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99화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길.
대찬은 차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스탠리의 읍소는 대찬의 지원을 얻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나라 꼴이 겉보기에도 말이 아니었다.
지나가면서, 여전히 무너진 상태로 있는 하얀색 대통령궁이 보였다.
대찬과 대통령이 만나는 장소는 재건축 중인 대통령궁 대신 임시로 사용되는 대통령의 사저였다.
시원하게 민머리가 인상적인 아이티의 대통령이 대찬을 직접 맞이했다.
대찬은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회담은 길게 진행되었다.
대통령은 노련한 정치인답게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았다.
식사로 환대하고, 커피로 환대하고, 친서에서 그랬듯 듣는 사람이 낯부끄러울 정도의 찬사를 말하며 환대했다.
그렇게 대찬이 인간적으로 매몰차지 못하게 만든 다음에 용건을 꺼냈다.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압니다. 그러나 나라의 사정이 더 어렵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요.”
“예, 어렵다는 건 충분히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안 되겠습니까?”
아이티 행을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대찬의 판단은 서 있었다.
여전히 우물쭈물할 거였으면 이 나라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찬은 대통령이 이 대화를 주도하도록 두지 않았다.
혜택을 베푸는 쪽은 자신이었다.
부탁하는 쪽에 휘둘리다 보면 수고는 수고대로 해주고 인심을 못 얻는 수가 다반사.
고마운 사람과 호구는 이 한 끗 차이로 결정되는지도 몰랐다.
“당장 설비를 지원해드리긴 어렵습니다. 저희는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입니다.”
“…아.”
“돈다발을 싸 들고 협의 중인 나라가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들을 제쳐놓고 아이티를 우대할 순 없습니다.”
대통령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렇겠지요…….”
“그러나 대통령께서 저를 명예영사로 삼으시고 이렇게 직접 초청까지 해주셨는데 외면하는 것도 도리는 아닐 겁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대찬의 말에 대통령의 입꼬리도 상하운동을 반복했다.
“그럼…….”
“제가 소유한 재단을 통해 매년 아이티에 300만 달러 분량의 곡물을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로튼 프룻츠가 앞선 계약을 모두 소화하고 아이티에 설비를 지원할 수 있을 때까지 유효합니다.”
매년 300만 달러의 원조는 작은 선물이 아니었다.
아이티는 매년 약 10억 달러의 대외원조를 받고 있었다.
개인 자격으로 전체 원조액의 0.3%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원해준다니.
이번 회담의 가치는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쩝, 입맛을 다시며 설비지원을 포기하지 못했다.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꼭, 아이티에 설비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가 마무리되었으니 남은 건 먹고 즐기는 일뿐이었다.
대통령은 스탠리에게 대찬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분부이니만큼 스탠리는 나라의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대찬을 기쁘게 해줄 작정이었다.
대찬은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만류했다.
“맛있는 아이티 요리 한 접시에 맥주 두 병이면 됩니다. 그 이상은 절대 사양입니다.”
“그럼 맥주 두 병 대신 열 병으로 하시죠.”
“그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대찬과 마강국은 스탠리의 집에 초대받아 그의 아내가 정성 들여 차려놓은 음식에 맥주를 곁들였다.
정확히는 이열 종대로 늘어선 맥주 소대에 음식을 곁들였다는 게 맞았다.
맥주 열 병은 금방 동났다.
스탠리는 덩칫값을 못하는 마강국의 알량한 주량에 한 번 놀라고, 신사답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망나니처럼 술을 퍼마시는 대찬의 모습에 두 번 놀랐다.
스탠리는 허,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조 대표님은 그 술이 다 들어가십니까?”
“그게 웬 술맛 떨어지는 말씀이실까요.”
대찬은 웃으면서 병째 맥주를 들이켰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 집에 들른 아시아인 손님이 그저 신기한 스탠리의 아내는 말없이 웃으며 음식만 더 놓고 갔다.
대찬은 그녀에게 공치사를 잊지 않았다.
“마담, 음식이 아주 훌륭합니다. 서울에 가져가서 장사하고 싶을 정도예요.”
“고마워요.”
