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94화
“하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극동일보의 편집국장이 돼주십시오.”
“하! 불안불안 하더니 역시나네.”
“해주세요.”
“내가 미쳤습니까? 본인이 독고다이네 들개처럼 떠도네, 내 속성을 이미 다 말했구만요. 그런데도 내가 편집국장이 될 감입니까? 아니거든요.”
“극동일보는 소돔과 고모라예요. 극약처방이 필요하다고요.”
“극약이랍시고 청산가리를 먹여 꽥 죽이시렵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
전길재 기자는 푸, 허무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재만 몇 백 억 단위로 들어간 걸로 아는데, 이제 몇 백 억은 돈도 아니라 이 말이구만요?”
“맡기면 잘 해낼 걸 아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조 대표님도 보통 미친 게 아니지만, 나는 그냥 사이코예요, 사이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한테는 해당사항 없거든요.”
“됐고요. 그냥 극동일보 편집국장 해달라고요.”
“조 대표님, 이젠 아주 막 나가시네.”
“해줘요.”
“싫어요.”
“해달라고요.”
“싫다고요.”
대찬은 탁자를 쾅 내리치며 꽥 소리를 질렀다.
“해달라고!”
그러자 전길재 기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장이라도 자기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대찬을 바라봤다.
그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 대표님도 사이코였구만요…….”
대찬은 기어코 전길재 기자를 극동일보의 편집국장 자리에 앉혔다.
전길재 기자는 대찬의 제안을 마지못해 수락하며 경고를 남겼다.
“날 조 대표님 마음대로 부릴 꼭두각시로 삼을 요량이라면 지금이라도 관둬요. 난 조 대표의 말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돈에 움직이는 인간이에요.”
“꼭두각시로 부릴 생각 없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추한 인간이 되면 곤란하죠. 제가 부리려고 해도, 기자님은 부려지면 안 됩니다.”
“조 대표님 말씀이야 항상 그럴 듯합니다만은.”
“극동일보를 뒤에서 조종해봤자 얻는 실익도 크지 않습니다.”
전길재 기자는 흐흐 웃으며 대찬을 비꼬았다.
“헌 창도 조자룡이 쓰면 만인을 당하는 법입니다. 언론이라는 칼은 쓰기 나름이란 걸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조 대표님이 썩 괜찮은 칼잡이니까. 실익이 작다는 생각은 절대 안 하실 텐데.”
“암튼, 쓸 생각 없다고요.”
“그럼 저한테 기대하는 역할이 뭡니까?”
“극동일보의 정상화. 언론으로서의, 기업으로서의 정상화. 그리고.”
“그리고?”
“로튼 프룻츠에 관한 가짜뉴스, 유언비어, 거짓말, 모함, 중상모략, 일제히 근절.”
“오호, 없는 말로 까지는 않겠지만 있는 말을 외면하진 않을 건데요.”
“그런 걸로 까려면 얼마든지 까요. 자신 있으니까.”
전길재 기자는 흐흐 웃었다.
“근데 극동일보의 긍지 높은 펜대들이 나를 용납할까요?”
“원래는 전 기자님 꽂아 넣을 생각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을 염두에 뒀죠.”
“다른 사람이라면?”
“최재한이요.”
“오호라, 고고한 체 하시더니 극동일보를 아예 반려동물 삼으려고 하셨구만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이젠 짜증까지 내시네요.”
“근데 최재한을 꽂으려면 반발이 심할 것 같더라고요.”
“조 대표님이랑 아삼륙이니까. 너무 노골적이죠.”
“그리고 그 하이에나 소굴 같은 곳에서 버티기엔 최재한 기자는 음흉한 기질이 부족해서.”
“아, 그래서 음흉한 기질이 넘치는 이 전가 놈을 선택하셨다?”
“네.”
대찬은 예의상으로라도 아니라고 해주지 않았다.
전길재는 피식 웃으며 반가부좌를 튼 한쪽 발을 열심히 주물렀다.
대찬은 그와 악수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발에 머물던 시선을 거뒀다.
“극동일보의 정상화. 예, 뭐 좋습니다. 그런 역할만 나한테 기대한다면 기꺼이 해드리죠. 나 죽고 묘비에 독고다이 들개새끼보다는 전 극동일보 편집국장이라고 글자 박는 게 나을 거 같으니.”
“백번 낫죠. 부탁드리겠습니다.”
“편집국장 명패에 내 이름 새긴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자유의지로 움직일 겁니다, 아셨어요?”
“네. 그러세요.”
