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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97화 (497/556)

난 할 수 있어 497화

대찬은 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기타 매출까지 포함하여, 말씀드렸듯 저희 로튼 프룻츠는 총 4,231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였고 영업이익은 1,333억 원, 영업이익률은 31.5%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여타 제조업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입니다. 저희 로튼 프룻츠는 앞으로도 더 높은 매출과 영업이익으로써 주주의 이익을 크게 제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로튼 프룻츠의 3분기 실적발표는 그야말로 어닝서프라이즈(earnings surprise·시장의 예상치를 뛰어넘는 실적)였다.

주식 투자자들은 PER을 기초적인 지표로 활용한다.

PER(price earning ratio·주가수익비율)은 주가를 이익으로 나눈 것을 의미한다.

덮어놓고 PER만 따지고 돈을 밀어 넣는 사람도 있다.

거칠게 계산하면 로튼 프룻츠의 분기 영업이익인 약 1,300억 원에 4를 곱해 연간 이익을 계산하면 5,200억 원이 된다.

로튼 프룻츠의 시가총액은 약 2조 원.

로튼 프룻츠의 영업이익이 이대로 같은 수준을 유지한다고 하면 로튼 프룻츠의 PER은 대충 2조 나누기 5,200억, 즉 4 미만이 되는 것이었다.

PER 4는 투자자들 사이에서 미친 수준으로 저평가된 종목을 의미했다.

즉, 성장 가능성이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뜻.

로튼 프룻츠는 가파르게 성장했음에도 아직 더 오를 여지가 한참, 아주 한참 남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전제는 3분기의 영업이익이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 한 번의 깜짝 발표로 끝난다면 그저 거품일 뿐이었다.

그러나 두바이를 필두로 세계 각국이 번호표를 뽑고 비도축육을 들여오려고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깜짝 발표는 이번뿐일 것.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두 부류 중 하나일 것이다.

지나치게 겁이 많거나.

아니면 로튼 프룻츠에 대한 혐오감으로 현실감각이 떨어졌거나.

회사 덩치가 자꾸 커지니 단위를 잘게 쪼갤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대찬은 RF시스템을 자회사로 거느렸듯, 와인과 커피를 맡은 ‘낮한잔, 밤한잔’ 브랜드를 ‘RF베버리지’라는 이름의 자회사로 재편하였다.

오윤 전무가 그대로 RF베버리지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이제 자회사를 두 곳이나 거느리게 되었으니 회장 명패를 써도 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제안이 있었다.

대찬은 시기상조라며 거절했다.

회장님, 그 호칭은 노회한 영감에게 적당하게 들렸다.

겉모습은 웬만하면 동안 소리를 듣는 30대 후반이었지만,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의 살아온 세월을 합치면 영감 소리를 듣기에 족했다.

그렇게 속으로 지레 찔린 대찬은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완곡하게 거부했다.

회장 호칭을 거부하긴 했지만 대찬이 받는 대우는 여느 재벌 회장 못지않았다.

특히 국내보다도 국제적인 지명도가 사우디 진출 이후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로 한국을 방문하는 각국의 외교사절은,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한 후 대찬과 개인적인 약속을 잡았다.

대개 비도축육의 도입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굳이 외교사절이 아니더라도 한국 주재 대사관을 통해 종종 문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대찬은 자신의 신분이 회사 사장인지 외교관인지 가끔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해외 정부 인사와 자주 접촉했다.

“유럽은 나라 별로 따로 오지 말고 EU로 퉁 쳐서 들어오라고 해요, 제발.”

그런 배부른 투정까지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찬이 아쉬운 나라가 딱 한 군데 있었다.

“미국 좀 어떻게 안 되나…….”

대찬은 호시탐탐 미국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태윤 전무는 웃으며 말했다.

“중국도 열려, 아랍도 열렸는데 명색이 혈맹이고 유일한 동맹국에 FTA까지 맺은 미국 빗장 열기가 이렇게 힘드네요.”

“그린블러드가 조금 분발해서 우리랑 경쟁이 될 만한 수준이라면 틈이 보이겠지만요.”

한태윤 전무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 훨씬 우수한 인재들을 데리고 왜 여태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걸까요.”

“자꾸 삽질을 해서 그래요.”

“삽질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우리가 조금 앞선 상태였습니다. 은오영 소장님, 다르샨 싱 전무. 사실 이 둘은 속되게 말하면 사기 캐릭터죠.”

“이견 없습니다. 두 분, 실력만큼은 확실하시죠.”

