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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04화 (504/556)

난 할 수 있어 504화

그 소식을 접한 아이티의 공무원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그는 대찬이 복귀하자마자 찾아가 따졌다.

“조 대표님!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라뇨.”

“알면서 그러세요?”

“그쪽에서 저한테 금지한 건 민간군사업체를 이용한 무력 사용입니다.”

“왜 조 대표님 멋대로 헬기를 동원해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헬기 타고 전단지 뿌리는 건 금지 안 됐습니다. 아, 참고로 그 전단지는 1개월 안에 분해되는 성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도 벌금을 부과하겠다면 기꺼이 내죠.”

“정부의 수색 활동을 방해하고 계시잖습니까!”

“전혀요. 이건 제가 민간인 개인 신분으로 벌인 일입니다. 몸값으로 놈들과 교섭을 해도 아이티 정부와는 관계없는 일이죠.”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시면 안 됩니다.”

대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죠.”

“실망이 큽니다, 조 대표님.”

“저는 현재진행형으로 실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게 며칠쨉니까.”

“…기다리시죠.”

공무원은 대찬을 한번 쏘아보고는 휙 몸을 돌려 돌아갔다.

대찬 역시 팔짱을 낀 채 불쾌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날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찬의 전담 관료인 스탠리는 별 용건도 없는데 허구한 날 대찬을 찾아왔다.

대찬을 위로하려는 인간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대찬은 그의 의도가 마냥 순수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스탠리는 찾아올 때마다 언뜻 생각난 척을 하며 대찬에게 물었다.

“전단지를 뿌린 보람은 좀 있었습니까?”

“아뇨, 딱히. 헛돈 썼네요. 헬기 하루 빌린 것만 해도 돈이 꽤 들어갔는데.”

대찬의 대답을 듣고 스탠리는 잠깐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찬은 흘끗 곁눈질로 그 표정을 인지했다.

스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눈빛을 피하면서 말했다.

“참, 우리로서나 조 대표님으로서나 모쪼록 사건이 빨리 해결돼야 할 텐데요…….”

“예, 빨리 해결이 돼야죠.”

그렇게 다시 의미 없는 며칠이 흐르고, 대찬도 점점 피로가 쌓이던 차.

스탠리가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왔다.

“놈들이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동영상이라니.”

“자, 보시죠.”

스탠리는 가져온 USB를 대찬의 노트북에 삽입했다.

그의 말대로 동영상 파일이 하나 들어있었다.

대찬은 침을 꿀꺽 삼키며 동영상 파일을 클릭했다.

배경은 어두운 오두막.

최재한이 꿇어 앉혀져 있었다.

이 동영상을 대찬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최재한의 얼굴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최재한이 지금까지 살다는 있다는 뜻이니까.

대찬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꿇어앉은 최재한의 양옆으로 척 보기에도 불량한 녀석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최재한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말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이는 이 나라에서 몇 명 되지 않았다.

최재한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피랍된 ONB 최재한 기자입니다. 일단 노심초사하실 저희 부모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엄마, 아빠, 그래도 나 살아있어요. 아직은.”

“허, 쓸데없이 당당하네.”

대찬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스탠리는 대찬에게 슬쩍 물었다.

“뭐라고 하는 겁니까?”

대찬은 대답 대신 손짓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최재한의 말 한 글자 한 글자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스탠리 따위에게 신경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동영상 속 최재한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여태 결혼을 안 한 게 잘한 일이구나 싶습니다. 처자식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더 힘들게 했을까요.”

“저건 웬 되도 않는 너스레를 떨고 앉았어.”

대찬은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그런 최재한의 태도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아마 제 소식이 뉴스에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뉴스를 접한 많은 분들이 저를 질타하실 겁니다. 충분히 그러실 만합니다.”

대찬은 최재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어이가 없었다.

당장 자기 양옆으로 우락부락한 놈들이 총구를 겨누고 있다.

현대문명을 최대한으로 누리고 살아온 최재한에게 며칠간의 밀림생활은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럼 정신이 온전치 않은 채로,

‘나를 빨리 이 지옥에서 꺼내 달라, 살고 싶다.’

그렇게 읍소하며 눈물 콧물을 짜내는 게 도리어 인간답고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최재한은 해탈한 고승처럼 일말의 두려움조차 벗어던진 듯했다.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에 그래도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지 않냐고 하시는, 사랑이 넘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정치권에서도 갑론을박 말이 많을 겁니다. 저는 하찮은 제 한 몸 때문에 쓸데없는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누가 누굴 걱정해.”

대찬은 피식 웃었다.

-“저를 잡아온 양옆의 이놈들이 보이실 겁니다. 이놈들은 며칠 째 저를 살려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일 생각까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최재한은 어흠,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아마 노리는 것은 제 알량한 몸뚱이에 대한 몸값이겠죠. 그것만 지불하면 저는 안전할 겁니다.”

‘그렇겠지.’

대찬은 속으로 그의 말에 찬성했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제 몸값을 지불하지 마십시오.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저는 살아 돌아가도 떳떳하게 살 수 없습니다. 국가가 저를 보낸 게 아닌데 왜 국가가 제 몸값을 지불해야 합니까.”

최재한은 당연히 대찬이 이 영상을 보리란 걸 전제로 삼은 듯했다.

