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505화 (505/556)

난 할 수 있어 505화

“이봐요, 조 대표.”

“화내지 마세요. 나중에 더 깊이 사과하게 될 뿐이니까요.”

“지금의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내가 그 무지막지한 갱들과 어떻게 같은 속내라는 말입니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 친구를 인질로 잡아 한몫 단단히 챙기시려는 속내가 같단 말씀입니다.”

“조 대표!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대찬과 안면을 튼 이후 처음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에 퍼그처럼 잡힌 주름이 불쾌하고 분노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럼에도 대찬의 표정은 잔잔한 수면 같았다.

“아이티 수사당국은 이미 갱단의 소재를 파악했잖습니까.”

“뭐, 뭐요?”

“그런데도 그 사실을 감추고, 최선을 다하는 척 선량한 가면을 잘도 쓰고 계십니다.”

“그건 심한 모욕입니다, 조 대표!”

“기어코 제 입으로 남은 패를 다 들추고 나서야 사실을 실토하실 생각입니까?”

대찬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몰아붙이자 대통령은 움찔했다.

그러나 정계의 최정점에 오른 이들은 기본적으로 철면피의 소질을 타고나기 마련.

대통령은 날카로운 대찬의 말을 더 격정적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조 대표야말로 이런 식으로 날 떠보지 마세요!”

“…뻔뻔하시네요.”

“나는 조 대표를 위해 부족한 힘을 쥐어짜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고 테이블 위에 한 장의 종이를 올려놓았다.

종이라기보다는 쪽지라고 하는 게 좋을 정도로 작은 크기.

대통령은 그걸 보고 물었다.

“이게 뭡니까.”

“전단지입니다. 제가 헬기를 하루 빌려서 갱단이 은신했다고 하는 지역에 뿌렸던.”

“…헛수고였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당국에는 그렇게 말씀을 드렸죠.”

“그런데.”

“이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

-한국인 몸값 지불하겠음. 연락처 34-XXX-XXXX.

그렇게 쓰인 건 전단지의 앞면이었다.

대찬은 전단지를 뒤집었다.

뒷면에도 글자가 빼곡했다.

그런데 그 글자들은 대통령이 읽을 수 있는 것이 있었고, 읽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대통령이 읽을 수 있는 건 영어였다.

-show it to the hostage. (이걸 인질에게 보여주어라.)

그리고 그 밑에 적힌 건 한국어였다.

-최선을 다해 널 찾고 있어. 기다려.

대통령이 알지는 못해도 남을 시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글자였다.

번역기만 한번 돌려봐도 알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밑에는 해괴한 글자들이 더 쓰여 있었다.

-ᄋᆞᄑᆞㅣ잇ᄂᆞᆫ 번호ᄂᆞᆫ 거즛이ᄃᆞ. 여긔 잇ᄂᆞᆫ거싀 진딧이ᄅᆞ네. 삶넷잆륡팕칣핪낪옧굾.

아마 한국인 중에서도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문장이었다.

앞의 문장은 옛 우리말이었다.

대개 알아차리기 힘들겠지만 최재한은 중세국어를 배운 국어국문학과 출신.

‘최재한이 이것도 못 알아먹으면 그냥 총 맞아 죽으라고 해.’

-ᄋᆞᄑᆞㅣ잇ᄂᆞᆫ 번호ᄂᆞᆫ 거즛이ᄃᆞ. 여긔 잇ᄂᆞᆫ거싀 진딧이ᄅᆞ네.

앞에 있는 번호는 거짓이다. 여기 있는 것이 진짜다.

뒤에 나온 건 옛 우리말은 아니되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알아차리면서도 얄팍하게 배운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말이었다.

-삶넷잆륡팕칣핪낪옧굾.

대충 필요 없는 받침을 걷어내면 삼, 넷, 이, 육, 팔, 칠, 하나, 오, 구.

34-268-7159.

이렇게 속이려 들어도 규모가 좀 있는 나라의 정부라면 대찬의 얄팍한 술수를 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아이티.

