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01화
의심받을 어떤 여지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판단.
그는 당분간 대찬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대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미국 정부는 무인도에서 잡혀가 아이티의 어딘가로 끌려간 연구팀을 며칠간 찾아내지 못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정부의 실책을 강력하게 질책했다.
상원 외교위원회 야당 간사(ranking member)인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은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정부를 욕했다.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처참한 행태입니다. 정부는 아이티를 윽박지르는 것 말고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피랍된 7인을 송환시킬 의지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햇치 상원의원께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피랍된 국민의 목숨입니다. 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죠. 고장 난 마피아 로봇처럼 협박만 계속하는 대통령의 전술은 틀렸습니다.”
-“그럼 아이티에 외교적 노력도 기울여야 된다는 뜻입니까?”
“예, 아이티 정부의 소행이 아니더라도 아이티 정부의 협력을 얻어야 피랍된 국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트럼프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으신 것 같은데요. 오늘 아침에는 아이티 정부가 계속 부인하면 아이티의 대외원조를 크게 줄이는 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마이크 햇치는 통탄을 금치 못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다는 말씀은.”
“상원 외교위원회 소속으로 오래 있다 보니, 각국의 외교관료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도 예외는 아니죠. 제가 직접 아이티 현지로 가서 외교적 역량을 보태보겠습니다.”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은 방송에서 그렇게 말하고 정말 아이티로 날아갔다.
햇치 상원의원이 아이티로 날아갈 때만 해도 그의 돌발적인 개인행동을 지탄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아무리 정부가 못 미더워도 그렇지, 어떻게 개인 자격으로 물의를 일으키냐는 것.
그런데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이 혼자서 아이티에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나바사 섬을 탐사하던 일곱 명의 연구팀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베테랑 노교수 역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은 구출된 연구팀원들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습니까. Now, you are safe. 이제 안전합니다.”
햇치 상원의원은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그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갖은 고초를 겪었던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햇치 상원의원의 품에 안겼다.
서재에 있던 대찬은 인터넷 생방송으로 그 장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뻔뻔함이 정치인의 미덕이라면 마이크 햇치는 부통령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때 윤이영이 똑똑, 문을 두드리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2화 같이 안 볼래?”
“어, 봐야지. 2화부터는 너 나온다며?”
“기대해도 좋아!”
대찬은 웃으며 윤이영의 허리를 감싸고 거실로 나갔다.
대찬은 윤이영과 나란히 드라마를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We all lie. 우린 모두 거짓말을 해.
엔딩을 알리는 스카이팰리스의 OST가 울려 퍼질 때까지도.
-We all lie, 우린 모두 거짓말을 해.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은 자신이 구출한 7인의 연구팀원들을 좌우에 세워놓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저는 이 정부가 외교적 해법을 등한시했고, 하마터면 이 귀중한 목숨들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분들께 즉각 사과하고, 이번 사고를 협박으로만 일관했던 대외정책을 수정하는 계기로 삼길 바랍니다.”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때로는 백 발의 총알보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위력적이라는 것을, 저는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햇치 상원의원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강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아이티 방문은 그 자명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아이티를 방문했기에, 자세한 사항은 밝힐 수 없습니다. 곧 아이티 정부에서 발표가 있을 겁니다.”
-Sometimes we laugh and easily lie, 가끔 우린 웃으면서 쉽게 거짓말을 해.
아이티의 대통령 역시 그와 동시에 공개석상에 나섰다.
“우리 아이티 정부는 이번 연구팀 피랍사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또한,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의 국민을 위한 헌신에 감격했습니다. 우리는 오만방자한 미국 정부가 아니라, 햇치 상원의원에게 협력하여 이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괴한은 전원 사살되었습니다.”
“괴한이 사살되었다면, 그 현장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까?”
“아뇨, 그걸 대외적으로 공개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괴한은 전원 사살되었습니다.”
아이티의 대통령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Alright, it’s faker, 맞아 전부 사기꾼이야.
“아울러, 우리는 사건이 발생했던 나바사 섬의 주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백오십 년 간 끌어온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아이티 대통령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미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는 여전히 논리적 결함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의 제안에 깊이 고민했습니다.”
대통령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저는 나바사 섬을 할양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갱스터 같은 핍박을 어른스럽게 뛰어넘겠습니다. 아이티와 미국 사이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겠습니다.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전무한 이 섬 때문에 벌어진 소모적인 논쟁은 끝장내겠습니다. 아이티를 재건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Shout it out. What you want from the world. Money, honor, beauty, everything you want.
외쳐 봐. 돈, 명예, 아름다움, 세상에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대찬은 그 발표가 있자마자 한태윤 전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티에 비도축육 설비를 지원할 겁니다.”
“예? 그게 갑자기…….”
“당장 지원하지는 않을 거예요.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한태윤 전무는 당황스러웠지만 우선 들어보기로 생각했다.
“어떤 조건 말씀이십니까?”
“일단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마무리돼야 합니다.”
“한국 민주당 말씀이세요?”
“아뇨, 미국 민주당. 그 이후에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이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지명이 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착수합니다.”
“그게 아이티에 설비 지원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어요. 차후에 밝혀드리겠습니다.”
설비 지원은 마이크 햇치가 적어도 부통령 후보로 낙점된 다음에야 가능했다.
지금으로서는 전망이 밝았다.
Now you safe, 이제 당신은 안전합니다라는 말이 마이크 햇치를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다.
국가를 위한 헌신, 그리고 안정감.
마이크 햇치는 미국 민주당에 있어 부통령 후보로 가장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
그가 낙마하여 미국 내 비도축육을 유통시킬 정도의 정치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대찬 역시 거금이 들어가는 아이티의 설비지원을 단행할 수 없었다.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주를 위해서라면.