그러자 술이 적잖이 들어간 스탠리가 이때다 싶어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럼 비도축육 생산 원천기술과, 우리 와이프의 끝내주는 레귬(legume·아이티식 채소스튜) 레시피를 교환하시겠습니까?”
“술 드시죠.”
대찬은 바로 일축하고 들고 있던 맥주병 목을 스탠리의 병목에 부딪쳤다.
스탠리는 쩝, 입맛을 다셨다.
어느덧 맥주는 럼주로 바뀌었다.
마강국은 진즉에 나가떨어졌다.
스탠리도 잔뜩 술에 절어 고개가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일찍 잠자리에 든 그의 부인을 위하여, 대찬과 스탠리는 테라스의 테이블로 이동했다.
대찬은 그와 마주 앉아 공해 없이 맑은 하늘에 밝은 별을 올려다봤다.
한 손에는 담배를 꼬나 쥐고, 한 손에는 술잔을 든 채로 대찬은 한참 앉아있었다.
그렇게 슬쩍 눈을 감고 신선한 밤공기를 마시던 그때.
탕!
총소리가 들렸다.
대찬의 감았던 눈이 저절로 떠졌다.
타타타타탕!
자동으로 놓고 갈기는 소리였다.
대찬은 총소리에 놀랐지만 스탠리는 태평했다.
그는 푸, 푸, 여전히 술 냄새 섞인 숨을 토하며 말했다.
“일상이에요. 그래도 오늘은 좀 멀리서 들리네요.”
“…….”
“이래요, 이 나라가. 신경 쓰지 말고 드시던 술이나 마저 드시죠.”
스탠리는 흐흐 웃었다.
대찬은 술맛이 떨어져서 잔을 내려놓고 담배를 비벼 껐다.
스탠리는 멋쩍게 광대를 긁으며 말했다.
“왜요, 부정 탔습니까?”
“총성이 족히 스무 번은 들렸는데. 한 명은 죽었겠죠, 방금.”
“스무 명이 죽었을지도 모르죠.”
“…예?”
“아이티 사람들은 총을 잘 쏘거든요. 하도 많이 쏴 대서.”
너무도 덤덤한 스탠리의 말에 대찬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태어날 때부터 총소리를 듣고 태어났는데, 나이 50이 넘은 지금도 변한 게 없네요. 이런 건 좀 변해도 좋은데.”
“식량난이 한 몫 하겠죠.”
스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긴 하지만 총을 쏘고 싶어서 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서슴없이 나쁜 짓을 해서라도 살고 싶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대찬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매년 300만 달러어치의 곡물을 지원하겠다는 결정으로 마음의 짐을 온전히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사방에서 울리는 총성이 대찬에게 다시 짐을 짊어지라고 강요했다.
그렇다고 결정을 돌릴 순 없었다.
대찬은 아이티 국민이 아니라, 정덕춘 이사의 말마따나 로튼 프룻츠의 주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선의로 감당하지 못할 수고를 그들에게 베풀 수 없었다.
대찬이 입을 다물자, 스탠리는 쓸쓸하게 웃었다.
“조 대표님의 오늘 결정은 정말 대단하다는 거,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거는 기대가 워낙 컸거든요. 그래서 간사하게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겁니다.”
“저의 300만 달러의 지원이 계륵처럼 느껴지겠군요.”
“계륵이요?”
“닭의 갈빗살이요. 먹을 건 별로 없는데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는.”
스탠리는 호탕하게 웃었다.
“재밌는 비유군요. 역시 한국 사람들은 재치가 있습니다.”
“아, 이건 중국 사람이 비유한 거긴 합니다만.”
“아…….”
“뭐, 그냥 동양 사람이 재치 있다고 해두죠.”
스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깐 곰곰이 고민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나바사(Navassa) 섬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나바사 섬이요?”
“예, 우리나라 서쪽에 떨어져있는 무인도입니다.”
대찬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별로 와 닿는 비유는 아닌데요.”
“나바사 섬이 어떤 섬인 줄 아시면 와 닿을 걸요?”
“어떤 섬인데요.”
“사실 별 가치는 없는 섬인데, 이게 지금 미국과 영토분쟁이 있어서요.”
“영토분쟁이요?”
스탠리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쉬고 말했다.
