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95화
대찬은 만만치 않은 반대를 무릅쓰고 전길재를 기어코 편집국장 자리에 앉혔다.
논설주간, 주필, 대기자가 빠진 자리는 충원하지 않았다.
무소불위의 권위를 휘두르던 논설위원실을 폐지하고, 편집국 아래에 ‘자유기고실’을 만들었다.
몇 줄 글귀로 대중을 현혹하는 시대는 지났다.
대찬은 소위 글발 있는 기자들이 돌아가며 자유기고실에 소속되도록 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설을 실을 수 있게 조치했다.
그리고 극동일보 대신, 극동일보 소유의 종편 방송사인 극동TV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
더불어 상장으로 마련된 자금으로 홍구완 사장의 차녀인 홍승한 극동TV 상무가 보유하던 지분을 사들이도록 했다.
그러니까 그 지분은 극동일보의 자사주가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홍씨 일가가 지분 과반을 얻음으로써 권좌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이 더 멀어졌다.
그것으로 대찬의 개입은 끝이었다.
극동일보에 힘을 쏟기에는, 정덕춘 이사의 말마따나 로튼 프룻츠의 일만으로도 너무 바빴다.
극동일보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
대찬은 서원웅을 만났다.
며칠 사이 서원웅의 안색은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
대찬이 일으킨 일종의 나비효과. 그 영향이었다.
서원웅은 한동안 회사도 김태준 사장에게 맡겨놓고 휴가를 썼다고 했다.
공적인 영역이 사적인 영역에 방해받는 건 프로의 자세가 아니다.
그게 김태준 사장의 지론이었지만, 그도 이번만큼은 충분히 참작해주었다.
서원웅은 대찬에게 흥읍에서 만나자고 했다. 서울이 싫어졌다고 했다.
마침 윤이영이 지방 촬영차 집을 비운 상황.
대찬은 서원웅을 집으로 초대했다.
거창한 술도, 안주도 필요 없었다.
맥주 여러 캔에 가스 불에 구운 쥐포 몇 장.
그것들을 벌려놓고 대찬과 서원웅은 거실에 멋대로 늘어졌다.
오고가는 말소리에 힘이나 기운 따위는 없었다.
대찬은 맥주를 들이켜고 서원웅을 흘끗 건너다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냐.”
“난 홍승연 씨한테 미안한 감정은 없어. 너한테 있지.”
서원웅은 마른세수를 하며 지친 목소리로 응답했다.
“나한테 미안해할 거 없다. 결혼 잘못한 것도 내 죄지.”
“…….”
“그러게 정신 나간 아버지 등쳐먹을 생각을 왜 해, 하기는. 자업자득이지.”
“이제 더 이상 극동일보 건으로 고달플 일은 없을 거야. 나도 공식적으로 손 떼기로 했어.”
“너 돈도 장난 아니게 깨졌다며. 그런데 그걸 그냥 홀라당 원래 직원들한테 넘겨준다고?”
서원웅의 정신은 이제 오롯이 비즈니스적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대찬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거금을 쏟아 부어놓고서는.
본전도 안 뽑고 그대로 물러나겠다니.
대찬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방송국 잘 키워서 나중에 임직원조합에 팔 생각이야. 회사가 잘되면 웃돈 받고 팔 수 있겠지.”
“하긴, 너 나보다 돈 많지.”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파리가 커져봤자 새만큼 커지겠어?”
“필래 덩치가 크면 뭐해. 오너 지분 생각보다 적은 거 알잖아. 그리고 거느린 회사도 사람도 많아서 시시콜콜 나가는 돈도 많고.”
“그래도 필래한테 댈 게 아니지.”
“사실 조대찬이 진짜 알부자 맞잖아.”
“어디 가서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마.”
둘은 싱겁게 웃었다.
서원웅은 쓸쓸한 표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맥주 캔을 흔들다가 대찬에게 말했다.
“나, 이혼하려고.”
대찬은 살짝 놀란 눈으로 서원웅을 바라봤다.
뭐라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래, 잘했다.
그렇다고 이혼까지?
둘 다 내키지 않는 말이었다.
대찬은 말없이 맥주만 넘겼다.
