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96화
게다가 길고 긴 이혼소송을 벌일 정도의 여력이 없었다.
이미 홍승연 역시 여러 가지 혐의로 검찰을 문턱이 닳도록 오가는 상황.
전황은 서원웅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적어도 그가 시시콜콜하게 이혼소송에 관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때문에 서원웅은 이혼을 전격적으로 선언한 것과 동시에, 홍승연의 존재를 뇌리에서 삭제시켰다.
그래도 같이 산 세월이 얼마인데 간단히 잊히겠나.
그러나 그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애증이 교차해야 미운 정도 미운 정이지, 사랑이 없는 미운 정은 정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이 없다고 충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다못해 앓던 이가 빠져도 혓바닥으로 빈자리가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제법 경영인의 태가 나기 시작한 서원웅이었지만, 여전히 유약한 성정은 완전히 씻지 못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정도는 되어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그대로 필래그룹 경영에 반영되었다.
서청수 회장이 스스로 뒷방 늙은이를 자처하며 2선으로 후퇴한 상황.
서청수 회장의 손발이었던 김태준·왕윤수·장백주 3인방이 최선을 다해 보조한다지만 그들은 끝내주는 손발이었을 뿐 머리를 대체하진 못했다.
필래그룹은 문어발식 경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사업영역을 끝없이 확장해왔다.
자연히 거느린 계열사가 무수히 많았다.
가지 많은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넓게 드리우지만 역시 바람 잘 날도 없는 것이었다.
대찬 역시 필래의 소식은 꼼꼼히 챙겼다.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원웅에 대한 사적인 친분도 친분이지만, 필래는 로튼 프룻츠의 중요한 사업파트너였다.
진위생이 대찬에게 보고했다.
“속속들이 터지는 이슈를 서원웅 실장이 다 소화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서원웅과 홍승연의 이혼 건이 터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까다로운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었다.
“잘 헤쳐나가야 할 텐데. 일단 우리도 예의주시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필래 비바체와 필래푸드 쪽을 더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진위생을 흘끗 바라봤다.
“진위생 씨.”
“네, 대표님.”
“진위생 씨도 어느덧 까다로운 업무도 무난히 소화하는 사람이 되었네요. 제 입속의 혀처럼 편안합니다.”
“부족한데 더 잘하라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대찬은 진위생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대찬이 실질적으로 키를 쥔 극동일보는 그의 의지대로 항해했다.
본인이 굳이 세세하게 이르지 않아도 되었다.
언론 방면이야 전길재 국장이 대찬보다 ‘정상화’에 있어 훨씬 강경한 인물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찬이 유심히 살피는 분야는 언론보다는 방송이었다.
극동TV는 종합편성채널이라는 이름값을 못했다.
이름 그대로 각 분야의 방송들이 종합적으로 편성되어야 했다.
그런데 극동TV의 편성은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 시간 대에 유치한 수준으로 만든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아침부터 밤까지는 했던 뉴스를 재탕은 기본이요 삼탕에 사탕까지 우려먹었다.
정치평론가라는 인간들을 좌우에 한 명씩 앉혀놓고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늘어놓으면 고정적으로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돈은 얼마 안 들면서도 시청률은 잡는 소위 가성비 좋은 전략인 것이었다.
대찬은 이를 의욕적으로 시정해주기를 원했다.
그가 이런 포부를 윤이영에게 밝히자, 윤이영은 피식 웃었다.
“홍씨 내보내고 좀 살만해지나 싶더니, 오빠도 만만찮은 악덕 사장님인데?”
“뭐? 내가 왜.”
“쥐어짜기만 하잖아. 저 사람들이 바보라서 24시간 뉴스만 틀겠어? 돈이 없으니까 그렇지.”
“적어도 경영진에서 걸핏하면 돈타령하는 풍조는 없어졌잖아.”
“왜 이래, 회사 하루이틀 다닌 것도 아니면서. 은근히 눈치 주고 그런 문화가 오빠 말 한마디에 일소될 거 같아?”
대찬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아니지만.”
“결국 돈 폭탄 뿌려줄 거 아니면 이래 쥐어 짜이나 저래 쥐어 짜이나 매한가지란 말이지.”
