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02화
대찬은 직접 PD와 최재한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물었다.
“그런데 여기 흥읍까지는 무슨 일로.”
대찬은 어딘가 실없어 보이는 PD 대신 최재한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작 최재한은 PD에게 눈짓하며 그에게 대답을 맡겼다.
PD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이번에 아이티 쪽에 좋은 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딱히 외부에 광고도 안 했는데 잘 아시네요.”
“하하, 예. 그래서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제안이요?”
PD가 느물거리기만 하고 시원하게 용건을 꺼내지 않자, 답답한 최재한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아이티 취재를 하자고 하시더라고, 이 선배가.”
“그 나라에 취재할 게 뭐 있어?”
최재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려면 뭔들 못할까. 네가 아이티 쪽에다 곡물 지원을 한다고 해서 관심은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나바사 섬 사태까지 터졌잖아.”
“참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져도 그렇게 떨어지나요.”
PD의 추임새에 대찬은 난감하게 웃었다.
실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게 아니라 까마귀가 부리로 배를 떨어뜨린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최재한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별로 안 내키거든. 근데 하도 선배가 옆에서 옆구리를 쑤셔대는 통에.”
“뭐, 다 좋은데, 그걸 굳이 저한테까지 찾아와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대찬의 말이 PD의 정곡을 찔렀다.
PD는 헤헤 웃으며 최재한에게 눈빛을 보냈다.
최재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연작 시리즈로 취재할 예정인데, 개중 한 편을 로튼 프룻츠를 다루는 데 쓰려고 해.”
“우리를?”
“겸사겸사.”
최재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최재한은 별로 이 취재에 뜻이 없어 보였다.
PD가 얼마나 들쑤셨으면 그런 최재한이 흥읍까지 왔겠나 싶었다.
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PD에게 말했다.
“저희 취재는 안 하셔도 됩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 그래요? 왜요? 홍보도 되고 좋잖아요.”
홍보가 되면 오히려 안 좋거든요.
대찬은 웃으며 다시 완곡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아… 그럼 저희 체류비 좀 지원해주시면 안 됩니까?”
“…예?”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 터, 대찬도 살짝 당황했다.
“모처럼 저희가 아이티에 가는데, 우리 최재한 기자랑 절친한 사이기도 하고 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선배! 됐어요. 쪽팔리니까 좀……!”
“아씨, 넌 좀 가만히 있어. 조 대표님, 저요, 은혜를 아는 놈입니다. 베풀면 그만큼 갚는 놈이라구요.”
“허.”
아하, 이제야 알겠다.
대찬은 PD가 이 멀리까지 수고를 감수하고 온 까닭을 눈치챘다.
대찬은 난감하게 웃었다.
“저희가 체류비를 지원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요, 재한이랑 친하시잖아요.”
“최재한 기자와의 관계는 엄연히 사적인 친분입니다. 제 마음대로 회삿돈을 쓰면 횡령입니다.”
“거 참, 젊으신 분이 빡빡도 하십니다.”
“허, 빡빡하다라.”
PD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대놓고 대찬에게 퉁을 놓았다.
“겸사겸사 우리는 로튼 프룻츠 홍보해주고, 그쪽은 우리 체류비 좀 보조해주고, 좀 좋습니까?”
너무나 뻔뻔한 PD의 요구에 대찬은 어이가 없었다.
“네? 대체…….”
“조 대표님, 유도리가 좀 있어야지요.”
“죄송합니다. 어렵겠습니다.”
대찬의 단호한 거절에도 PD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재차 요구했다.
“그럼 사비로라도 좀 안 될까요? 우리 제작비가 많이 팍팍해요.”
“선배! 야, 대찬아, 미안하다. 우리 그냥 갈게.”
최재한은 PD의 팔을 이끌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PD는 억세게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조 대표님, 언론과의 스킨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면서 이러세요?”
“…허.”
“왜 사람을 자꾸 치사하고 돈 밝히는 사람처럼 만드시냐구요.”
대찬은 그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의 말을 한다고 알아들을 사람 같지는 않았다.
최재한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선배, 사정사정해서 내가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요. 한번 아니다 하면 순순히 물러날 줄 알아야죠. 왜 이러세요, 진짜.”
“야, 최재한. 너도 웃기는 소리 좀 그만해. 네가 그러고도 기자냐?”