“재갈이나 고삐나 멍에 따윌 씌울 생각 마시구요.”
“전 기자님께 재갈 물린다고 물려나 진답니까?”
“안 물려지지.”
전길재 기자는 피시식 웃었다.
극동일보 경영진의 홍씨 순혈주의가 파탄 나더니, 이제 극동일보 기자들의 엘리트주의가 파탄 났다.
호남 출신이 주필만 돼도 별일이라던 회사였다.
지금이야 좀 순해졌다곤 해도 여전히 비주류를 용납하지 않는, 역겨운 엘리트주의의 본산이었다.
우스개로 극동일보에는 왼손잡이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극동일보의 맨 꼭대기를 전길재 기자가 꿰차고 들어갔다.
학벌도 변변찮아, 집안은 웃음만 나오고, 출신도 남의 시시콜콜한 불륜도 서슴없이 캐는 황색언론.
냄새가 나는 곳이면 구더기 끓는 음식물 쓰레기통도 뒤지는 습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
그런 비주류의 총체가 대뜸 낙하산을 타고 극동일보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홍승조 사장 역시 어처구니가 없어 대찬에게 항의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왜요?”
“아니 좀 인간 같은 인간을 편집국장에 앉히든지 해야지…….”
대찬은 빙긋 웃었다.
“전길재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라면, 기준이 그렇다면, 극동일보는 세렝게티와 마사이마라, 그 중간의 어디쯤일 겁니다.”
“…극동일보 구성원들이 용납할 것 같습니까?”
“용납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겠죠. 그분들 사표는 미리 홍 사장님이 좀 받아주셔야겠습니다.”
“조 대표님.”
“극동일보는 이 시간 부로 창조적 파괴에 돌입합니다. 거스르는 사람은 파괴의 대상이 될 겁니다.”
대찬의 어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노골적이고 강퍅했다.
홍승조는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과격한 방식은……!”
“과격하지 않은 파괴는 없습니다. 사장님도 거스르시겠다면, 마찬가지로 자리를 내려놓으셔야 할 겁니다.”
“뭐, 뭐라고요……?”
“열심히 제 돈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들이부은 결과, 오늘부로 저와 임직원조합을 합친 지분이 과반이 되었습니다.”
“…….”
“홍씨의 권위는 말소되었습니다. 홍승조 사장님은 지금 가업을 승계한 입장으로 사장이 되신 게 아닙니다. 그저 일개 전문경영인일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홍승조 사장은 입술을 꼭 깨물고 대찬을 쏘아봤다.
네가 째려보면 어쩔 건데.
그의 눈빛은 대찬에게 유효타가 되지 못했다.
전길재 기자를 편집국장에 기용하는 일은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극동일보의 두뇌로 불리는 원로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수십 년간 충실히 극동일보를 위해 복무한 늙은 펜대들이었다.
주필, 논설주간, 대기자.
그들은 한국 여론을 수십 년간 주물렀던 솜씨로 반발했다.
자신에게 할당된 지면을 오롯이 점령군을 규탄하는 데 썼다.
-1등 신문의 품격이 사망했다. 이에 조의를 표한다.
-한 개인의 탐욕에 삼켜진 민족정론이여!
-114년 만에 다시 이렇게 외친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껍데기는 가라고 했는데 껍데기만 남았다. 극동일보는 껍데기만 남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신봉하는, 그들이 극동일보에 복무하는 만큼 극동일보를 구독했던 충실한 독자들의 항의 전화가 들끓었다.
“야, 이 빨갱이 새끼들아……! 너 김일성이 사주받고 이러는 거지!”
“죽창으로 조대찬이 창자 헤집어 놓기 전에 극동일보 원상복귀 시켜라!”
“홍구완 사장 납치해서 극동일보 도둑질한 조대찬이는 할복해라!”
이런 항의는 극동일보는 물론이고, 로튼 프룻츠의 고객센터까지 마비시켰다.
원색적인 쌍욕에 로튼 프룻츠의 고객센터 전화 상담원까지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지랄 맞은 목소리 들리면 바로 끊어버리라고 해요.”
대찬은 대표실로 따라 들어오는 진위생을 향해 지시했다.
“그분들 다 우리 잠재고객들인데…….”
“그런 사람들한테 고기 안 팔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어요.”
“요 며칠 사이 많이 과격해지셨네요.”
대찬은 웃으며 외투를 옷걸이에 걸었다.
“나도 점점 변해가나 봐. 돈 좀 벌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지. 안 좋게 보입니까?”
