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00화
“두 분께 질문을 드렸으니 제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로튼 프룻츠의 비도축육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면, 아이티 국민에게 비도축육 설비를 지원하여 식량난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의사가 있는가.”
대찬은 둘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럴 의사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그제야 대찬의 의중을 파악했다.
일 대 일의 거래가 아니다.
삼각트레이드.
햇치 상원의원은 대찬에게 이로운 일을 할 수 있지만, 아이티 국민에게 줄 것이 없다.
아이티 대통령은 햇치 상원의원에게 이로운 일을 할 수 있지만, 대찬에게 줄 것이 없다.
대찬은 아이티 국민에게 이로운 일을 할 수 있지만, 햇치 상원의원에게 줄 것이 없다.
양자 간의 거래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삼자 간의 거래는 성립한다.
로튼 프룻츠는 아이티에 비도축육 설비를 지원한다.
햇치 상원의원은 정치력을 동원해 미국 내 비도축육의 유통을 가능하게 한다.
아이티는 나바사 섬의 주권을 미국에 할양한다.
“잠깐.”
대통령은 손을 들어 논의를 중단했다.
이 거래는 대체로 그럴듯했다.
그러나 이익과 손해의 측면에서 한 가지 현실적인 결함이 있었다.
대찬은 그가 말하려는 내용을 충분히 짐작했다.
대통령의 입 대신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말해주었다.
“나바사 섬의 주권을 넘기는 것만으론 햇치 상원의원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맞습니다.”
“나바사 섬의 구아노는 미국에 별로 유의미한 자원이 아니고, 전략적 가치도 없어서 2차 대전 때 세웠던 등대도 철거시켰고요.”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가치라고는 야생동물과 희귀식물들이 다수 있다는 것뿐이네요?”
“예. 관할 관청도 미 내무부 산하의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이죠.”
“게다가 미국이 실효 지배 중이니, 새삼 주권을 할양받아봤자 큰 메리트가 없고…. 97년에 미국 정부는 이미 나바사 섬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냈더군요.”
“예.”
대통령은 멋쩍게 웃었다.
자신의 애국심을 미국 국민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이벤트.
그게 햇치 상원의원에게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 가치도 없고 실질적으로 미국 영토로 기능하는 섬을 할양받았다고 외쳐봤자, 그다지 감동이 없다.
게다가 아이티 정부가 대뜸 아무 조건 없이 나바사 섬 너 가져라, 하면.
그림이 영 그려지지 않는다.
햇치 상원의원이 개입할 타이밍 자체가 사라진다.
유진 깁슨이 대찬을 대신해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이 삼자 간 거래를 승낙하시기만 한다면.”
“우리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죠.”
정상적인 나라였다면, 아무리 쓸모없는 땅이라고 해도 외국에 주권을 할양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에 넘긴다고 해보자.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바사 섬을 미국에 넘기는 건 꼭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에 준하는 경우였다.
그러나 아이티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국민들의 의식주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쓸모도 없는 무인도 하나를 내주고 국민에게 동물성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기회를 준다면.
아이티 대통령은 성인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대통령은 선선히 승낙했고, 거래는 성사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미국의 한 대학 연구팀이 보트를 타고 나바사 섬에 들어갔다.
그들은 나바사 섬의 생태를 업데이트 해달라는 연구용역을 받은 참이었다.
“요즘에도 이런 정신 나간 회사가 있군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섬이라는 게 20년 전에 밝혀졌는데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헛돈 써가면서 이런 용역을 맡길까요.”
“돈을 자기 목숨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놈들이 괜히 이러겠어?”
“뭐, 그렇긴 하지만요.”
“우리야 해달란 거 해주고 돈이나 뽑아먹으면 그만이야.”
척박한 무인도에 접안한 연구팀은 넉넉히 실어온 짐을 내리고 본격적인 탐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들을 보낸 건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과 유진 깁슨 하원의원이었다.
둘은 조용한 방에 마주 앉아 은밀하게 계획을 진행했다.
“아는 연구팀을 섭외할까요.”
유진 깁슨의 말에 햇치 상원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 계획을 아는 사람은 최소한으로 해야 해.”