“뭐라고요?”
“회사는 땅 파서 월급 주냐고. 취재원을 잘 구슬리고 내 편으로 만들고, 이렇게 신세도 좀 지고 하는 게 기자지.”
“그만해요, 선배.”
“새끼가 연차가 얼만데 아직도 봄 처녀처럼 숫기를 부려.”
대찬에게 막말을 하지 못하는 PD는 최재한에다 대고 화풀이를 했다.
실상은 대찬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야 씨, 너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꾸렸으면 재산이 1조가 되니 마니 하는 불알친구한테 이 정도 청탁도 뺀찌를 먹냐?”
“선배!”
“에이, 절친이라며? 죽마고우라며? 둘도 없는 친구라며? 뭐 이래. 이게 친구냐? 너 사실 구라 친 거지? 그냥 네가 조 대표 똘마니 노릇한 거였지?”
대찬은 더 두고 보지 못해 둘 사이에 개입했다.
“PD님, 낮술 하셨어요?”
“아뇨, 안 했는데요.”
“멀쩡하시다기엔 말씀이 좀 과하시네요.”
“내 후배 내가 갈구는데 조 대표님이 무슨 상관입니까, 예? 딱 보니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 거 같구만.”
어이가 없어 대찬은 멍한 얼굴로 PD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취재팀의 체류비를 일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재한이 체면을 안 살려줄 수가 없네요.”
“대찬아, 진짜 괜찮아.”
최재한의 만류에도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나 돈 많이 벌어서 네가 제대로 덕 본 것도 없는데 이렇게 유세라도 해야지.”
“역시 조 대표님이 아주 꽉 막히신 분은 아니네.”
PD도 만족스러운 듯 흐흐 웃었다.
대찬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 현금으로는 지원 안 합니다. 이번에 저희가 아이티 진출하면서 제휴 맺은 호텔이 있습니다. 거기 큰 객실로 두 개 내드릴 테니, 묵으시면서 식사도 딸린 레스토랑에서 하시면 됩니다.”
“에……?”
“이의 없으시죠? 귀찮게 호텔 찾을 일도 없고요. 그 호텔이 아이티에서 제일 좋은 호텔입니다.”
“…….”
PD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현금으로 받아 적당히 주머니에 챙기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색 맞추기로도 저희 회사는 취재하지 말아 주십시오. 반어법이 아니라 진짭니다.”
“…그러죠.”
“그리고 그 나라는 정말 위험한 나라입니다. 몸조심하시고요.”
“고맙네요, 생각해줘서.”
대찬은 PD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최재한의 손을 꽉 붙들며 말했다.
“조심해. 무슨 일 생기면 꼭 우리 회사 쪽에 접촉하고. 그럼 아이티 정부가 나서줄 테니까.”
“고맙다. 무슨 일 있으면 우리 선배가 나 대신 위험 무릅써주시겠지. 선배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아이티 땅 밟게 생겼는데.”
최재한은 PD를 곁눈질하며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대찬은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 주한 아이티 명예영사 조대찬이 직접 비자에 도장 찍어드리겠습니다. 부디 안전하게 취재하세요.”
그들을 보낸 대찬은 아이티에 머무르고 있는 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최재한을 잘 신경 써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로튼 프룻츠 흥읍 사옥을 떠나는 최재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선배인 PD는 최재한의 등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인마, 이왕 가기로 결정한 거 표정 펴.”
“알았어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고요. 저 내세워서 로튼에서 뭘 더 뜯어낼 생각은 하지 마세요.”
“허, 새끼, 까탈스럽기는. 알았어, 인마. 안 그럴게. 누가 보면 내가 조대찬한테 금품 갈취라도 한 줄 알겠다.”
“그럼 그게 갈취지, 뭡니까.”
“야, 적당히 해라.”
최재한은 PD를 흘끗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끝까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아이티로 향했다.
사장님의 특명을 받든 아이티의 해외영업본부 직원들은 최재한에게 깍듯이 대우했다.
자신들의 보스가 여느 꽉 막힌 상사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보스의 베스트 프렌드라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 기자님,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씀해주세요.”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저희까지 건사하실 거 없어요.”
최재한은 웃으며 부드럽게 사양했다.
그럼에도 직원들은 적극 협조했다.
또 로튼 프룻츠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아이티 정부에서도 취재에 적극 협조했다.