그는 총을 든 녀석들 몰래 슬쩍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지만 로튼 프룻츠 조대찬 대표는 저와 절친한 사이입니다. 저는 공적인 부와 권력에 기생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적인 친분에는 기대고 싶네요. 지금 너무 무섭거든요.”

최재한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대찬은 영상 속의 친구가 대견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찬아, 나 좀 구해줘라. 이런 염치없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사람이 너밖에 없네.”

최재한은 그렇게만 얘기하고 말을 멈췄다.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대찬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스탠리는 그런 그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살고 싶다고, 제발 구해달라는군요.”

대찬은 스탠리에게 미주알고주알 세세한 얘기는 들려주지 않았다.

스탠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안 좋으시겠습니다…….”

“예, 안 좋죠.”

대찬은 영상을 자신의 노트북에 옮긴 다음 스탠리에게 말했다.

“이 영상은 한국 정부와 언론에 일절 공개하지 말아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대찬은 스탠리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모쪼록 아이티 정부에서 빨리 제 친구를 찾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탠리는 최대한 믿음직스럽게 보이려고 입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찬의 눈에는 그다지 미덥지 않았다.

갱단으로부터 영상이 전달되고 사흘 후.

며칠 째 그랬듯,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공무원의 문자로 대찬은 아침을 시작했다.

-오늘도 밤사이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다. 편안히 쉬고 계시면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런 문자메시지를 계속 받으면서 참아줬지만, 이제는 그럴 의사가 없었다.

대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깨끗이 몸을 씻고, 단정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주름 하나 없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물던 호텔을 나섰다.

대찬이 호텔 로비에 내려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맞이했다.

“대표님, 나오셨습니까.”

“네, 좋은 아침입니다. 이른 시간부터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별말씀을요. 차량 대기해놨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갯짓으로 알은체를 하고는 로비를 통과해 정문으로 향했다.

직원의 말대로 세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찬이 뒷좌석에 오르자, 세단은 바로 출발했다.

목적지는 대통령의 사저였다.

대찬은 사저에 도착할 때까지 지그시 눈을 감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전날 대찬의 접견요청을 받은 아이티 대통령은 그 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이른 아침부터 대찬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불쾌한 기색을 표했다.

“적당히 당신들 선에서 끊으라니까 그걸 못하고.”

“죄송합니다, 각하. 워낙 조 대표의 입장이 강경해서.”

대통령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적당히를 알아야 해, 적당히를. 솔직히 너무 끌었다고.”

대통령이 질책의 물꼬를 막 틀던 찰나.

비서실장이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보고했다.

“각하, 조대찬 대표가 왔습니다.”

대통령은 외투 단추를 잠그며 의전비서관에게 지시했다.

“이렇게 일찍 왔으니 아마 식전이겠지. 조 대표 취향에 맞춰서 간단한 조찬 마련하도록.”

“예, 각하.”

지시를 마친 대통령은 대찬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대통령이 응접실로 들어오자, 대찬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짓으로 그를 도로 주저앉혔다.

“우리 사이에 별스러운 예의는 차리지 맙시다.”

“이른 시간에도 접견을 허락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조 대표님 요청이라면 꼭두새벽이라도 괜찮아요.”

우린 메가톤급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아닙니까.

대통령은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속닥거렸다.

대찬은 떨떠름한 웃음으로 화답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은 대찬의 맞은편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아무래도 피랍된 친구 일 때문에 날 보자고 하신 거겠죠?”

“예, 맞습니다.”

대통령은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구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나는 조 대표보다 더 마음이 다급했을 겁니다. 조 대표가 굉장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예의상으로라도 고개를 저었을 대찬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뜻밖의 태도에 대통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만간 놈들의 덜미가 잡힐 겁니다. 기다려주세요. 그, 영상은 보셨지요? 일단 조 대표 친구의 생존은 확인이 된 셈입니다.”

“네, 그걸 보니까 안도가 되는 한편 마음이 더 다급해지더군요.”

“하하,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

“얘네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

대찬의 대답에 대통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납치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돈이라고 추정하는 게 합리적일 겁니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목숨을 취하는 사이코패스든가.”

“…뭐. 돈이라고 보는 게 맞겠죠.”

“여태 제 친구를 살려뒀으니 단순히 죽이려고 붙잡지는 않았을 테고. 그럼 돈 때문인데……. 돈 때문에 이러는 거면 빨리 협상테이블에 앉는 게 급선무 아닙니까?”

대통령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인간들은 동부의 산악지대로 숨지를 않나, 이제는 동영상까지 찍어 보내는 정성을 보여준다고요?”

“아랍의 테러리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죠.”

“그놈들은 자신들이 공포스러운 존재라는 걸 세계에 각인시킬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티의 일개 갱단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대찬이 몰아붙이듯 말하자 대통령은 어흠, 헛기침을 하곤 나름의 논리를 들어 대꾸했다.

“그렇게 애간장을 태워서 몸값을 더 뜯어내려는 수작이었겠지요.”

“아, 그렇습니까.”

“예. 뭐 일국의 대통령인 내가 그놈들의 속내를 완벽히 알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글쎄요. 본질적으로는 같은 속내이신 것 같은데요?”

대찬의 퍽 도발적인 언사에 대통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자신에게 베푸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지만 저런 말은 웃어넘기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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