“그럼 정말 연구용역을 의뢰하는 것처럼 하겠습니다.”
햇치 상원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정치적 성향이 뚜렷하지 않아 경합이 이뤄지는 주)의 사립대학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플로리다로 할까요. 나바사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고.”
“플로리다, 오케이.”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주체는 어디로 하면 좋겠습니까. 정부 관청에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햇치 상원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민간업체로 해야 돼. 나와 자네가 의심받지 않을 만큼 거리가 먼 민간업체.”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그 논의의 결과.
플로리다 소속의 한 사립대학의 연구팀이, 햇치 상원의원과의 관계를 찾을 수 없는 한 민간업체로부터 용역을 받아 나바사 섬으로 향했다.
그들은 14박 15일의 일정으로 나바사 섬에 체류할 계획이었다.
연구팀을 지휘하는 교수는 해양생태계와 섬 생태계를 조사하는 데는 도가 튼 베테랑이었다.
그의 지휘하에 팀원들은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그렇게 사나흘이 흘렀다.
해안선의 생태를 연구하던 팀원은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발견했다.
허름한 나무배. 그리고 나무배만큼이나 초라한 행색의 남자들이 탑승해있었다.
그는 이런 원정 탐사에는 초짜였다. 외부인의 등장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즉시 꽥꽥 소리를 지르며 연구 팀원들에게 이를 알렸다.
“수상한 사람들이 지금 섬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베테랑 노교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망원경을 빼앗았다.
초짜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고는 싱겁게 웃었다.
“아이티 어부들이구만.”
“어, 어부들이요?”
베테랑 노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아이티랑 가까워. 그 나라에서 영유권을 주장할 만큼. 그래서 어부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리지. 걱정할 거 없어.”
베테랑 노교수는 망원경을 돌려주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미심쩍은 것을 발견하고 다시 망원경을 눈에 갖다 댔다.
그러자 안 그래도 하얀 노교수의 피부가 더욱 하얗게 질렸다.
어부들의 손에는 소총이 들려 있었다.
소총을 든 어부는 어부가 아니었다.
햇치 상원의원과 아이티 대통령은 보안이 확보된 전화로 여러 번 통화를 나눴다.
이런 공작에 능하지 못한 아이티 대통령이 물었다.
“정부군을 파견하면 안 되겠죠?”
“네, 그럼 아이티는 지도에서 삭제될 겁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은밀히 사주를 해야죠. 보잘것없는 작은 무장단체를 섭외하십시오. 이름이 좋아 무장단체지 실상은 거지 떼인 놈들을.”
“그래서요.”
“그놈들을 나바사 섬으로 보내세요.”
“그리고.”
“그리고 납치하세요. 아이티 본토로 데려가세요.”
“…알겠습니다.”
“절대 인명피해가 나서는 안 됩니다. 다치는 사람도 나오면 안 됩니다. 그럼 일이 물거품 됩니다.”
대통령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알겠습니다.”
“재수가 없으면 가뭄에 콩 나듯 일대를 순찰하는 해안경비대에게 소탕될 염려가 있습니다. 타이밍을 잘 노리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죠.”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한 기업가, 그리고 그 기업가의 명령을 받은 한 암흑가의 유력가, 그 유력가의 의뢰를 받은 괴한들이 나바사 섬으로 들어갔다.
베테랑 노교수는 망원경을 집어 던지고 당장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총부리를 들이대니 베테랑도 그 자리에 얼어붙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든 통신장비를 압수당하고 납치되었다.
무지렁이 괴한들이라기에는 일 처리가 지나치게 꼼꼼했다.
이 사건은 발생한지 한참이 지나 미국 본토에 알려졌다.
발칵 뒤집혔다.
-나바사 섬에서 플로리다 대학 연구팀 7명 납치, 아이티 괴한 소행으로 의심.
그런 보도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
미국 정부는 즉각 아이티 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사전에 햇치 상원의원과 입을 맞춘 아이티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겁박에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직접 카메라 앞에 등장했다.