최재한은 아이티 취재를 별로 원하지 않았지만 일단 결심한 이상 최선을 다했다.
그와 PD는 통역 겸 현지 코디네이터 겸 운전기사를 고용해 아이티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 곳곳을 누비며 취재에 나섰다.
대지진 이후 아이티 국민의 삶.
나바사 섬 사태의 뒷얘기.
현지의 불안한 정치 난맥상.
구호단체와 평화유지군의 일상.
취재는 순조로웠다.
한 달의 기한을 얻어 출장을 나왔는데,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준비한 그림이 모두 준비되었다.
이쯤 되니 PD는 슬슬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 정기인사에서 동기를 제치고 요직을 꿰차려는 야심이 있었다.
최재한을 내세워 해외 탐사취재를 나간 것도 승진을 위한 확실한 건수를 세우려는 의도였다.
그런 그에게 너무 쉬운 취재는 반가운 한편 더 큰 욕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취재를 마치고 간단히 맥주 한잔을 하던 PD가 최재한을 불렀다.
“야, 재한아.”
“네.”
“우리 너무 편안하게 취재하는 거 아니냐.”
“편하면 좋죠.”
“인마, 편한 저널리즘은 저널리즘이 아닌 거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데요.”
최재한은 그가 평소답지 않게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이유를 잘 알았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물었다.
PD는 남은 맥주를 들이켜고 최재한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불쾌한 술 냄새가 가까이에서 끼쳤다.
“오늘 루이가 재밌는 말을 하더라.”
루이는 그들의 취재를 위해 고용한 현지 코디네이터였다.
“무슨.”
“자기 아는 친구가 갱단 소속이래.”
“근데요.”
“돈만 쥐여 주면 뭐든 하는 놈들이라는 거야. 인터뷰 해보면 어떠냐고 은근히 물어보더라. 루이 그 새끼도 그러면서 중간에서 뽀찌 챙기려는 거지. 그 새끼들은 돈 챙기고, 우린 저널리즘 챙기고. 어때.”
PD의 제안은 최재한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최재한의 대꾸하는 목소리는 덤덤했다.
“밖에 총소리 안 들리세요? 저널리즘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저널리즘이죠.”
쯧, PD는 반사적으로 혓바닥을 걷어찼다.
“너도 별수 없구나, 응? 짬 좀 차고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별수 없어.”
“선배가 왜 이러는지 잘 아는데요. 그래도 누울 자릴 보고 다릴 뻗어야죠.”
“야, 가드 빵빵하게 고용할게. 내 사비로 할게, 사비로. 너 이러는데도 협조 안 해주면 진짜 저널리즘 실종이다.”
최재한은 PD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비 오는 새벽.
대찬은 새벽까지 서재에서 업무를 보다가, 안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방으로 가지 않은 건 윤이영의 잠을 깨울까 염려한 탓이었다.
눈은 붙이고 있었지만 정신은 깨있었다.
잘 만 하면 툭, 툭, 유리창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에 눈이 떠졌다.
그러다 그 소리마저도 졸음이 이겨 스르르 정신이 잠에 빠질 때.
요란한 천둥이 치더니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대찬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를 받자 회사에서 당직을 서던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번쩍, 번개가 쳐서 서재 안이 일순 밝아졌다.
직원이 빠르게 쏟아내는 말을 들은 대찬의 눈이 점점 커졌다.
대찬은 차림 그대로 외투만 걸치고 급히 2층의 서재에서 현관으로 우당탕 뛰쳐나갔다.
그 소리를 듣고 윤이영도 눈을 떴다.
이 시간의 이 소리는 그녀에게 낯설었다.
대찬이 새벽 시간에 가장 신경 쓰는 일은 자신의 잠을 깨우지 않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서재에서 이동하지 않는데, 부득이 밖에 나올 일이 있어도 살금살금 고양이걸음으로 나섰다.
그렇기에 우당탕, 대찬의 거친 발소리는 그녀에게 낯설었다.
윤이영이 급히 잠옷 차림으로 밖에 나갔지만 쾅, 이미 현관문은 닫히고 대찬은 밖으로 나간 뒤였다.
대찬은 우산도 우비도 없이 바로 시동을 걸고 거칠게 사옥으로 차를 몰았다.
본사에 도착하자 당직 중이던 직원이 그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