서원웅과 홍승연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신체 건강한 남녀가 살 붙이고 몇 년을 살았는데. 그렇다고 살림살이가 팍팍하지도 않은데 아이 하나 없었으니.
애정의 증거가 전혀 없는 셈이었다.
나이 먹을 대로 먹고, 닳을 대로 닳아버린 사람 사이에 감정적인 위로는 없었다.
대신 현실적인 분석만 있었다.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고 서원웅에게 말했다.
“서 회장님은, 동의하셨어?”
“아버지 못 뵌 지 한참 됐어. 나 홀로서기 하라고, 일부러 연락을 끊으셨거든.”
“그래도 이건 집안일…….”
서원웅은 고개를 저었다.
“집안일이 아니지. 이것도 비즈니스의 일환일 뿐이었어. 설령 집안일이라도 그래. 이거야말로 정말 홀로서기 아니야? 문자 그대로의.”
서원웅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홍승연 씨도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거야. 극동에서 뺨 맞고 너한테 화풀이하려고 들겠지.”
“알아. 감수해야지.”
“이혼소송이 순탄하지 않을 텐데…….”
“이 여자랑 살면서 내 몸, 내 정신 망치는 것보다 소송전이 차라리 나아.”
대찬은 시선을 아래로 깔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서원웅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나, 좀 더 막나가도 되겠다.”
“…뭐?”
“전길재. 들개 같은 양반이 극동일보 편집국장 됐잖아.”
“뭐? 전길재?”
“응, 그래도 너를 생각해서 최소한의 선은 지켜주려고 했는데. 이젠 아니니까. 홍씨에게 예의를 지켜야 할 이유는 네가 전부였거든.”
“어떻게 할 셈이야.”
“내가 주도적으로 움직이진 않을 거야. 들개 목을 죄고 있던 목줄을 그냥 풀어주겠다는 거야.”
“목줄을 풀면, 그 들개가 홍씨의 목덜미를 깨물 거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서원웅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찬은 그를 흘끔 바라봤다.
“대신 며칠 유예기간은 둘게. 이혼 선언, 그 안에 하든 그 다음에 하든 네 선택이야.”
“내가 먼저 이혼하겠다는 말을 하고, 전길재가 홍씨를 공격하면.”
“조대찬, 서원웅이 손잡고 홍승연 목을 조른다고 하겠지.”
“전길재가 먼저, 내가 그 다음이면.”
“서원웅이 이때다 싶어 손절한다고 하겠지.”
“하…….”
“어느 쪽이든 욕을 아예 안 먹을 순 없어. 대신 홍씨는 감당할 수 없는 도덕적 치명상을 입겠지.”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건가.”
“이혼소송에서 크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할 거야.”
이혼소송에서 재산분할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서청수에서 서원웅으로 넘어가는 승계작업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상황.
만일 법원이 홍승연 쪽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판결을 내린다면.
이 중차대한 승계작업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것이다.
그러니 욕먹기 싫다고 홍씨를 물어뜯지 말라는 건 치기 어린 발상이었다.
들개 목줄을 풀어주기 전에 이혼을 선언하면, 무자비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들개가 먼저 물어뜯고 나서 이혼을 선언하면, 비열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무자비와 비열, 둘 중에 하나를 감당해야 한다면 당연히 전자였다.
서원웅은 필래그룹 홍보실을 통해 홍승연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탄으로 들개가 날뛰기 시작했다.
극동일보 1면에 전무후무한 기사가 실렸다.
-홍구완 前 본지 사장, 저택서 여성 50人과 ‘환락 파티’…현장 촬영 영상 일파만파
그 다음날.
-홍구완 前 사장, 검찰조사 피하려 대량으로 금품살포…핵심 측근 작심 폭로
그 다음날.
-‘후계자’ 홍승진 前 본지 국장, 비서 욕설·폭행·협박…녹음파일 공개
그 다음날.
-홍승연, 필래그룹 법인카드 용돈처럼 썼다
그 다음날.
-홍승진 前 본지 국장의 ‘10세’ 딸, 운전기사에 “개XX야, 너 잘리고 싶냐?” 폭언…‘뭘 보고 배웠나’ 충격
그 다음날.
-홍승연, ‘치매’ 홍구완 납치해 경영권 탈취 시도…‘그날’의 전모 밝혀졌다
그 다음날.
