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07화
이렇게 되니 최재한의 송환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졸지에 석우룡 장관이 되었다.
“실은 제가 이번에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우리 당의 공천관리위원이 됐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소임이야 아시다시피 총선에서 이기기 위한 인재를 찾아내는 겁니다.”
“예, 그러시겠죠.”
“동상이몽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조 대표님께서 굳이 석우룡 장관을 찌르신 까닭을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셨죠?”
“이번 총선에서 석우룡을 떨어뜨리겠다.”
대찬은 묘한 웃음을 지을 뿐, 말하지 않았다.
의원은 그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제 해석이 틀렸습니까?”
“아뇨, 맞습니다.”
“역시.”
“그런데 의원님의 이어질 말씀은 아마 제 생각과는 다를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의원님께서는 이번 총선에서 석우룡 장관의 지역구에 최재한을 출마시킬 생각 아니십니까?”
“제 생각이 아니라 당의 판단입니다. 사실 최재한 기자보다는 조 대표님이 적임이라고 생각하지만, 언감생심이겠죠.”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금배지 달 생각이 없습니다.”
국회의원 자리도 마다하는 주제가 되었구나.
대찬은 새삼 자신의 주제가 묘하게 느껴졌다.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마하시려면 많은 걸 포기하셔야 하니 조 대표님을 원하긴 했지만 기대는 안 했습니다. 그럼 최재한 기자가 차선책, 맞습니다.”
“최재한이 출마하면 석우룡 장관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의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승 카드입니다. 상대가 석우룡 장관이고, 전장이 흥읍 갑 지역구라면 필승입니다.”
“그렇군요. 제 판단도 그렇습니다.”
바로 1년 전의 지방선거 당시 대찬이 장애인 복지시설 신혜원을 박살내면서 석우룡 장관의 지역 내 조직도 치명상을 입었다.
게다가 무리하게 로튼 프룻츠를 정부 산하에 두려다가 망신살이 뻗쳤고, 이번 아이티 사태에서도 한 방 먹고 말았다.
더군다나 맞붙는 지역구가 흥읍이라면.
승산은 최재한에게 더더욱 있었다.
석우룡 장관의 지역구인 흥읍 갑 지역구는 로튼 프룻츠가 설립된 제민동을 포함했다.
로튼 프룻츠가 제공하는 사택과 기숙사에 거주하는 인원만 오천 명이었다.
거기에 딸린 식구가 있었고, 로튼 프룻츠 덕분에 먹고 사는 자영업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미 대찬의 입김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유권자 수만 해도 상당한 퍼센티지였다.
굳이 먹고 사는 문제로 연결돼있지 않더라도 로튼 프룻츠가 커지면서 흥읍시에 기여하는 정도도 덩달아 커진 만큼, 대찬을 향한 흥읍시민의 지지는 그 누구보다 컸다.
대찬이 조금만 밀어주면 석우룡 장관은 쉽게 무너질 터였다.
의원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재한 기자를 흥읍 갑 지역구에 우리 당 소속으로 전략공천 하고 싶습니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십니까.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데.”
“이미 의지를 확인했습니다.”
대찬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역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네요. 제가 아는 재한이는 딱히 정치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이렇게 따로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는 건, 좀 잘 밀어주십사 하고…….”
의원은 대찬에게 슬쩍 고개를 숙이며 은근한 말씨로 부탁했다.
그러나 대찬은 웃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어렵겠습니다. 제가 의원님 생각과 다를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 어째서…….”
“그 당 소속으로 나가라니까 재한이가 그렇게 하겠다던가요?”
“그게…….”
정치에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당 소속으로 출마하겠다는 확답을 내리진 않았다.
의원이 말끝을 흐리자 대찬은 거 보라는 듯 씩 웃었다.
“죄송하지만 재한이와 저 사이에는 합의가 끝났습니다.”
“합의라니, 무슨.”
“최재한 기자는 무소속으로 출마할 겁니다.”
그러자 의원의 눈썹이 꿈틀댔다.
“무, 무소속이요?”
