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08화
2020년 2월, 흥읍역 역전광장.
흥읍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만큼 동서남북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광장에 최재한은 단상을 설치하고 마이크를 들었다.
-“저는 이번 총선에서 흥읍시 갑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을 선언합니다.”
정치에는 초보인 최재한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위험한 지역에 취재를 나가 피랍당한 사실은 큰 부끄러움으로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심려를 끼쳐드린 점,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최재한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 사건에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저의 피랍 사실을 놓고 무수히 많은 말들이 오고갔다는 걸 알았습니다.”
갈 길 바쁜 사람들은 최재한이 떠들거나 말거나 제 갈 길을 재촉했다.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갈 길이 바쁜데도 걸음을 붙들고 최재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유야 다양했다.
얼마 전 TV에 얼굴을 자주 비췄던 양반이라 신기해서.
목소리가 좋아서.
개나 소나 다 정치한다고 날뛰는구나 싶어서.
이유야 어쨌건 최재한에게는 모두 소중한 청중이었다.
-“납치당한 것도 스펙이냐고, 이름 좀 알렸다고 선거에 기어 나오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렇게 날 선 의문이 아니더라도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최재한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저의 피랍은 정치 문제가 아니라 일개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이 사건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판단되고 있었습니다. 누가 저의 피랍을 정치 문제로 만들었을까요. 먹고살기 바쁜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최재한은 고개를 저었다.
-“정치일 필요 없는 사건을 정치로 만드는 건 정치인들입니다. 저는 잡혀있는 동안 정치적인 목적으로 더럽혀졌습니다.”
최재한은 단상을 꽉 붙들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지역구에 기반을 두신 석우룡 장관님도 저를 더럽힌 정치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 석우룡 장관에 대한 원한 때문에, 사적인 목적으로 나왔느냐 물으실 수 있습니다. 대답하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사적인 목적입니다.”
최재한은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동시에 공적인 목적입니다. 정치인이 정치일 필요 없는 것을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정치로 만들 때, 저는 그것을 온몸으로 막겠습니다. 정치여야 할 것과 정치여선 안 될 것을 분명히 구분하겠습니다. 저는 배운 것도 많고 가진 것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교묘한 정치에 당하지 않고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분들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배운 것, 제가 가진 것을 그분들을 지키는 데 쓰겠습니다!”
명분은 명분일 뿐이었다.
국회의원을 뽑는 사람들은 명분에는 심드렁하다.
명분보다 중요한 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지역 내 일자리를 몇 개 만들 수 있겠느냐.
지하철을 연장할 수 있겠느냐.
납골당을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들.
최재한은 명분이 아니라 이런 실리적인 측면으로도 다른 후보들을 압도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건 최재한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의 강력한 후원자인 대찬의 힘이었다.
대찬은 최재한의 후원회장을 자처했다.
그는 별달리 최재한을 거드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그의 존재만으로 흥읍시의 일자리였고, 지하철이었다.
로튼 프룻츠가 흥읍에 진출하면서 만들어진 일자리는 직·간접적으로 1만 개가 넘었다.
산골짜기 캠퍼스에 거주하는 직원들이 많아지니 지하철 연장도 자연스레 논의되었다.
명분과 실리가 모두 최재한에게 있었으니 지지세가 쏠리는 건 당연했다.
당적이 없는 건 그에게 단점이 아니라 도리어 장점이었다.
흥읍 갑 지역구 첫 여론조사.
-석우룡 31%
-여당 후보 13%
-최재한 42%
3월, 여당 후보는 심하게 부족한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했다.
당 지도부에게 등 떠밀린 그는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최재한에게 제안했다.
최재한은 트리플 스코어 차이로 여당 후보를 따돌리고 단일화에 성공했다.
최재한과 석우룡의 1대1 구도가 완성되었다.
장관직을 내려놓은 석우룡 의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선거운동에 열중했다.
그리고 4월, 총선 당일.
대찬은 최재한의 후원회장 자격으로 선거사무소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쪼그려 앉았다.
최재한의 지지자들이 숨죽이며 선거사무소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로는 흰색 바탕에 활짝 웃는 최재한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바른 정치! 젊은 피! 흥읍에 새로운 바람이 붑니다. — 기호 3 최재한.