-밤의 대통령, 탄핵되다…檢·警, 홍씨 일가 범죄 의혹 일제 수사 돌입
-권불칠십년, 홍씨 일가의 완전히 몰락
전길재는 그야말로 미친개처럼 날뛰었다.
매일도 아니고,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홍씨 일가의 굵직한 비리를 쉬지 않고 때려댔다.
충격적인 민낯이 밤낮으로 쏟아지는 통에 웬만한 호사가들도 최신 기사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홍씨 일가는 털어서 먼지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입김만 불어도 굵은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다.
그동안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자물쇠로 꽉 잠가두었던 측근들이 일제히 폭로에 나섰다.
왕년에 펜대로 사람 동맥을 여러 번 그어본 전길재의 솜씨였다.
자택에서 멍하니 있던 홍구완 사장은 검찰의 소환을 받았다.
그의 눈동자는 좌우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왼쪽 눈동자는 왼쪽으로 쏠려 있었고, 오른쪽 눈동자는 오른쪽으로 쏠려 있었다.
말도 어버버.
그는 휠체어에 실려 검찰에 소환되었다.
예전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로.
그가 검찰에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물어뜯었다.
다만 홍구완 사장의 귀에는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홍구완 사장은 카멜레온처럼 좌우가 따로 노는 눈동자를 아이처럼 굴리다가 입가에 하얀 거품을 문 채로 검찰에 들어갔다.
이어 장남 홍승진이 소환되었고, 바로 이어 홍승연이 소환되었다.
홍씨 일가는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대찬의 편에 섰던 홍승조 사장, 홍승초 청해그룹 회장 부인, 홍승한 극동TV 상무만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착잡한 시선으로 일가의 몰락을 지켜봤다.
차녀 홍승한은 오빠인 홍승조 사장을 만나 그래도 형제라고 서로를 다독였다.
홍승한이 홍승조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아버지도 저렇게 무자비하셨을까?”
홍승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홍승한을 바라봤다.
“저렇게? 아니.”
“그렇지, 저 정도는 아니셨지?”
홍승한은 조대찬만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듯했다.
홍승조는 착각에 빠진 동생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건 귀여운 수준이지, 아버지에 비하면.”
“…뭐?”
“조대찬은 적어도 사람은 안 죽였잖아.”
“…….”
홍승조는 살짝 고개를 들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어쩌면 싸게 막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자까지 쳐서 갚으려면 우리까지 날리는 게 맞거든.”
남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70년 동안 세웠던 공든 탑이 전길재의 칼질 한 번에 완전히 무너졌다.
서원웅이 이혼하겠다는 입장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홍승연은 당혹했다.
자신과는 일절 상의하지 않고 제멋대로 터트렸다.
평소 같았으면 당혹보다는 분노가 앞섰을 것이다.
분노가 지나쳐서 당혹해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는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믿을 구석이 있어야 마음껏 분노할 텐데.
믿을 구석이 없었다.
-이혼 발표 취소해. 아직 시간 있어.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처리하는 거, 내 얼굴에도 네 얼굴에도 먹칠하는 거야. 기회 줄게. 취소해.
홍승연의 문자메시지에 서원웅은 답장하지 않았다.
만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답장이 오지 않자, 홍승연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당장 화날 수 있어. 이해할게. 근데 이성적으로 생각해. 나랑 지지부진한 이혼소송 몇 년 동안 하고 싶어? 그건 아니잖아.
다시 묵묵부답.
-그래, 내 잘못도 있어. 근데 당신도 잘한 건 없잖아? 내가 끼어들지 말랬다고 진짜 구경만 하고 있어? 당신이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기만 했어도 이렇게는 안 됐어.
다시.
-전화 좀 받아봐. 제발.
서원웅은 모든 일을 법률대리인을 통해 처리했다.
홍승연과 살던 집은 헐값에 처분해버렸다.
서원웅을 만나고 싶다며 회사를 찾아온 홍승연은 필래그룹 사옥에 배치된 가드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서원웅은 그녀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서원웅과 홍승연의 결혼생활은 끝이 났다.
물론 지지부진한 이혼소송의 과정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미 홍씨 일가의 이마에는 비도덕한 악마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