“그렇죠? 충성심은 좀 의심되긴 하지만.”

“예전에 상림의 오퍼에 흔들렸던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대표님, 생각보다 뒤끝이 심하시네요.”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에요. 당시 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백억 돈이 왔다 갔다 하는데 가슴이 뛰지 않을 도리가 없죠. 저 같아도 고민했을 겁니다.”

“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린블러드는 우리를 금방 따라잡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제아무리 좀 튀는 인재를 갖고 있다고 해도,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생각했겠죠.”

“네, 아무래도.”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거리가 안 좁혀지는 거죠. 단가만으로 승부가 안 됩니다. 꾸준히 생산단가를 낮추는 데만 주력했다면 그린블러드가 우릴 따라잡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거리가 잘 안 좁혀지니 마음이 급해졌겠죠. 왜냐, 계속 연구를 하려면 돈을 조달받아야 하는데 투자자들은 그렇게 인내심이 깊지 않거든요.”

“투자자들을 위해 뭔가 보여주기는 해야 하니 급했겠네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단가로 안 되니까 자꾸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죠. 코테츠키친도 그 일환이에요.”

“그, 실험실에서 와규를 배양하겠다는…….”

“맞아요. 당장 분쇄육 형태도 못 만들면서 세상에, 와규라니.”

“덕분에 우리 회사가 비도축육 시장을 선점하긴 했지만, 그린블러드에서 너무 못 쫓아오니 이것도 문제가 되는군요.”

“난 좀 걔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저 큰 미국시장이 닫힌 채로 그냥 있잖아요. 비도축육 시장에 한정해선 미국은 지금 북한급으로 폐쇄돼있어요.”

한태윤 전무는 대찬을 흘끗 보며 웃었다.

“그린블러드 애들이 그 말씀을 들으면 혈압 올라 뒷목을 잡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잭 머피, 그 삼중턱 영감 고혈압으로 확 가버리게.”

“…대표님, 시총 2조 기업의 수장이 되셨으니 이제 말씀을 좀 점잖게…….”

“서청수 회장님은 쌍욕을 그렇게 잘하시던데요?”

대찬의 말에 한태윤 전무는 난처하게 웃으며 화제를 원래대로 돌려놨다.

“대표님께서 미국 쪽에 굵직한 채널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좀 가동하시면…….”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 말씀이세요?”

대찬의 대학 미네소타 유학 시절 맺은 인연.

미네소타 주지사를 역임하고 6년 임기의 상원의원을 여러 번 지내고 있으니 굵직하기야 굵직했다.

한태윤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햇치 주지사 선거캠프에서 같이 일했던 유진 깁슨도 하원의원이 됐잖습니까.”

“상원에 하나, 하원에 하나. 남부럽지 않은 인맥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먹통이에요.”

“그렇다면, 돈을 좀 세탁해서 로비자금으로 찔러줘도 어려울까요?”

한태윤 전무의 말에 대찬은 살짝 경악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하하…….”

“청렴결백하고 꼿꼿하기가 대쪽같으신 한 전무님 입에서 돈세탁까지 나오네요.”

“답답해하시니 그냥 드려본 말씀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하겠습니다만… 로비 몇 푼으로 따내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돈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줘야 한다는 뜻인가요?”

“네, 당장 우리가 비도축육 법제화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나마 수월하게 장벽을 넘은 편인데도 우여곡절 참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그런 과정을 감당하게 하려면 돈 몇 푼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뜻이군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 손에는 돈 말고 더 줄 게 없네요. 그리고 그 사람들, 지금 저랑 한가롭게 짬짜미 벌이기에는 훨씬 더 큰 판에 들어가 있어서요.”

“훨씬 더 큰 판이라뇨?”

“내년이면 벌써 미국 대선이에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군요.”

“네, 듣자 하니 햇치 상원의원이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나서고 싶어 한다네요.”

“이왕 꿈을 꿀 거면 대통령을 하시지.”

“본인 한계를 잘 알고 있는 거죠. 주지사, 상원의원 거치면서 정치력은 확보가 됐는데, 대통령을 하려면 정치력만으로는 어림도 없거든요.”

“하긴, 오바마나 트럼프를 보면 확실히 이런저런 정치인을 넘어서는 플러스알파가 있기는 하지요.”

한태윤 전무의 답변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부통령은 해볼 만하다는 계산인 거죠. 지금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 면면을 보면 다소 급진적이거든요. 에너지가 넘치지만 위태롭기도 해요.”