“예, 무소속.”
“잠깐만요. 무소속으로 나오면 석우룡 장관이 어부지리로 당선됩니다. 최재한 기자가 정치색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석 장관하고 대립각을 세운 이상, 이쪽으로 분류될 텐데.”
“의원님의 당에서 출마를 안 시키면 되잖습니까.”
“우리도 흥읍 갑 지역구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삼자구도로 가는 수밖에요. 제 계산으로는 삼자구도로도 최재한 기자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의원은 당혹스러웠다.
출마를 하면 좋고, 안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당 소속으로 출마하지 않겠다니.
대찬에게 들을 수 있는 대답 중에 최악이었다.
의원은 대찬에게 빌 듯이 뜻을 꺾어달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대찬의 대답은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똑같았다.
“결정은 최재한 기자가 할 겁니다. 저한테 이러실 게 아니에요. 최 기자한테 가도 대답은 똑같겠지만.”
대찬이 최재한에게 정치를 권유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의 몸값 동영상을 접했을 때였다.
아, 담백하고 진솔하다.
관자놀이에 총부리가 겨눠졌는데도 떨지 않고 여유가 있다.
급박한 와중에도 사리를 분별한다.
대중이 싫어할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논란의 여지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다.
‘정치인의 언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공인들을 오래 대했던 기자의 신분이 알게 모르게 최재한을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재한이가 흥읍에 출마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대찬은 최재한의 안전이 시각적으로 확인되자마자 속물적인 궁리를 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몸값 동영상을 확보하자마자 석우룡 장관을 건드린 것도 그런 포석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최재한이 갱단의 품에서 마침내 탈출해 교외의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대찬은 병원으로 직원을 보내 최재한에게 출마를 권했다.
거의 죽었다 살아 돌아왔는데.
간단한 안부인사 뒤에 가장 먼저 친구라는 놈이 한다는 말이 선거에 나가라.
최재한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전시되었다.
“대찬이가 나더러 선거에 나가라고 했다고요?”
“예, 흥읍 갑 지역구에 출마하시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
“허.”
“어차피 대표님께서도 본인과 만나보지도 않고 결정하시지는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하죠.”
“일단 절대 안 한다는 답변만 안 주시면 성공이라고 하셨습니다.”
최재한은 피식 웃었다.
둘 사이에 체면치레를 위한 내숭은 필요하지 않았다.
최재한은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
“새로운 영역에 발을 내딛는 거라 두렵기는 해요.”
“그러시겠죠.”
“하지만 욕심이 없지는 않아요. 언론계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사람 치고 금배지 생각 안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 말씀, 대표님께서 들으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최재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대찬 좋으라고 출마한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물론이죠.”
그렇게 최재한은 병중에서 출마의 의지를 굳혔다.
그리고 대찬과 최재한이 상봉했을 때.
둘은 호텔 방에 들어가 한참 나오지 않았다.
대찬은 최재한을 불러들이기 전, 아이티 정부에 엄포를 놓았다.
“방 안에 설치한 도청장비들은 모두 철거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손으로 찾아내면 그땐 비도축육 설비지원 전면 백지화입니다.”
그러자 아이티 정부에서는 정보국 관리들을 보내 방 구석구석에 설치된 도청장치를 모두 떼어냈다.
대찬은 실소를 머금었다.
“뭐야, 여자라도 부르려고 저러나?”
영문 모르는 PD의 상상력은 딱 저 정도의 불순한 추측이 고작이었다.
대찬과 최재한은 커피와 토스트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편한 자세로 마주 앉았다.
대찬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면서 최재한을 향해 웃었다.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대학에서 같이 조별과제 하던 거 생각난다, 그렇지?”
“이것도 일종의 조별과제지.”
“그건 그러네. 걸려 있는 게 학점이냐 금배지냐, 그 차이뿐이고.”
그 안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졌다.
그 구체적인 계획 중에 하나가 바로 무소속 출마였다.
“석우룡 장관과 세워진 대립각은 네가 무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극대화될 수 있어.”