“나도 이번에 무리해서 더 뿌려줄 돈 폭탄은 없는데.”
“그럼 오빠는 그냥 가만히 있어, 가만히.”
“그러기는 또 싫고.”
대찬은 음흉한 눈빛으로 윤이영을 바라봤다.
윤이영은 본능적으로 불길한 느낌을 감지했다.
“뭐야, 그 눈.”
“돈을 기부할 수 없으면 재능이라도 기부해야지.”
“네 재능 기부해라. 내 재능 기부할 생각 말고?”
대찬은 간절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난 기부할 재능도 없는걸.”
“재능이 왜 없어?”
“내가 무슨 재능이 있는데. 그런 거 없어.”
“아, 재능이 없어서 재산 1조를 눈앞에 두고 계세요?”
“그건 돈 버는 재능이잖아. 돈 버는 재능을 공짜로 기부하라는 건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아?”
“얼씨구.”
“그거 빼면 난 아무 재능도 없는데… 윤이영 씨는 아니거든.”
윤이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어디 한번 말이나 해보라는 뜻.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극동TV 드라마에 주연으로 나가는 게 어때. 노 개런티로.”
“노 개런티? 이 인간이 진짜. 10부작만 찍어도 돈이 얼만데.”
“그러니까 재능기부지.”
“안 해.”
“진짜 안 할 거야?”
대찬은 불쌍한 표정으로 윤이영을 바라봤다.
“안 해.”
“제발…….”
대찬이 어울리지도 않게 윤이영의 팔을 붙들고 매달리자, 윤이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웃으면 지는 거였다.
극동TV는 KDN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사명을 변경하고 가장 먼저 윤이영을 내세운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작품을 고를 것인지 대찬이 슬쩍 훈수를 두었다.
윤이영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카이팰리스? 제목은 좀 그런데. 소재도 좀…….”
“믿어봐. 괜찮을 거야.”
윤이영은 여러 번 입맛을 다시며 대본을 넘기다가 탁, 덮었다.
“그래, 지금까지 오빠가 추천해준 건 다 적중했으니까. 더 볼 것도 없어.”
“오케이, 좋았어.”
“이거 다음에도 신기 발휘해서 딱 점지해줄 거지?”
윤이영의 말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신기는 이번 걸로 끝이야.”
“왜? 안 돼.”
“어쩔 수 없어.”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니까.”
대찬은 난처했다.
2019년도 절반 이상이 흘러간 상황.
대찬의 두 번째 삶은 첫 번째의 끄트머리를 지나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대찬의 기억에 없다.
그나마 이 스카이팰리스라는 드라마를 낚아챈 것도 요행이었다.
제때 주인을 만나지 못해 조금 때가 늦어진 덕분이었으니.
마지막 행운이 이젠 더 이상 남몰래 우월감을 즐길 수 있는 대찬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윤이영은 대체 이유가 뭐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나 대찬은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진실을 얘기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그 진실이란 게 인생의 반려자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허무맹랑한데.
윤이영은 스카이팰리스의 출연을 결정하고 대찬의 등짝을 여러 번 때리는 것으로 개런티를 대신했다.
대찬은 그와 동시에 재단 하나를 만들었다.
이름이 거창하게 재단이긴 했지만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다.
그저 개인보다는 단체 자격으로 극동일보 지분을 보유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개인 자격보다는 단체의 이름을 내세우는 편이 부담이 덜한 까닭이었다.
이름도 그다지 성의 있게 짓지는 않았다.
재단법인 조윤.
대찬과 윤이영의 성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이름이었다.
대찬은 조윤재단에 자신이 소유한 극동일보 지분 전부를 귀속시키고 이사장 자리에 앉았다.
이를 통해 개인 자격으로 거대언론을 통제할 의사가 없으며, 미디어 산업 발전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밝혔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 거대언론을 통제할 의사는 있었다.
* * *
“대표님, 준비 다 끝났습니다.”
진위생의 말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로튼 프룻츠의 주요 임원들이 참석해있었다.
총괄기획실장 한태윤 전무를 비롯해 해외영업본부장 정덕춘 이사, 국내영업본부장 남인수 이사 등.
