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493화 (493/556)

난 할 수 있어 493화

대찬은 극동일보의 3대주주 자격으로 주주총회를 소집했다.

주주총회가 열리기 전, 대찬은 대외적으로 공언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극동일보의 경영에 참여할 것을 선언합니다. 목적은 돈이 아닙니다. 목불인견으로 치닫는 극동일보 사주 일가의 분열로 인해 피해를 입는 극동일보 임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한 가정의 풍파 때문에 무너질 수 있는 언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여타 다른 대기업의 주주총회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폐쇄적인 지분구조를 가진 극동일보의 주주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작은 회의실에 주주들이 모두 들어앉았다.

홍승연은 작은 주주총회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찬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고, 대찬이 내쉰 공기를 자기가 마신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대찬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웃으면서 홍승연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유도 보였다.

“인연이 참 독해요, 그렇죠?”

“말 걸지 말아요.”

“원웅이만 불쌍하지.”

“뭐야?”

대찬은 홍승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타이밍에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보란 듯이 새로 선출된 임직원조합장이자 노조위원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지내셨죠?”

“예, 조 대표님도요.”

“네, 덕분에.”

홍씨 일가에 앙금이 많은 노조위원장 역시 보란 듯이 대찬의 손을 맞잡았다.

홍승연과 홍승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친근한 미소와 힘 있는 악수.

그것으로 반전의 가능성은 소멸되었다.

주주총회에서 조대찬, 홍승조, 홍승한, 임직원조합, 도합 53%의 지분은 행방불명된 대표이사 홍구완을 제명했다.

그리고 친 홍승조-조대찬 계열의 임원을 대거 사내이사에 선임시켰다.

내친김에 대찬은 스스로 사외이사가 되었다.

이는 대찬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홍승조도 별로 마땅찮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협조하는 대가로 내걸었던 약속들이 관철되려면 대찬이 사외이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임직원조합의 강력한 요구 덕분이었다.

로튼 프룻츠, 필래 비바체, 극동일보.

대찬은 세 개 회사의 등기이사가 되었다.

이어 제3자 배정방식으로 신주를 발행하고, 대찬이 주식을 배정받는 제3자가 되었다.

아울러 극동일보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키는 안건까지 일사천리로 주주총회를 통과했다.

홍승진과 홍승연은 굳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대찬에게 신주를 배정하는 안이 통과되자마자 자리를 떴다.

오랜만에 모든 형제들이 모였는데,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찬은 상장 주관사를 빠르게 선임하고 상장 절차에 들어갔다.

극동일보의 임직원들은 대찬을 지지했다.

대찬과 한 배를 탄 홍승조, 홍승한마저 그들은 불신했다.

홍씨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리고 그 인식은 실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극동일보의 임직원들은 자신이 우대받는 건 순전히 대찬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대찬은 자신이 배정받은 극동일보의 신주를 사재를 털어 인수했다.

대찬의 지분은 기존의 9%에서 19%로 늘어났다.

대찬은 극동일보가 상장되면 몇 퍼센트를 추가로 매수할 계획이었다.

그 말인즉, 대찬의 지분과 임직원조합의 지분을 합치면 과반.

홍씨를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당장 칼을 뽑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홍승조, 홍승한과의 연대를 유지해야만 했다.

대찬은 약속대로 홍승조를 새로운 극동일보의 대표이사로 옹립했다.

극동일보의 임직원들은 영 마뜩잖다는 반응이었다.

“꼭 홍씨를 다시 사장으로 내세워야겠습니까?”

“주도권은 이미 우리가 쥐었습니다. 일단은 어르고 달래시죠. 홍승조 씨도 예전처럼 막나가진 못할 겁니다.”

예전에는 고원대 나와서도 극동일보 기자가 될 수 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취급받던 그들이었다.

대찬의 말을 그들은 십분 이해했다.

홍승연은 쓸모가 없어진 홍구완 사장을 도로 흑석동 자택에 토해냈다.

바깥바람을 오래 쐰 탓인지 홍구완 사장은 맛이 더 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단물 다 빠진 아버지 대신 남편을 붙들었다.

그녀는 잔뜩 짜증 돋친 목소리로 서원웅에게 말했다.

“당신 친구 좀 어떻게 해봐!”

“…나더러 이 판에서 빠져 있으라며.”

“사태가 이 지경이 돼있는데 계속 강 건너 불구경 할 거야?”

서원웅은 잠깐의 대화에도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됐어. 그냥 물러나.”

“됐어? 되긴 뭐가 돼?”

“그쯤 하라고. 더 이상 방법도 없잖아.”

“그러고도 당신이 내 남편이야?”

“하….”

“여보, 로튼 프룻츠 그거 필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거 아냐?”

“…….”

“조대찬이 자기만 돈 많은 줄 알잖아. 분하지도 않아? 저런 개털한테 당신 와이프가 수모란 수모는 다 당하고 왔는데?”

