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98화
아이티에서 온 손님은 아이티 상공부 소속의 관료였다.
명색이 관료였지만, 그는 수행원도 없었고 차림도 소박했다.
대찬은 웃으며 그를 친절하게 맞이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맞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안 만나주시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아, 영어로 말해도…….”
“괜찮습니다. 알아듣습니다.”
아이티에서 온 손님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티 상공부 소속의 스탠리라고 합니다.”
“조대찬입니다. 반갑습니다.”
대찬이 자리를 권하자 스탠리는 웃으며 착석했다.
그는 다짜고짜 자기네 어려운 사정부터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 대표님, 우리 아이티는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나라의 기능 자체가 사실상 마비되어 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은 저도 언론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서 보시면 더 참담하다는 걸 아실 겁니다.”
“아, 예…….”
“혹시 진흙쿠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진흙… 쿠키요?”
스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흙을 체에 거른 다음, 물과 소금과 마가린과 밀가루 약간을 넣어 햇빛에 말립니다.”
“그게 진흙쿠키입니까?”
스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걸 먹습니다.”
“아…….”
“터놓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상공부 소속이지만 대표님께 거래를 제안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스탠리는 말을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대찬에게도 그편이 차라리 나았다.
“부탁이요?”
“예, 귀사에서 생산하는 소위 비도축육은 설비만 갖춰지면 적은 비용으로 많은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수단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도축육 설비를 좀 지원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스탠리는 아무 주저하는 기색 없이 대찬에게 당당히 부탁했다.
그는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대찬은 오히려 그의 당당한 모습을 통해 스탠리가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찬을 만나기 전, 오죽 연습하고 또 연습했으면 저렇게 빠른 박자에 정제된 말투로 부탁을 할까.
대찬은 연민을 느꼈지만 덜컥 승낙하지 못했다.
현실적인 장벽들이 첩첩이 서있었다.
단순히 설비에 들어가는 비용과 물자도 문제였다.
그러나 그걸 차치하고도 고려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스탠리가 솔직하게 부탁했으니 대찬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즉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완곡한 거절인가요?”
“승낙보다는 거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확정은 아닙니다. 따져볼 만큼 따져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대찬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스탠리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아이티 정부에서는 로튼 프룻츠의 지원을 얻으면 식량난을 꽤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단순한 밀가루, 옥수수 따위가 아니라 동물성 단백질이다.
아이티 정부로서는 로튼 프룻츠의 호의를 간절히 바랐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로튼 프룻츠 측에 막대한 대금을 지불할 여력도 없고요.”
“예상하고 있습니다.”
“대신 명예영사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명예영사요?”
대찬은 난감하게 웃었다.
대찬의 솔직한 대답은 이랬다.
필요 없는데요.
외교관계를 맺은 상대국에 대사를 파견한다.
대사를 파견할 정도로 필요가 크지 않거나, 파견할 능력이 없는 나라들이 있다.
그럴 때는 대개 상대국 국민을 명예영사로 삼아 외교업무를 전담하게 한다.
그러니까, 아이티 외교부에서 대찬을 자국의 외교업무를 처리할 외교관으로 지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한 특권을 가지는 자리였다. 멋있기도 하고.
예컨대 아이티에 가려는 한국 국민은 대찬에게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또 그다지 대단한 권한은 아니었다.
‘1년에 아이티로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게다가 영사업무를 처리하려면 또 별도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대개 명예영사는 해당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거나, 좀 독특하고 그럴듯한 신분을 갖고 싶은, 돈 많은 사람들이 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대찬은 그다지 아이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지도, 독특하고 그럴듯한 신분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명예영사의 업무까지 떠안으라는 건 대찬에게 오히려 고역이었다.
그런 계륵 같은 자리를 던져주고선 스탠리는 대찬을 향해 눈을 빛냈다.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대찬은 떨떠름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스탠리는 머쓱하게 웃으며 재차 물었다.
“…안 되겠습니까?”