대찬은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비워져 있는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앞에는 제법 두꺼운 문서 뭉치가 놓여 있었다. 대찬의 앞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카이프를 통해 로튼 프룻츠의 주요 투자자들이 연결돼있었다.
대찬은 준비한 스크립트를 읽어 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로튼 프룻츠 대표이사 조대찬입니다. 먼저, 2019년 3분기 경영실적 컨퍼런스 콜(conference call·회사가 기관, 증권사 등 주요 투자자들에게 실적과 전망 등을 설명하기 위해 여는 전화회의)에 참석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찬의 목소리는 안정되어 있었다.
분기마다 열리는 실적발표가 이제 대찬의 몸에도 제법 익어 있었다.
컨퍼런스 콜에는 외국인 투자자도 다수 참여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대찬의 말이 끝나면 함께 배석한 통역사가 간결하게 영어로 통역해주었다.
-“제가 직접 2019년 3분기 실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도축육에 대한 중국 시장의 꾸준한 수요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생산단가의 꾸준한 하락으로 국내외 모두 수요가 역시 증가세에 있습니다. 따라서 3분기 매출 역시, 매 분기 그랬듯 기하급수적인 성장이 이뤄졌습니다.”
대찬은 냉수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3분기 매출은 전 분기 대비 44% 상승한 4,231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합리적 단가를 지향하는 분쇄육 형태의 1형 비도축육이 2,852억 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1형 비도축육의 매출신장은 중국 시장의 수요 증가에 따른 결과입니다. 최근 광둥성, 쓰촨성의 물류망이 확충된 영향입니다. 또한 새로 개척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의 교리상 혈액이 완전히 제거된 1형 비도축육만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시장이 개방되는 내년에는 1형 비도축육의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찬은 다 읽은 페이지를 저만치 치워두었다.
진위생이 그걸 얼른 수습해서 정리했다.
-“재래육의 지방과 혈액을 추가하여 맛을 가미한 2형 비도축육의 매출은 677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베이징, 상하이, 장쑤성, 저장성 등 소득이 높은 지역에서의 수요가 컸으며, 국내시장의 수요 역시 대부분 2형 비도축육에 몰려 있습니다. 저희 로튼 프룻츠는 지방과 혈액 역시 재래육의 힘을 빌리지 않고 배양하여 생산단가를 낮춰 매출신장에 주력하겠습니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며 기술담당인 다르샨 싱 전무를 흘끗 바라봤다.
다르샨 싱 전무는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쇄육이 아니라 다양한 조리 방법에 이용될 수 있는 벌크 형태의 3형 비도축육의 생산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아직 재래육의 수준에 완벽히 다가가지 못해 매출은 52억 원에 머물렀습니다만, 기술이 완비되면 3형이 우리 회사의 주력이 될 것입니다. 해당 기술을 보유한 네덜란드와 이스라엘 기업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3형 비도축육의 폭발적인 성장 역시 도모하겠습니다.”
대찬은 이를 맡아줄 해외영업본부장인 정덕춘 이사를 바라봤다.
그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도츅육 사업부와는 별개로, 식음료 브랜드는 ‘낮한잔, 밤한잔’의 매출도 가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저희 회사의 브랜드 인지도와 신뢰도가 크게 향상함에 따라, 원두와 와인을 수입함에 있어 기존의 영세업체보다는 저희 회사를 선택하는 추세입니다. ‘낮한잔, 밤한잔’ 브랜드의 매출은 310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향후 파푸아뉴기니 현지의 농장을 추가적으로 확보하고 포도주 역시 프랑스, 칠레 업체와 신규계약을 체결할 예정입니다. ‘낮한잔, 밤한잔’ 브랜드 역시 저희 회사 매출의 큰 부분을 지속적으로 담당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대찬은 서울의 로튼 프룻츠 사무소에서 식음료사업부를 책임지고 있는 오윤 전무를 바라봤다.
오윤 전무 역시 다르샨 싱 전무, 정덕춘 이사와 마찬가지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회사인 RF시스템 역시 단순히 저희 로튼 프룻츠의 설비구축뿐만 아니라 외부업체의 발주를 꾸준히 유치하여 315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였습니다.”
대구에서 생산 설비를 담당하는 RF시스템의 민승기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