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06화
석우룡 장관에게는 대찬의 비난이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으로 고마웠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내가 언제 인질들보고 죽으라고 하길 했습니까, 돌아오지 말라고 하길 했습니까.”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대꾸하기에는 아무래도 체면이 상한다.
석우룡 장관은 대찬이 자신을 비난했던 것만큼 수위를 끌어올렸다.
“친구를 감싸는 척하면서 나를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거 아닙니까? 정치적인 형편을 따지는 건 내가 아니라 조대찬 대표 아닙니까?”
석우룡 장관은 흥, 불쾌한 콧김을 내뿜으며 탁, 외투의 밑단을 절도 있게 잡아당기곤 덧붙였다.
“그 사람들의 불행을 정치적으로 악용해야겠냐고? 내 반문 한번 해보죠.”
석우룡 장관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가지 말란 곳에 기어코 가서 잡히고, 이제 혈세까지 낭비될 마당이라 국민적 비난에 처하니까 나를 방패막이 삼는 거 아닙니까? 정치를 당신들의 사익에 악용하는 거 아닙니까?”
석우룡 장관은 대찬에게 받은 비난을 똑같은 수준으로 대응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대찬처럼 자기를 공격했다면 석우룡 장관은 의젓하게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대찬이니 부러 비난 수위를 끌어올렸다.
대찬과 석우룡 장관이 언론을 통해 한 방씩 주고받자 아이티 피랍사태가 다시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별다른 소식 없이 시간만 보내느라 잠잠해지던 이슈가 다시 뉴스 첫 꼭지와 신문 1면을 차지했다.
최재한과 PD는 극비리에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근교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최재한은 가벼운 탈수증상만 겪고 있었고, PD는 간단한 시술을 받으면 된다는 진단 결과를 받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아이티 정부의 발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조시키기 위한 거짓이었다.
총성이 울리긴 울렸는데 허공에 발사된 것이었고, PD는 그 와중에 반항을 하다가 주먹을 몇 대 얻어맞았단다.
그렇게 둘이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
대찬은 언론에 최재한의 동영상 파일을 풀었다.
대중에 공개된 최재한의 모습은 예상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석우룡 장관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했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뉴스를 접한 많은 분들이 저를 질타하실 겁니다. 충분히 그러실 만합니다.
-저는 하찮은 제 한 몸 때문에 쓸데없는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제 몸값을 지불하지 마십시오.
-대찬아, 나 좀 구해줘라. 이런 염치없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사람이 너밖에 없네.
최재한의 의젓한 목소리가 담백한 말을 더 믿음직스럽게 만들어주었다.
공개된 동영상이 그동안 최재한을 비난하던 사람들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차라리 구질구질하게 핑계라도 대면 그거라도 물고 늘어질 텐데.
‘PD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이다. 나는 갱들과 접촉하는 걸 처음부터 반대했다.’
최재한은 그런 진실조차 변명으로 삼지 않았다.
변명하지 않으니 파고들 구석이 없었다.
최재한은 ‘인질 동영상의 정석’이라는 이상한 찬사를 받으며 여론을 반전시켰다.
대찬은 동영상을 공개함과 동시에 언론을 통해 말했다.
“최재한 기자와 동행한 PD님의 송환을 위한 몸값은 전액 제 사비로 해결하겠습니다. 로튼 프룻츠의 자금이 조금도 투입되지 않았음을 노파심에 덧붙입니다.”
최재한과 PD는 퇴원하여 다시 수도 포르토프랭스로 돌아왔다.
인질 신세가 되었던 건 고작 며칠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천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최재한과 PD는 며칠 사이 폭삭 늙어 있었다.
대찬은 최재한을 보자마자 울컥,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았다.
그는 최재한을 꽉 끌어안았다.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최재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찬을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대찬은 최재한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살아 돌아와서 고맙다.”
최재한은 슬쩍 웃으며 대찬의 귀에다 대고 작게 속닥거렸다.
“긴장은 며칠 전부터 풀려있었으면서. 너 연기 잘한다?”
대찬은 최재한을 품 안에서 떼어내고 그를 노려봤다.
“연기 아니야. 개새끼야.”