“고민해보겠습니다.”
“조 대표님의 결정과는 별도로 한국 주재 아이티 명예영사가 돼주십시오.”
“이걸 받으면 제가 거절하기 힘들어지는데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비도축육 설비를 지원 못 해주시겠다면 이 제안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사실 명예영사는 저희한테도 필요한 거라서요…….”
대찬은 대책 없이 솔직한 스탠리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죠. 저도 결정과는 별도로 상당한 양의 비도축육을 아이티로 보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조 대표님.”
“모쪼록 스탠리의 나라가 얼른 이 어려움을 극복하길 바랍니다.”
“덕분에 제 체면도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대찬은 스탠리와 악수를 나누고 그를 돌려보냈다.
함께 배석했던 진위생이 멋쩍게 웃으며 대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모르겠네요.”
그게 대찬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대찬은 우선 아이티의 명예영사직을 수락했다.
아이티 정부에서 그래도 대찬을 귀하게 생각해 모처럼 제안한 일이었다.
업무가 좀 늘어난다고 해도 선뜻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리고 대찬은 즉시 아이티로 컨테이너 5대 분량의 비도축육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건 어떤 목적도 없는, 그야말로 인도적인 지원이었다.
컨테이너 5대를 아이티로 실어 보내고, 대찬은 임원진을 소집해 이 일을 의논했다.
해외영업본부장인 정덕춘 이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손해입니다.”
“최근 들은 말 중에 가장 인정머리 없는 말이네요.”
대찬의 웃음 섞인 은근한 말에도 정덕춘 이사의 꼿꼿한 표정을 변하지 않았다.
“대표님은 회사의 소유주가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회사는 주주들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정덕춘 이사의 말은 덜 것도 더할 것도 없었다.
“그렇죠.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의 넘치는 동정심 때문에 회사의 재원을 소모할 순 없습니다.”
“정 이사님이 맞는 말씀만 하셔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정덕춘 이사의 맞은편에 앉은 국내영업본부장 남인수 이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래도 대표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 회사의 가장 큰 브랜드 아닙니까. 대표님이 어려움에 처한 이역만리 타국에 도움의 손길을 뻗으면 회사의 이미지도 좋아질 겁니다.”
정덕춘 이사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들어가는 돈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일 겁니다.”
“그래도…….”
“해외영업본부장은 접니다. 아이티를 지원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손실은 제 소관입니다.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남인수 이사는 입술을 삐죽이며 조용하게 불평했다.
“원 고집하고는…….”
남인수 이사는 정덕춘 이사의 권위에 감히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제압당한 다른 임원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이, 한태윤 전무가 말했다.
“그럼 회삿돈으로만 안 하면 되잖습니까?”
“음?”
대찬을 비롯한 임원진의 시선이 한태윤 전무에게로 향했다.
한태윤 전무는 짓궂게 웃으며 대찬을 바라봤다.
“대표님 돈으로 하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합니다.”
“허…!”
대찬은 어이가 없어서 희번득 뜬 눈으로 한태윤 전무를 바라봤다.
그는 애써 대찬의 시선을 회피하며 꿋꿋이 말을 이었다.
“돈도 많으시잖아요.”
“한 전무님, 제 상황 뻔히 아시면서 그런 속 편한 말씀을 하시다니.”
“그저,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겁니다.”
임원들은 한태윤 전무의 말에 큭큭, 짓궂은 웃음으로 은근히 찬성을 표했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그럴 여유는 없어요.”
정덕춘 이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찬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미지 개선은 하고 싶은데 사재를 털긴 싫으시고, 회삿돈으로 공짜 생색을 내시겠다는 겁니까?”
“회사 대표한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다들 진짜.”
정덕춘 이사는 손톱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아주 회사 꼴 잘 돌아갑니다, 잘 돌아가요!”
얼굴이 벌게진 대찬에게 정덕춘 이사가 다시 짓궂게 말했다.