출구조사가 발표되자 개표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들이 말을 주고받았다.
“출구조사 결과가 속속 발표되는 가운데, 관심이 집중된 지역구의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아니라, 무소속 신인과 관록의 3선이 양자 대결을 벌이는 것으로 화제를 모았던 흥읍 갑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네, 출구조사 결과 무소속 최재한 후보가 59.2%의 득표를 얻어 40.8%에 그친 석우룡 현직 의원을 크게 앞설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출구조사일 뿐이긴 합니다만, 예상보다도 격차가 크군요.”
“네, 그래도 끝까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끝까지 두고 봐야 한다는 건 방송용 멘트에 불과했다.
이미 게임은 끝났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숫자가 발표되자마자 최재한의 선거사무소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대찬은 씩 웃으며 박수를 치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소를 빠져나갔다.
대찬과 최재한 사이의 친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게 더 이상 부각되어서 좋을 게 없었다.
최재한은 대찬이 나가는 것도 보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좌우의 지지자들과 쉴 새 없이 악수를 했다.
최종 스코어 60.1% 대 39.9%.
최재한의 압승이었다.
최재한이 당선된 후.
여야에서는 최재한 영입전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무소속 신분은 제약이 많다.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눈치 그만 보고 무소속 신분을 버리고 자기 당으로 들어오라.
그들은 달콤하게 속닥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최재한은 양쪽의 손을 모두 뿌리쳤다.
최재한이 바라는 건 거대한 권력도 아니고 넓고 깊은 인맥도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국회의원 1인의 소임을 해내기에는 무소속으로도 충분했다.
* * *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정덕춘 이사는 대찬에게 건네는 아침 인사로 안녕하세요, 대신 축하드립니다를 선택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금배지 달았나요. 저한테 축하하실 일은 아닌데요.”
“이제 흥읍시가 대표님 영지나 다름없게 됐잖습니까.”
“영지라니, 말씀 조심하세요.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 나요.”
정덕춘 이사는 웃으며 대찬의 앞에 착석했다.
“아마 극동일보가 여전히 대표님 뒷덜미를 노리고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기사를 썼을 겁니다.”
“극동일보가 여전히 그 상태였으면 최재한이 당선되는 데 애 좀 먹었을 겁니다. 얼마나 발목을 잡아챘을지.”
“석우룡 대신 최재한 의원님이 이 지역구를 맡게 됐으니 쓸데없는 시비는 피하게 되었네요.”
대찬은 가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그 이상의 이득을 취할 수 있겠다고 좋아하는데.”
“그럼 안 되죠.”
“네, 안 되죠. 욕심부리다 배가 터진 사람들 어디 한둘 봅니까.”
정덕춘 이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대찬에게 말했다.
“이득 볼 생각 대신 피해 보지 않을 생각이 현명합니다.”
“그렇겠죠.”
“아, 그리고 들어오면서 진위생 씨가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는데요.”
“진위생 씨 아주 위풍당당해졌네요. 이사님께 심부름까지 시키고.”
정덕춘 이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해는 마세요. 제가 먼저 전할 말 없느냐고 물어봤으니까.”
“하긴, 이 회사에서 누가 천하의 정덕춘 이사님께 잔심부름을 시킬까요. 가장 끗발 있으신 분한테?”
정덕춘 이사는 손사래를 쳤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 나요. 암튼 대표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술은 당해낼 수가 없네요.”
대찬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진위생 씨가 전해달라는 말이면 아마 오늘 일정 관련된 일일 텐데.”
“맞습니다. 필래 서원웅 실장이 좀 봤으면 한다는군요. 필래타워에서.”
“아무래도 제가 본사를 흥읍에 잡은 게 잘못한 일인 거 같아요. 또 우리 마강국 씨 툴툴대겠네. 서울까지 어느 세월에 가냐고.”
정덕춘 이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덕분에 대표님께서 이 소도시를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지 않으십니까?”
“그런 말씀 마시라니깐.”
대찬은 정덕춘 이사에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곤 서울로 나갈 채비를 했다.