그런데 마이크 햇치가 부통령이 됐는데도 입을 싹 닦고 모른 척하면?
그땐 어떻게 하는가.
부통령이 도깨비방망이도 아니고 미국 내 비도축육을 유통시키려면 품이 이만저만 들어가는 게 아닐 게다.
화장실 갔다 온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 땐 별 수 없었다.
미국 부통령, 아이티 대통령, 그리고 자신 사이에 벌어졌던 극비회동.
그 현장의 녹취록을 터뜨려 미국 내 전대미문의 게이트를 일으키는 수밖에.
정말 미국 내 비도축육 유통이 가시권에 들어온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설비를 지원할 계획이었다.
그전까지는 조윤재단의 이름으로 이전에 약속했던 매년 300만 달러 분량의 곡물을 지원하는 것으로 버틸 요량이었다.
이는 아이티 대통령과 합의된 일이었다.
일단 이 합의의 결과로 가장 먼저 이득을 취한 건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그저 그런 상원의원에서 일약 미국 민주당의 스타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쟁쟁한 이름들 사이에 대선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마이크 햇치는 대선 출마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정말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것보다는, 경선에서 체급을 더 키운 다음에 부통령이 되는 것 이상의 정치적 권력을 대가로 취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아이티 대통령은 소란에 휩싸였다.
아무리 나바사 섬이 가치가 없어도 그렇지, 미워 죽겠는 미국한테 아무 대가 없이 떼어주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책무는 로튼 프룻츠 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때까지 안정적인 입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대찬에게 미치는 여파는 아직까지는 전혀 없었다.
대찬은 우선 숨죽인 채 추이를 지켜봤다.
그러던 차에 아이티의 상공부 소속 스탠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 대표님, 잘 지내십니까.”
“예, 덕분에.”
“이번에 보내주신 300만 불 어치 곡물은 잘 받았습니다. 아이티 국민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부디 급한 분들께 고루 돌아갔으면 합니다.”
“이걸 횡령하는 공무원은 대통령께서 직접 엄벌에 처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세요.”
“비도축육 설비를…….”
이미 얘기가 끝난 일이었다.
대찬은 스탠리가 말을 맺기도 전에 딱 잘라 말했다.
“설비 지원은 향후 결정될 겁니다. 항상 염두에 두고 있으니 계속 환기시키지 않으셔도 돼요.”
“아뇨, 지원이 아니라 정식으로 유치하고 싶습니다.”
“유치하는 데는 돈이 듭니다.”
“압니다. 로튼 프룻츠 아이티 법인을 만들어주십시오. 아이티 정부가 49%의 지분을 갖고, 생산된 물량의 유통만 정부에 위임해주시면 됩니다.”
“사우디와 같은 조건으로 하시겠다는 겁니까.”
“예.”
“그런데 정부에서 무슨 돈으로…….”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들여오려고 합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작은 설비 정도는 건설할 정도는 됩니다. 우선 시범적으로 설비를 유치하여 효과를 계산해 보고자 합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네요. 현지에 저희 측 직원을 파견하겠습니다. 그쪽과 교섭해주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비자는 조 대표님이 직접 발급해주시면 되겠군요.”
“그렇네요.”
대찬은 즉시 아이티에 해외영업본부 소속의 직원을 파견했다.
본부장인 정덕춘 이사 대신에 차장급 직원을 선임자로 해서 다섯 명 정도가 아이티로 향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들에게 직접 비자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가서 갑질하지 말고, 너무 물렁해지지도 말고, 적당히 인간적으로 잘하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렇게 직원들을 보내고 잠깐 쉬려고 하는데, 누군가 또 대찬을 찾아왔다.
최재한이었다.
그는 자기 방송국의 PD와 함께 대찬을 찾아왔다.
대찬은 그를 보고 지레 겁을 먹었다.
‘설마 햇치랑 아이티 대통령이랑 짬짜미 벌인 거 벌써 들킨 거 아냐?’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최재한은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놀랐지.”
“근무시간 아니세요? 최재한 기자님?”
대찬이 묻자 최재한과 동행한 PD가 웃으며 말했다.
“근무 차 왔습니다, 조 대표님.”
“기자가 근무하러 여기까지 왔다면 괜히 불안해지는데요.”
최재한은 피식 웃었다.
“잘못한 게 있으니까 불안해지지.”
“없어, 그런 거.”
대찬은 슬그머니 최재한의 시선을 피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대찬은 최재한과 동행한 PD를 집무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흥읍 신사옥에 처음 와본 최재한은 집무실을 둘러보더니 씩 웃었다.
“조대찬이 성공하긴 했구나. 빛이 나네, 빛이 나.”
“뭘. 평범하지.”
PD는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찾아 앉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바쁘신데 저희가 너무 불쑥 찾아온 건 아닌지.”
“불쑥 찾아오시긴 했습니다. 지금 막 스카이팰리스 2화 재방송 보려던 참이었거든요.”
“아! 스카이팰리스. 저도 아주 잘 보고 있습니다. 윤이영 씨께도 잘 보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러죠.”
“그런데 부인이 주연 맡은 드라마를 본방 사수 안 하시고 재방송을 보세요?”
대찬은 다른 큰일 때문에 신경이 쓰여 본방송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저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좋은 건 두 번 봐도 좋아서요.”
“하긴, 대박 났던데요. 소재가 영 별로라서 윤이영 씨 선구안도 좀 무뎌졌구나 했는데 웬걸,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그렇죠.”
“더군다나 조 대표님은 개인으로는 극동일보 최대 주주 아닙니까. 이거, 두 배로 기뻐할 일입니다.”
대찬은 PD의 너스레로 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