“햇치 상원의원은 그 위태로운 대통령 후보를 잘 붙들어줄 훌륭한 부통령 후보다. 그런 건가요?”

“네, 햇치 상원의원을 오래 보좌했던 유진 깁슨 하원의원도 주군을 부통령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양입니다.”

“모쪼록 잘됐으면 좋겠네요. 미국 부통령과 돈독한 사이라면 어떻게든 우리도 반사이익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대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햇치 상원의원은 약점이 있어요.”

“약점이라면…….”

“이민자에게 관대해요. 제 유학 시절, 주지사에 당선됐을 때는 그 점이 오히려 승리를 가져다준 일등 공신이었는데.”

“지금은 약점이 될 수 있겠군요. 부통령 후보로서 안정적인 밑바탕이 돼야 하는데 되레 그걸로 공격당할 소지가 있으니까요.”

“네, 주지사 시절에도, 상원의원 시절에도 햇치 상원의원은 항상 이민자에게 관대했습니다.”

“파괴력이 없는 대신 결점도 없어야 하는 입장에서, 이민자에게 관대하다는 건 큰 약점이 되겠네요.”

“네, 자칫 국민의 이익보다 외국인의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읽힐 소지가 다분하니까.”

“그건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맞습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공화당에 비해 열세가 되는 이슈죠, 애국심.”

“어떻게 헤쳐 나갈지, 먼발치에서 지켜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대찬과 한태윤 전무가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을 갖고 환담을 나누던 와중.

진위생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외국 손님들이 끊이질 않네요.”

“자, 이번에는 어느 대륙에서 오신 손님인가요? 아시아? 유럽? 남미?”

진위생은 씩 웃었다.

“맞혀보시겠습니까.”

“아뇨, 빨리 말해요.”

대찬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자 진위생은 김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북아메리카예요.”

그 말에 대찬과 한태윤 전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설마 미국?”

둘이 동시에 묻자 진위생은 흐흐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어딘데요.”

대찬은 처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미국이 아니라면 캐나다든 멕시코든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런데 진위생의 대답은 캐나다도, 멕시코도 아니었다.

“아이티요.”

“아이티…?”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

대찬은 저도 모르게 힘이 빠졌다.

아이티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다소 떨어진 섬나라였다.

제법 큰 섬 하나를 도미니카 공화국과 동과 서로 나누어 가진 나라였다.

그런 아이티의 별명은 ‘파탄 국가’였다.

북한보다도, 아프가니스탄보다도 더 실패한 나라가 바로 아이티였다.

과거, 한 줌 되지 않는 원주민은 모두 말살되고 프랑스는 그곳을 흑인 노예들을 이주시켜 개척했다.

오랜 식민지 시절을 거쳐, 노예들은 혁명을 일으켜 아메리카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건설했다.

그게 아이티였다.

그런데 ‘옛 주인’이었던 프랑스는 그런 아이티에게 식민지 보상금을 요구했다.

아이티가 프랑스에 요구한 게 아니라, 프랑스가 아이티에 요구했다.

프랑스 덕분에 근대화를 이뤘으니 그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

저항할 힘이 없던 아이티는 150년에 걸쳐 보상금을 지불했다.

그것으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사라졌다.

한때 가장 번성했던 식민지는 가장 가난한 공화국으로 변했다.

그렇게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공화국은 2010년, 전 국토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다시 일어날 밑천마저 모조리 상실해버렸다.

GDP의 60퍼센트가 증발하고, 혼자서는 도저히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라는 파탄 났다.

국제사회의 도움이 있었지만 별로 빼먹을 것도 없는 나라라 지원은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이뤄졌다.

그리고 그 상태로 2019년 현재를 살고 있었다.

대찬은 그런 나라에 인간적인 연민은 느꼈지만, 자본주의적인 욕구는 느끼지 않았다.

대찬이 저도 모르게 내쉰 한숨은 인간적이지 않고 자본주의적이었다.

아이티에서 온 손님이 보면 지금 차별하느냐고 항의할 법도 했다.

그러나 차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찬은 정부 관료도, 자선사업가도 아니었다.

그가 대찬을 찾아온 까닭은 아무래도 비도축육 때문일 것이다.

비도축육을 사고 싶어서 왔을 것이고, 대찬은 그들에게 비도축육을 팔면 그만.

비즈니스 관계에서 액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아이티에서 온 손님이 섭섭할 순 있어도 논리적으로 항의할 순 없었다.

그러나 멀리서 온 손님을 보지도 않고 내쫓을 정도로 대찬이 박정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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