서원웅이 필래 비바체 이사회가 없는 날에 보자고 하는 건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군말 없이 서원웅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필래타워에 도착하자 대찬은 서원웅의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서원웅은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대찬에게 가벼운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재한이한테 우리 쪽 민원도 잘 좀 들어주라고 귀띔해줘.”
“어딜 영감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앞으로는 최재한 의원님이야.”
“어련하실까.”
대찬은 빙긋 웃으며 서원웅과 마주앉았다.
“급한 일로 부른 거 같은데. 무슨 일이야?”
“나, 부회장 됐어.”
그러자 대찬의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렇게 소리소문 없이?”
“응, 취임식도 안 했어. 아주 진한 그늘 밑에서 아무도 모르게 취임했어. 말단들은 아마 뉴스 보고 알았을 거야.”
“일단 축하해. 내 친구들이 하루 사이로 출세가도를 달리네. 하나는 의원님, 하나는 부회장님.”
“고마워.”
대찬은 다리를 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우리 서 부회장님도 웬만큼 나이가 차긴 했지만 좀 빠르지 않아? 기미도 없었는데.”
“덕분에 필래 계열사들 주가가 좀 꺾였습니다.”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가볍게 위로했다.
“아무래도 서청수 회장님보다는 아직 미숙하다고 생각할 테니. 어쩔 수 없는 거야. 곧 회복되겠지.”
서원웅이 그룹의 전반적인 사무를 책임진 것이 벌써 여러 해였다.
그간 서원웅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내린 대내외의 결론은 ‘낫 배드’였다.
필래그룹의 창업주 서광구 회장은 편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회사의 덩치를 폭발적으로 키워냈다.
2대 서청수 회장은 세련되고 카리스마 있는 경영 스타일의 소유자로 그룹을 완전히 장악하고 회사의 내실을 키웠다.
그에 반해 서원웅은 확실한 색깔이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잘 차려진 밥상에서는 편식 안 하고 꼭꼭 잘 씹어 먹어서 탈은 안 나겠는데.
문제는 다음 끼니는 서원웅의 손으로 차려야 한다는 것.
과연 아버지만큼 잘 차릴 수 있을까.
누구도 쉽사리 그렇다고 하지 못했다.
필래 비바체는 서원웅의 치적이 아니라 그의 절친한 친구의 치적이라는 것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래서 서원웅도 뻔뻔스럽게 비바체를 자신의 작품이라고 자랑하지는 못했다.
대찬은 찜찜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음… 서 회장님이 서두르는 스타일은 아니신데. 왜 벌써 너를 그 높은 곳에 올려놓으셨을까…….”
“나도 좀 갑작스러워. 아예 경영에 흥미를 잃으신 건지.”
“아무튼 더 바빠지겠네. 이제 완전히 3세 경영에 시동을 건 거니까.”
“바쁜 것보다는 일단 걱정이 많지.”
“그럼 오늘 축하해 달라고 나 부른 거야?”
서원웅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코치를 좀 받을까 해서.”
“누가 누굴 코치해? 로튼 프룻츠가 커봤자 필래에 비하면 아직 구멍가게야.”
“구멍가게는 무슨. 구멍가게라고 해도 너는 맨손으로 일궈낸 거고, 나는 그저 물려받은 것뿐이고.”
“뭐야. 낯간지럽게.”
“아무튼 넌 코치 자격 충분해.”
대찬은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그래. 뭘 코치해달라는 거야?”
“부회장이 되자마자 다른 거 다 제쳐놓고 네 말부터 생각나더라고.”
“내 말?”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은 달군 쇠랑 같아서, 얻었을 때가 가장 뜨겁고 그 이후로는 식어가기만 할 뿐이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하도 주옥같은 명언을 많이 남기셔서 기억을 못하는 거지.”
대찬은 겸연쩍게 웃고 되물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내 권력은 오늘 가장 강한 거잖아? 물론 회장 자리에 오르면 그때 다시 뜨거워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그렇지.”
“그럼 오늘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게 맞겠더라고.”
“그래서 오늘 내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결단이 뭘까, 코치를 해 달라?”
“그거야.”
그때 서원웅의 집무실 앞에 장백주 실장이 건들거리며 등장했다.
그는 권력에 빌붙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부회장 취임 기념으로 준비한 샴페인 한 병을 덜렁 들고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