대찬의 얄팍한 술수로 전단지의 뒷면에 적힌 ‘최선을 다해 널 찾고 있어. 기다려’를 제외하면 저들에게 읽히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필요 이상의 수고를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찬이 머물던 호텔방은 도청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최재한을 인질로 잡은 갱들이 용케 전단지를 보고 연락을 하려고 해도, 아이티 정부에 의해 차단될 염려가 있었다.

아이티 정부가 그렇게 못돼 처먹었느냐 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이 그들을 얼마든지 못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미 대찬은 며칠간의 상황을 지켜보고 아이티 정부가 해결사 역할을 독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때마침 닥친 대찬의 위기를 그들이 극적으로 해결해주어, 대찬에게 채무를 지게 한다.

그럼으로써 비도축육 설비 유치를 더욱 가속화한다.

그런데 대찬이 아이티 정부를 거치지 않고 갱단과 직접 교섭해 최재한을 빼낸다면.

정부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꼭 대찬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런 사건에 정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건 당장 반대 정파의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

아이티의 의회에 진출한 정당만 해도 스무 개가 넘었다.

여당은 119석의 하원 의석 중 고작 서른 석 정도만 점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반정부시위가 끊이질 않고, 대통령의 지위도 불안정했다.

대통령은 아이티의 좋은 친구로 소개했던 한국 파트너의 어려움을 간단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다지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 대통령의 ‘정무적 판단’이 그를 충분히 못되게 만들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전단지 앞면에 적힌 숫자는 대찬의 호텔 방 전화번호를 적었다.

뒷면에 적힌 숫자는 미리 파견되었던 로튼 프룻츠 해외영업본부 직원이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한 아이티 시민의 집 전화였다.

직원은 그 전화로 최재한을 붙잡은 자들과 소통한 다음, 그 결과를 대찬을 찾아가 보고했다.

물론 직원은 대찬을 찾아가서도 음성이 아니라 필담으로 했다.

대찬은 다리를 꼬며 대통령에게 말했다.

“전단지는 살포한 즉시 효과가 있었습니다. 전화가 오더군요. 몸값으로 20만 불을 제의받았습니다.”

20만 불이면 한화로 2억 4천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큰돈이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구하는 데 들어가는 대가로 대찬이 어렵지 않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대찬은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20만 불이란 소릴 듣고 나니 헛웃음이 나오더군요. 아, 소박한 갱단이다. 정말 생계형 인질극을 벌인 거구나.”

“…….”

“전단지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전화를 걸 정도면, 정부에서 여태 접촉을 못 했을 리가 없었겠죠.”

“조 대표, 그건 다소 오해가…….”

대통령의 목소리는 확 톤이 낮아져 있었다.

궁색하게 해명하려는 투가 오히려 대찬의 의심을 확신으로 굳혔다.

“그런 와중에 무슨 알카에다나 ISIS처럼 흉흉한 동영상까지 찍는다? 20만 불짜리 인질극치고는 너무 품이 많이 들어가잖습니까. 수지가 안 맞는다고요.”

“…….”

“정말 제가 오해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만.”

“예, 오해…….”

대통령의 목소리에는 부쩍 자신감이 사라져 있었다.

스스로 봐도 무작정 오해라고 우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대찬은 한숨을 쉬며 대통령에게 말했다.

“이래도 각하의 입으로 말씀 안 해주시겠습니까? 일의 전모를?”

“조 대표가 오해할 만한 정황이란 건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큼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그렇습니까.”

대찬은 이미 대통령에게 스스로 실토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면서도 정치인의 기본기인 뻔뻔함으로 일관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역시 생각대로 실토의 기회를 대통령이 잡지 않았다.

‘그래도 좀 솔직해 주기를 바랐는데.’

대찬은 착잡한 얼굴로 대통령에게 말했다.

“우리가 먼저 정부에 몸값 협상을 원했는데도 정부는 무시했다. 오히려 시간을 더 끌라고 주문했다.”

“…….”

“갱단의 두목이 그렇게 알려왔습니다.”

“조 대표, 분명 음해공작이요.”

“그 인간들이 정부와 척져서 뭐 좋을 게 있다고 음해공작을 벌입니까?”

대통령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아무튼, 아무튼 우리는 인정할 수 없어요.”

“만 불에 입막음하시려고 했다는군요. 20만 불에 20만 불을 더 얹어주니 그렇게 실토하던데요.”