“하지만 무소속은 정말 맨손으로 시작해야 돼.”
대찬은 최재한의 걱정에 씩 웃어 보였다.
“돈이라면 걱정하지 마. 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도울 테니까. 물론 여기에는 편법도 포함이야.”
“조직도 없고, 선거 경험이 있는 참모도 없어, 나한텐.”
“둘 다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야.”
“되겠어?”
“나도 정치는 전공이 아니라 확신할 수 없지만, 승산은 충분해.”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의 본격적인 플랜이 가동되었다.
그는 계획대로 PD에게 자신의 모든 죄상을 낱낱이 토해내도록 압박했다.
PD는 기자회견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최재한 기자에게도 깊이 사과합니다.”
PD는 코를 훌쩍이고 최대한 반성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정기인사를 앞두고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해외취재를 감행했습니다. 아이티가 위험한 지역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위험할수록 공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재한은 착잡한 표정으로 두 손을 공손히 모았지만 PD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특히 우범지대에서 갱단과 접촉하기로 한 것 또한 모두가 저의 불찰입니다. 자칫 목숨마저 잃을 뻔했던 위기를 초래한 데 대하여 최재한 기자를 비롯, 관계된 모든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최재한은 PD의 등을 점잖게 두드려주었다.
마음에도 없는 행동이지만 본디 정치를 하려면 마음에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더 많이 행하는 법이었다.
이것으로 최재한에게 가해졌던 비난의 논리적인 방패는 마련이 되었다.
물론 그저 싫다고 까대는 목소리에는 방도가 없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포석들이 다 보였다.
그들은 정말 최재한이 출마하겠구나, 확신을 가졌다.
여당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찬이 여당 의원에게 분명한 의사를 밝히고, 최재한 역시 무소속 출마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최재한이 그저 그런 후보였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그저 자당의 후보를 공천해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최재한은 그저 그런 후보가 아니었다.
신분이 특수했다.
일시적으로 대중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호감도는 옅어지겠지만 총선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월드컵 4강 갔다고 축구협회장이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르는 게 정치 현실이었다.
이 정도 건수면 총선 지역구 하나 정도는 취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자본이 되었다.
게다가 흥읍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인 대찬의 직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여당에서는 다시 사람을 보내 최재한을 영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재한을 만나지도 못했다.
여당에서는 대찬에게 전화를 걸어 거듭 요청했다.
“조 대표님,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여당에서 후보를 내지 않으면 죽는 건 석우룡 장관뿐일 겁니다.”
“흥읍 갑은 우리가 이번에 챙겨올 지역구 리스트에 이미 넣어놨습니다.”
“빼십시오, 그럼.”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겁니까?”
“도대체 여당에서는 무슨 권리로 이렇게 여러 번 협박하는 겁니까?”
“혀, 협박이라니요.”
“공직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 국민이면 누구나 총선에 입후보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여당은 도대체 왜 번번이 그 자유를 꺾으려 드는 겁니까.”
“최재한 기자와 조 대표님 때문에 선거가 망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러십니까?”
“말조심 하세요. 녹음되고 있으니까.”
“최 기자가 우리 당 간판을 달고 나오면 무조건 당선입니다.”
“달고 안 나가도 당선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대찬의 단호함에 당직자는 속이 뒤집혔다.
“미치겠네요.”
“이번에 후보를 내지 마세요. 그럼 혹시 또 압니까. 최 기자가 당선되고 그 당에 들어갈 수도 있죠.”
“그럼 지금까지 준비했던 우리 당 후보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대찬은 씩 웃었다.
“여론조사로 단일화를 하시죠. 그럼 될 것 같은데.”
“…당에 건의해보겠습니다.”
“앞으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말고 최재한 기자한테 직접 연락하세요. 나는 순수한 의도로 최 기자를 지지하는 일개 유권자이지 흑막이나 뒷배가 아니니까.”
“길 가는 초등학생 붙잡고 그렇게 얘기해보세요. 코웃음도 안 칠걸요.”
“억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