“계급장 떼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게 우리 회사의 가장 훌륭한 문화 아니던가요?”
“몰라요.”
“그런 무책임한 말씀이 어디 있어요.”
대찬은 말없이 정덕춘 이사에게 한 번, 한태윤 전무에게 한 번 눈을 흘기고 자리를 떴다.
남인수 이사는 문을 열고 나가는 대찬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우시겠네, 우시겠어.”
“나 아직 안 나갔어요!”
대찬은 휙 고개를 돌려 일갈하고 쾅, 일부러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괜히 마지막으로 대찬의 성질을 건드렸던 국내영업본부장 남인수 이사는 어깨를 움츠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저, 대표님한테 찍힌 걸까요?”
“음, 아마도요.”
임원들은 남인수 이사가 듣고 싶은 말을 일부러 해주지 않았다.
회삿돈을 출연하는 건 해외영업본부장 정덕춘 이사가 극구 반대.
그렇다고 사재 출연은 영 내키지 않고.
대찬이 결정을 보류하던 사이, 아이티 대통령의 이름으로 대찬에게 친서가 전달되었다.
다른 일들에 우선순위가 밀려 슬슬 까먹어가던 것이 그 대통령의 친서로 다시 대찬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망할.”
대찬은 진위생이 전달해준 친서를 받고 손으로 이마를 탁 짚었다.
명색이 대통령의 친서.
반송할 순 없으니 일단 읽기는 해야만 했다.
친애하는 조대찬 대표께.
안녕하십니까, 아이티 공화국의 대통령입니다.
“하필 또 한국어로 써놨어. 쓸데없이 친절하게.”
친서가 아주 성의 없는 내용으로 가득차길 바랐던 대찬은 한국어로 쓰인 친서가 싫었다.
친서는 컨테이너 다섯 대 분량의 비도축육을 무상으로 증여한 대찬을 향한 용비어천가였다.
일국의 대통령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친서는 굴욕적으로 보일 만큼 공손했다.
실컷 대찬의 선행을 찬양하던 친서는 말미에 이르러 용건을 말했다.
조대찬 대표를 아이티 공화국에 초대합니다.
꼭 직접 뵙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언제든 날짜만 정하시면 대통령궁으로 조대찬 대표를 모시겠습니다.
“허, 이 아저씨가…….”
말은 공손했지만 대통령의 용건은 분명했다.
아이티로 자신을 불러들여서는 비도축육 설비를 제공해달라고 생떼를 쓸 게 뻔했다.
대찬은 거절했다간 관자놀이에 AK 소총이 겨눠지는 건 아닌가 하는 과격한 상상까지 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퇴짜를 놓자니, 그건 그것대로 마음이 불편했다.
대찬은 저만치 밀어놓은 친서를 흘끔 보다가, 마음을 굳혔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대찬은 평생 올 일 없을 것 같던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행한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마강국.
이런 덩치라도 등 뒤에 거느리고 있어야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것으로 마강국의 소임은 끝이었다.
일부러 이런저런 직원들을 대동하지 않았다.
로튼 프룻츠의 직원들이 한가로이 해외 출장을 갈 여유도 없거니와, 수행원을 대거 거느렸다가 괜히 아이티 정부의 기대감을 부채질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마강국은 대찬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참, 우리 조 대표님 덕분에 별 나라를 다 가보네. 한국사람 중에 사우디랑 아이티 둘 다 가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마 두 명.”
대찬과 마강국은 서로를 보며 싱겁게 웃고는 한 손에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소리의 팡파레가 울렸다.
빰빠라밤빰빰 밤빠밤—
여러 명의 나팔수가 대찬을 보자마자 웅장하게 연주했다.
대찬과 마강국은 어깨를 움츠리며 흠칫 놀랐다.
한국에서 봤던 스탠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이티 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스탠리의 환영 인사는 어눌한 한국어였다.
저걸 외우느라 또 얼마나 고생했을까.
대찬은 겸연쩍게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