“아, 아무튼…….”

“중부 국경지대의 엘 코르테(El Corte). 좌푯값은 북위 19도 8분 58.3초, 서경 71도 39분 55.2초. 이곳이 놈들의 은신처입니다. 알고 계시죠?”

“…….”

“수사 인원을 이곳으로 파견하세요. 아마 놈들은 도미니카 공화국 국경으로 넘어가고 인질들만 남아있을 겁니다.”

“…….”

“이렇게 된 마당에 모른다고 하지 마시고요.”

“이, 일단 알려준 좌표에 인원을 파견해보지요.”

대통령은 대찬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다음 일정이 있다며 서둘러 대찬과의 자리를 파했다.

그는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오해, 오해, 오해.

대찬의 귀에 인이 박히도록 오해 타령을 했다.

대찬도 그 말을 더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한번 틀어진 믿음은 회복되기 어렵다.

대찬은 아이티의 수사당국을 신뢰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바로 다시 헬기를 수배해 주어진 좌표로 띄웠다.

맨 처음 그들의 소재를 파악했을 때, 대찬은 앞뒤 재지 않고 그들을 데려오려고 했었다.

대찬에게는 아이티 대통령의 잔머리를 혼내주는 것보다 1초라도 빨리 최재한의 안전을 보장받는 게 중요했다.

아울러 사람은 밉지만 적어도 총상, 심하면 사망인 PD의 신병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런데 여러 단계에 걸쳐 대찬과 연락이 닿은 최재한은 대찬의 뜻을 만류했다.

‘여기서 네가 날 데려가면 넌 대통령을 나무라지 못 할 거고 오히려 대통령이 널 나무라게 될 거야. 네가 대통령을 코너로 몰 때까지는 날 데리러 오지 마. 선배는 상처를 입긴 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야.’

대찬은 그의 말을 이해하고 최재한을 잠깐 더 밀림에 두기로 했다.

최재한과 PD의 피랍사건은 한국에서도 제법 중요한 뉴스였다.

게다가 언론계 사람들은 가장 동업자의식이 강한 부류다.

많은 한국 기자들이 최재한과 PD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이티 현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대찬은 헬기를 띄우자마자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기자들도 대찬이 최재한의 일에 관련해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소식통이란 걸 알고 있었다.

속보를 전하기 위해 그들은 별도로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

대찬은 그들 앞에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아침 아이티 대통령님을 접견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피랍된 우리 국민을 반드시 안전하게 생환시키겠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저는 사적으로는 피랍된 최재한 기자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공적으로는 아이티의 명예영사로서 이번 사태가 해결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런 원론적인 얘기나 하려고 불러 모은 거야?’

기자들은 뚱한 표정으로 무언의 항의를 했다.

대찬은 그런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다가 덧붙였다.

“이 나라에 머무르면서 한동안 고국의 소식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조금은 생겼습니다. 그런데 석우룡 장관께서 말씀을 참 가슴 아프게 하시더군요.”

대찬은 석우룡 장관을 특정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특정해서 비난하기.

기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하기 방식이었다.

게다가 대찬과 석우룡 장관의 특수한 관계를 모르는 기자는 없었다.

“석우룡 장관이 피랍된 최재한 기자를 건드리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는 행동인 줄은 압니다.”

오호라.

기자들은 싱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형편 이전에 인지상정을 따져야 합니다. 석우룡 장관께 묻고 싶습니다.”

대찬은 매우 강경한 어조로 석우룡 장관을 비난했다.

“장관님은 기어코 제 친구와 저의 불행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셔야겠습니까?”

아이티 대통령을 접견해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냈다는 말에는 심드렁하더니.

기자들은 대찬이 석우룡 장관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말에는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조대찬 오늘 뭐 잘못 먹었나?’

‘그러게, 왜 저래. 갑자기 석우룡한테 시비야.’

기자들은 자판을 두드리면서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그 소식은 바로 한국에 전해졌다.

대찬이 띄운 헬기가 인질 둘만 남은 갱단의 은신처에 도착해 그들을 싣고 교외의 병원에 착륙할 무렵.

석우룡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찬의 비난에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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