“좋고 안 좋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너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위생은 그렇게 말하며 대찬의 안색을 살폈다.
“극동일보 사태에 개입한 건 내 개인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쓸데없는 여론전으로 회사 역량을 소모하기 싫은 것도 목적 중에 하나지만 그건 부수적이고요.”
“…….”
“하지만 개입한 이후의 과격한 행보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하니까. 극동일보의 체질을 바꾸려면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어요. 이 시간에도 쇠는 식고 있어요.”
“이대로 충성도 높은 독자들을 잃으면 매출에도 큰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 아시겠지만요…….”
“극동일보를 통해 돈 벌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네?”
“70년 넘게 한국 사회를 좀먹던 용종 같은 인간들을 이 기회에 쳐낼 겁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보람이 내가 노리는 유일한 이익이에요.”
진위생은 흘끗 대찬의 눈치를 보고 말했다.
“거창하게 말씀하시지만 실은 자다가도 치가 떨리는 극동일보 기둥뿌리를 뽑고 싶으신 거잖아요.”
“…맞아요.”
대찬과 진위생은 잠깐 가볍게 웃었다.
진위생은 어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그 여파가 로튼 프룻츠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될 거 같습니다. 그냥 제 생각이긴 하지만요.”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몇몇 직원들이 고생하시는 건 확실한 보상을 해야죠. 피해받은 것 이상으로요.”
“…다행이네요.”
“염려해줘서 고마워요, 진위생 씨.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직언해줘요.”
“네.”
진위생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덕춘 이사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그녀를 발견하고 알은체를 했다.
“정 이사님.”
“해방 이후 최초로 극동일보를 작살낸 인물로 길이길이 기억될 겁니다.”
“작살냈다는 표현 대신 항암치료를 했다고 하면 안 될까요.”
정덕춘 이사는 그렇게 불러줄 용의가 절대 없는 표정으로 대찬의 앞에 앉았다.
진위생은 대찬과 정덕춘 이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퇴장했다.
정덕춘 이사는 머리를 쓸며 대찬에게 말했다.
“전길재는 우리 업계에서 소문난 사이콘데.”
“그 정도 위인이었습니까? 그 양반이?”
“아시면서. 그런 인간을 편집국장에 앉힐 줄이야. 저도 놀랐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언론인이 그 인간까지 포함해서 둘뿐이라. 좁은 인재풀의 비애죠.”
“대표님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인간한테 낙하산을 씌워주셨을 진 모르겠지만, 지금 언론계는 경악하고 있어요.”
“이 정도 반응은 예상 범위 안이긴 합니다.”
정덕춘 이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 정도 반응을 예상하고도 이러셨다고요? 참 나, 간이 커도 웬만큼 크셔야지.”
“이미 저지른 일인 걸 어떡해요?”
대책 없는 말에 정덕춘 이사는 반사적으로 웃었다.
“극동일보 주필이 자기가 나와서 새로운 극동일보를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자기 맘대로 안 되면 당 깨고 나와서 신당 차리는 정치인들이랑 다를 게 없네요.”
정덕춘 이사는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이니까요.”
“파급력이 클까요?”
정덕춘 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무시하셔도 좋을 정도일 겁니다. 극동일보를 떠난 주필, 논설주간, 대기자는 그저 꼰대 123일뿐이니까요.”
“맞네요.”
“하지만 이렇게 극동일보를 헤집어놓은 이상, 지속 가능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도 대표님의 의무입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사업을 크게 줄이고, 방송 쪽에 역량을 집중해볼까 합니다. 일단 방송국 이름부터 고치고. 극동TV가 뭡니까?”
“극동까지 챙기시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어요.”
대찬은 정덕춘 이사를 바라보며 잠깐 미소를 지었다.
“제가 살뜰히 챙길 이유가 있나요. 제가 떼쓰는 건 전길재 국장까지입니다. 이제부터는 극동일보 구성원이 알아서 꾸려나가야죠. 저는 점령군이 아니라 혁명군이라고 자부합니다.”
“쿠바혁명을 완수하고 볼리비아로 떠나 총 맞아 죽은 체 게바라처럼 말이죠.”
“그래요. 체 게바라처럼. 그거 좀 멋있는데요? 총 맞아 죽은 건 빼고요.”
“그렇게 안 되려면 체 게바라의 열정은 지니되 너무 지나쳐 순진한 수준에 이르러서는 안 됩니다.”
정덕춘 이사는 대찬의 얼굴을 흘끔 보고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
“지금껏 대표님의 행보를 보면 순진한 것과는 거리가 많이 멀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