대찬은 울면서 다시 최재한을 꽉 끌어안았다.
한참 울고불고하던 대찬은 최재한을 잠깐 옆으로 제쳐두고 PD와 대면했다.
대찬은 그새 울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대찬의 눈물은 물이 아니라 알콜로 돼 있는 듯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내심 최재한처럼 대찬에게 와락 안길 준비를 하던 PD.
그러나 PD는 대찬의 유례없이 냉랭한 표정에 겁부터 집어먹었다.
“조, 조 대표님…….”
“마음 같아서는 아이티 밀림에서 들개 밥이나 됐으면 했는데. 갱들하고 연락이 닿았을 때 그냥 쏴 죽이라고 하고 싶었어요.”
“…죄송합니다.”
“근데 왜 살려 보내라고 했냐면, 당신이 해줄 역할이 있으니까. 뭔지 말 안 해도 알죠.”
PD는 맥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국 돌아가면 제 잘못을 자세히 말해야겠죠.”
“최재한에게는 죄가 없다. 다 내 탓이다. 그냥 담백하게 사실만 전하면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허튼수작 부리면서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세요. 더 크게 다쳐요.”
“…예.”
PD는 담임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처럼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최재한의 등을 두드렸다.
최재한과 PD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PD는 약속대로 자신의 죄과를 소상히 털어놓았다.
덕분에 최재한에게 씌었던 일말의 혐의조차 말끔히 씻겨나갔다.
대찬은 한동안 아이티에 남았다.
처리해야 될 일이 있었다.
대통령과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허가 찔린 대통령은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협조적으로 나왔다.
대찬이 독단적으로 헬기를 띄워 최재한을 데려오는 데도 훼방을 놓지 않았다.
대찬이 자의적으로 최재한의 영상을 한국 언론에 공개하는 데도 간섭하지 않았다.
대찬이 최재한의 무사 귀환에 대통령 자신이 개입할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데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건 다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일단락되고 대찬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대통령을 접견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각하, 우리 솔직하게 얘기하시죠.”
“…그래요. 좋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조 대표 친구를 갖고 장난을 쳤어요. 헛된 욕심이었어요.”
대통령도 더 이상의 잡아떼기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정말 계속 잡아떼다가는 로튼 프룻츠가 이 나라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수가 있었다.
이미 나바사 섬을 할양하고 마이크 햇치의 주가를 올려준 뒤였다.
그런데 로튼 프룻츠가 이번 일을 핑계로 좌판을 거두고 이 나라를 떠나면 대통령의 입장은 정말 우스워지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차라리 조금 굴욕적으로 보이더라도 로튼 프룻츠와의 연을 붙잡아두는 쪽을 택했다.
대찬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자질구레하게 피차 아는 내용을 입에 담을 생각은 없습니다.”
“…….”
“단, 저를 힘들게 하신 만큼 대통령께서도 힘드셔야 합니다.”
대통령은 불안한 눈빛을 대찬에게 보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이번 일이 비도축육 설비 지원에 영향을 주진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국영기업이 비도축육의 유통과 판매를 전담하는 사우디 모델을 아이티에 적용하는 안은 폐기하겠습니다.”
“뭐, 뭐라고요?”
“아이티에는 아이티 모델을 적용하겠습니다. 생산설비는 물론 유통과 판매 역시 우리가 전담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아연실색했다.
“이봐요, 조 대표.”
“아이티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처럼 비도축육을 비싸게 팔지 못할 겁니다. 아마 원가 본전치기나 될까 말까 하겠죠.”
“이름이 좋아서 유통과 판매지, 실상은 복지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굳이 로튼 프룻츠가 나설 이유가 없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주주들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유통과 판매를 로튼 프룻츠 본사가 담당하진 않을 겁니다.”
“그럼 대체…….”
대찬은 대통령을 바라봤다.
“제가 전액 출자한 재단에서 다시 전액 출자하여 회사를 세울 겁니다. 그 회사에서 아이티에 비도축육을 보급할 겁니다.”
“그러는 이유가 뭡니까.”
“저는 대통령 각하가 다른 정치인들하고는 조금은 다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역시 정치인은 만국 공통이구나, 깨달았습니다.”