“우리가 먼저 영유권을 주장했는데, 미국이 대뜸 구아노(Guano) 법을 들이대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지 않습니까.”
“구아노 법은 또 뭡니까. 구아노가 그거 아닙니까? 새나 박쥐 배설물이 변해서 만들어진. 자원으로 쓰이던.”
“맞아요, 그거. 미국 구아노 법은 내용이 이렇거든요. 구아노가 매장된 섬에 미국인이 진출하면 그 섬의 영유권은 미국에 있다.”
“아주 제멋대로군요. 저희도 그런 비슷한 섬이 있어서 무슨 느낌인지 아주 잘 알겠습니다.”
스탠리는 입맛을 쩝 다시고 말했다.
“그런데 그 섬은 지금 미국이 실효지배 중입니다. 사실 큰 가치가 없거든요. 그런 섬 때문에 중요한 대외원조국인 미국하고 대립각을 세워서 좋을 게 없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무작정 너 가져라,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이해합니다.”
“예, 맞습니다. 자존심 문제죠.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주장은 합니다만, 말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대찬은 스탠리의 말을 곰곰이 곱씹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오래 있어야겠습니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일단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술 더 안 드세요?”
“아, 그리고 스탠리 씨 댁에서 며칠 더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
“술 깨고 내일 말씀 나누시죠.”
당황한 스탠리를 뒤로하고 대찬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대찬은 아이티의 국립도서관으로 가서 나바사 섬에 대한 자료를 모두 끌어모았다.
끼니를 조악한 햄버거와 콜라로 때우고, 대찬은 아침부터 밤까지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그리고는 아이티의 외무장관과 만나 얘기를 나눴다.
“나바사 섬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귀빈급 대우를 받는 대찬을 위해, 외무장관은 외무부의 모든 공무원을 동원해 대찬의 질문에 성의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사흘 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공항에 한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준비된 차량에 탑승해 아이티 대통령의 사저로 향했다.
그즈음 대찬도 대통령의 사저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가 도착하자, 대찬과 대통령은 일어나 맞이했다.
“초, 오랜만이네.”
“오랜만이야, 유진.”
미국 하원의원이자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의 복심으로 불리는 유진 깁슨이었다.
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아이티 대통령과도 악수를 나눴다.
그는 대찬의 연락을 받고 모든 일정을 취소한 뒤, 아이티로 향했다.
이렇게 셋이 둘러앉은 자리를 마련한 건 대찬이었다.
대담한 편이라고 자부하는 대찬은 저도 모르게 긴장의 침을 꿀꺽 삼켰다.
대찬은 이 셋 외에는 그 누구도 동석하지 못하도록 했다.
스탠리도, 마강국도 문 바깥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삼자대면에서 대찬이 가장 먼저 운을 뗐다.
“지금부터 드리는 얘기는 다소 허황될 수 있습니다.”
“…….”
대통령은 숨죽인 채 대찬의 입술에 집중했다.
대찬은 유진 깁슨을 흘끗 건너다보곤 아이티 대통령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제가 이 생각을 말했을 때, 깁슨 하원의원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즉, 일을 꾸미기에 따라서 성사될 수 있는 얘기란 뜻입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이 얘기는 떳떳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저희 로튼 프룻츠에, 아이티 국민에게, 그리고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과 깁슨 하원의원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말씀하시죠.”
이미 대찬에게 전말을 접한 유진 깁슨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얘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대통령 각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이티 국민의 결핍된 단백질을 제공 받는 대가로 나바사 섬의 주권을 할양할 의사가 있으십니까?”
“…뭐라고요?”
“세세한 사정은 따지지 않고 질문에만 대답해주십시오.”
나바사 섬은 이미 미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섬은 아이티에 있어 그다지 전략적, 물질적 가치가 없다.
비도축육 설비를 제공받고, 아이티 국민의 식량난을 크게 해소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의사가 있습니다.”
대찬은 유진 깁슨을 바라보며 물었다.
“유진, 햇치 상원의원이 부통령이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다면. 차후 의회를 움직여 미국 내 비도축육이 유통되도록 조치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티가 나서도 안 되고, 표를 잃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건 정치력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하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