“미국 대학 연구팀의 납치는 애석한 일이지만, 우리 아이티 정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누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아이티 정부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제법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나바사 섬의 주권은 아이티에 있습니다. 그들은 불법으로 아이티의 영토를 침입했으며, 이에 아이티 정부는 그들을 위해 미국 정부에 협조할 의무가 없음을 분명히 알립니다. 앞으로도 나바사 섬에 무단으로 진입하는 민간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할 것입니다.”
아이티 정부가 협조하지 않았다.
사건이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대찬의 원래 계획은 단순했다.
그저 아이티 섬의 영유권을 아이티가 미국에 넘기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유진 깁슨에게 말했더니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반응했다.
“공상과학영화 같은 얘기네. 실현되기에는 너무 거칠고 실현된다고 해도 그다지 감동이 없을 거야.”
“그렇겠지.”
대찬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씁쓸한 미소가 번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공상과학영화에 나온 터무니없는 상상들이 실제로 구현된 것도 적지 않다는 거.”
“응?”
“백 투 더 퓨처에 나오는 것들만 해도 그래. 벽걸이 디스플레이, 드론 카메라, VR. 전부 실현됐잖아?”
“그렇기는 하지…….”
“공상과학영화를 현실로 만드는 건 과학기술의 몫이지. 초, 네 말은 뭐랄까, 공상정치영화라고 해야 되나.”
유진 깁슨의 말에 대찬의 얼굴에 더 쓴맛이 번졌다.
유진 깁슨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공상정치를 현실로 만드는 건 정치 기술자들의 몫이겠지. 좋아. 그건 우리 같은 정치 기술자들이 좀 매만지면 가능한 얘기가 되겠어.”
“가능하다고?”
“응, 네가 바라는 건 햇치 상원의원이 정치력을 발휘해서 미국 내 배양육의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
“맞아.”
“그리고 그 대가로 초가 지불할 수 있는 건 아이티에 상당한 설비를 지원하는 것.”
“맞아.”
“좋아, 그럼 됐어. 나머지는 내 몫이니 맡겨두라고.”
“믿어도 되겠어?”
“날 안 믿으면 누굴 믿을래?”
유진 깁슨, 그리고 햇치 상원의원은 숙달된 정치 기술자였다.
그야말로 털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고깃덩이처럼 투박한 대찬의 공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나바사 섬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그러나 엄연히 영유권 분쟁이 이뤄지는 섬이라는 그 사실만큼은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극대화할 이벤트를 만들면 된다.
물론 그 이벤트를 만들어감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보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연구팀의 파견.
무장괴한의 상륙, 그리고 피랍.
아이티 정부가 자신들 소행이라는 추측을 부인, 그리고 강경한 태도의 견지.
물 흐르듯 이어지는 상황에는 숙달된 정치 기술자들의 꼼꼼한 장치가 숨어 있었다.
부통령을 노리는 미국의 한 상원의원과 아이티 정부, 그리고 한국의 한 혁신적인 기업 사이의 삼각 트레이드가 존재한다.
지구상의 그 누구도 그런 내막을 생각하지 못했다.
대찬은 미국 연구팀의 피랍 사실을 뉴스를 보고 확인했다.
윤이영과 나란히 앉아 그녀가 주연을 맡은 KDN 드라마 스카이팰리스의 첫 방송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미국과 아이티 사이에 영유권 분쟁이 있고, 미국이 실효지배 중인 카리브 해의 나바사 섬에서 미국 대학 연구팀 7명이 괴한들에 납치되었습니다. 아이티 정부는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고, 미국 정부는 초동대처에 실패했다는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그 뉴스를 본 대찬은 찌르르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대찬이 식은땀을 흘리자 윤이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첫 방송이라고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
“어? 어…….”
“걱정 마. 나는 첫방에 안 나오거든. 그냥 편하게 보라구.”
“그, 그러게…….”
“참 나, 자기 큰일 할 때는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사람이 웬 식은땀을 이렇게 흘려?”
“나 화장실 좀 잠깐만.”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는 바로 유진 깁슨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대찬의 생각을 잘 구현해내기는 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구현해낼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유진 깁슨이 알아서 잘 해낸다기에 그 말만 믿고 여유만만이었다.
유진 깁슨은 대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