시죠.”

“네. 일단 식사 먼저 하시죠. 얘기는 단둘이 나누고 싶으니.”

김태준 사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외근비서를 하면서 눈칫밥깨나 먹은 마강국이 얼른 말했다.

“말씀 끝날 때까지 나가 있겠습니다.”

“아아, 그럴 거 없어요. 나도 나이를 먹었더니 밥 먹으면서 심각한 얘기 하면 얹혀요. 식후에 차 마시면서 말씀 나누시죠.”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심각한 얘기를 하시려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대찬은 그런 김태준 사장의 말이 그저 농담인 줄만 알았다.

밥을 다 먹고 대찬과 김태준 사장은 밀폐된 곳에서 차를 마셨다.

유난히 보안을 따지는 품이 정말 심각한 얘기를 하려는 듯했다.

대찬은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얘기라면 서원웅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럼 김태준 사장보다 상급자인 서원웅이 대찬과 만났을 때 얘기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서원웅은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대찬은 그저 김태준 사장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김태준 사장은 차를 한 모금 머금고 대찬에게 말했다.

“마음의 준비는 다 하셨습니까?”

“무슨 얘기길래 이렇게 겁을 주세요.”

“저는 충분히 경고 드렸습니다.”

대찬은 긴장을 풀고자 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가슴을 쓸었다.

“말씀하시죠.”

“회장님 3개월 남으셨습니다.”

“예? 서원웅 부회장으로 올리더니 3개월 있다가는 회장으로 올리실 참입니까?”

김태준 사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3개월 시한부 선고받으셨습니다. 췌장암 말기랍니다.”

“…뭐라고요?”

그의 말에 대찬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서청수 회장의 죽음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떨 때는 자신보다도 더 젊은 총기를 유지하던 그였다.

그런데 대뜸 3개월 남았다니.

한국의 여론을 주무르던 극동일보 홍구완 사장의 정신이 대번에 흐리멍덩해지기도 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대찬은 얼떨떨한 감정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그간 서청수 회장이 종적을 감춘 이유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쩐지 너무 은둔하신다고 생각은 했지만…….’

대찬의 눈동자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불안하게 움직였다.

김태준 사장은 이미 그 과정을 거친 듯 덤덤한 모습이었다.

그는 대찬이 궁금해 할 부분을 미리 해소해주었다.

“서원웅 부회장님은 아직 모르십니다.”

“어째서…….”

“서원웅 부회장님 심성 아시잖습니까. 지금 알리면 충격이 클 겁니다.”

“언제 들어도 충격은 크겠죠.”

“아직은 알릴 때가 아닙니다.”

“서 부회장이 그룹을 어느 정도 장악한 다음 알릴 생각이십니까?”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의 지시가 그렇습니다.”

“…충격이 큽니다.”

“그러실 겁니다. 조 대표님이 필래에 입사한 게 한두 해 전이 아니니.”

“회장님께서는 그 전부터 절 많이 아껴주셨습니다.”

“예, 회장님께도 조 대표님은 각별한 존재였습니다.”

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필래에서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와 왕윤수 사장 둘뿐입니다.”

“장백주 실장님도 모르신다고요?”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백주는 쳐낼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알아도 장백주만은 몰라야 합니다.”

“하지만 명색이 회장 비서실장인데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지…….”

“비서실장 자리는 말씀대로 명색만 남았습니다.”

서청수 회장 역시 장백주 실장이 자신에게는 충성해도 서원웅에게는 그렇지 않을 사람이란 걸 직관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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