“…….”
“아이티에 비도축육을 공급하는 건 대통령 각하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아이티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함입니까.”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후자요.”
“그렇다면 문제없겠군요. 저는 최소한의 마진만 남겨 저렴한 가격에 아이티 국민들께 비도축육을 보급하겠습니다.”
“조 대표를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똑같은 질문을 드리죠. 저희가 대통령 각하를 어떻게 믿습니까?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면구스럽긴 합니다만, 저는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선행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그걸 고려하면 각하보다는 제가 비도축육 보급의 적임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용납하지 못하겠다면.”
“로튼 프룻츠는 아이티에서의 모든 사업을 접고 즉각 철수할 겁니다.”
대통령은 이를 악물었다.
“이 나라 안에서는 내 말이 곧 법이라는 걸 잘 아셔야 할 겁니다, 조 대표. 그렇게 멋대로 지껄여도 무사할 거라 생각해요?”
“저를 쏴 죽이기라도 하시게요?”
“…….”
“그런 비인도주의적인 일을 저질렀다가는 대외 원조가 끊길지도 모릅니다.”
대찬은 탁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는 협상이 아니라 통보를 하러 온 겁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대찬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대통령 사저를 떠났다.
더 할 얘기가 없으니 아이티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돌아가는 짐을 싸는 중간에도 스탠리가 여러 번 찾아와 뜻을 꺾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대찬은 끝끝내 뿌리쳤다.
대찬은 해외영업본부 직원들을 아이티에 남겨두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는 유유히 입국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대찬은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아는 얼굴인데 깊이 알지는 못했다.
“의원님.”
대찬이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동참했을 때, 그에게 이래저래 말을 걸어주었던 여당 의원이었다.
의원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는데 알아봐 주시다니, 저야말로 감사할 일이네요.”
“물론이죠. 조 대표님 한참 기다렸습니다.”
“저를요?”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절 만나실 거면 굳이 공항까지 안 오셔도 되는데요. 따로 약속을 잡아도 되고, 아니면 전화로 하셔도 되고요.”
“따로 약속을 잡자니 일이 급하고, 전화로 하자니 싸가지 없어 보여서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위상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제가 의원님을 감히 싸가지 없다고 생각할 입장은 아닌데요.”
“무슨 말씀을. 뭐, 안 그러는 게 좋은 성품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조 대표님 정도면 저를 얼마든지 싸가지 없게 볼 수 있는 거물인 걸요.”
노골적으로 추켜세우는 말에 대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의원은 흐흐 웃었다.
“젊으셔서 그런가. 이런 말에 뜨거워질 수 있는 낯이시군요.”
“누구나 그렇습니다.”
“아뇨, 국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낯입니다. 거긴 낯짝들뿐이죠.”
대찬은 부정하기도 어려워 멋쩍게 웃기만 했다.
“여긴 긴 얘길 나누기 적당한 장소는 아니니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말씀 나누시죠.”
“조 대표님, 식전이시면 식사라도 어떠십니까. 제가 사겠습니다.”
“아, 그럼 여기 가까운 곳으로…….”
대찬은 의원을 영종도의 한 외딴 식당으로 데려갔다.
쵸 후쿠히로 회장이 로튼 프룻츠에 투자를 결정했던, 청국장을 파는 식당이었다.
콩알이 살아있고 두부가 뭉개져서 나온 청국장을 보고 의원은 웃었다.
“제가 산다니까요. 더 괜찮은 곳으로 가도 되는데요.”
“왜요, 청국장 싫어하세요?”
“그건 아니지만.”
“용건 듣기 전에 비싼 밥 얻어먹으면 얹힙니다. 싼 밥을 얻어먹어야 거절도 쉽죠.”
“허, 섭섭한 말씀을.”
의원은 밥을 몇 술 뜨고 대찬에게 바로 용건을 꺼냈다.
“이번에 석우룡 장관을 들이받은 건, 계산이 깔린 행동이시겠죠.”
“…아니라곤 안 하겠습니다.”
대찬이 석우룡 장관을 찌르고 석우룡 장관이 거기에 바로 응수하고.
바로 연이어 최재한의 동영상이 언론에 공개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최재한이 송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