서원웅은 홍승연의 손을 꽉 붙들었다.

“여보, 이쯤 하자고. 시작부터 꼬인 판이었어.”

“진짜 이럴 거야?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지금.”

서원웅은 홍승연을 빤히 바라봤다.

“이러지 마. 힘들어.”

“힘들어? 도대체 뭐가 힘든데? 당신은 내 일에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으면서 뭐가 힘들어?”

서원웅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떠나려는 서원웅을 보고 홍승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야, 이대로 그냥 간다고? 뭐야, 진짜? 뭔데?”

“다음에 얘기하자.”

서원웅은 미련 없이 홍승연의 곁을 떠났다.

혼자 남은 홍승연은 살짝 몸을 떨었다.

시선은 어디에 둘지 몰라 갈팡질팡.

“뭐야, 진짜 가는 거야? 나만 이렇게 남겨두고 간다고? 뭔데, 뭔데 진짜…….”

홍승연은 소파 귀퉁이를 꼭 붙들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홍승조는 대찬을 비롯한 등기이사들, 그리고 극동일보 전 임직원이 보는 앞에서 사장에 취임했다.

“제가 잘해서 사장이 된 게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불미스러운 계기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는 이 혼란을 서둘러 진정시키겠습니다.”

홍승조 신임 극동일보 사장은 자기 등 뒤에 앉은 대찬의 따가운 눈빛을 감지했다.

그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을 맺었다.

“또한 임직원 여러분께 약속했던 사항을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찬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간단한 취임식을 마치고, 대찬은 등기이사들, 그리고 홍승조 사장과 둘러앉았다.

대찬은 그 자리에서 분명히 못을 박았다.

“홍승조 사장님, 그 자리는 임직원들이 만들어줬다는 걸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

홍승조 사장은 대찬의 훈계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성질대로 뻗댈 수가 없었다.

대찬은 온순해진 홍승조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유수의 언론사들이 모두 적자를 보는 와중에 극동일보만 300억씩 대단한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이게 극동일보 경영진의 능력이 탁월한 덕분이었을까요?”

“…….”

“아닐 겁니다. 그만큼 직원들 인력을 갈아 넣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세요. 그리고 투명하게 경영하세요.”

“…….”

“그 전까지 극동일보 사장을 일컬어 밤의 대통령이니 어쩌니 했던 말들을 자랑스럽게 여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심한 모욕이고 불명예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극동일보는 일개 언론사일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국민들 눈에 안대를 씌우고 여론을 좌지우지했던 시절은 부끄러운 역사로 접어두세요.”

“…그러죠.”

홍승조 사장 본인의 귀에는 대찬의 말이 심한 모욕이고 불명예였다.

그럼에도 그걸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의 다짐을 받은 대찬은 극동일보 사무실을 돌며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그건 필요한 일인 동시에, 사춘기 소년 같은 호승심이 발동한 행동이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여기가 산업부군요.”

대찬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부서 이름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산업부 소속 기자들이 일어나 대찬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까지는 펜촉으로 목을 따려고 들었던 이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려니 대찬은 절로 몸이 꼬였다.

대찬은 그 기자들 중에서 한 사람을 발견하고 씩 웃었다.

대찬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구본진 기자님,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모르셨죠?”

“이사님…….”

구본진은 대찬이 뻗은 손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대찬은 그의 손을 오래 쥐고 있지 않았다.

“기자로서의 소신이 있다면 제 처지에 따라 구 기자님의 입장이 바뀌진 않겠죠.”

“…….”

“앞으로도 로튼 프룻츠를 실컷, 대차게 까주세요. 알겠습니까?”

대찬의 말에 구본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대찬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명함에 극동일보 사외이사 글자 좀 팠다고 봐주고 그러면 곤란하죠. 그건 프로가 아니잖아요. 그렇죠?”

“…….”

“그런 소신 없고 아마추어 같은 기자를 극동일보에서 더 안고 갈 이유가 없을 겁니다.”

“그게, 저…….”

대찬은 구본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른 기자들을 바라봤다.

“제 말이 틀렸나요?”

“아, 아닙니다. 이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냥 한낱 사외이사 나부랭이라면 이들이 이렇게 쩔쩔 맬 일도 아니었다.

대찬이 극동일보 경영권의 캐스팅보트를 쥔 장본인임을 극동일보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지지를 거두면 다시 홍씨 일가의 압제가 반복된다.

그들은 대찬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잘 쒔다고 해야 할 책무를 느꼈다.

그러니 그들도 영 프로다운 기질은 없는 셈이었다.

대찬은 구본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 프로답게 구시면서 이 회사에 발붙이고 계실지, 아니면 아마추어답게 고개를 숙이고 이 회사를 나갈지, 빠른 시일 내에 거취를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대찬이 제시한 두 가지의 선택지는 어떤 걸 고르나 구본진에게 가혹할 뿐이었다.

구본진은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망했다.

그게 그의 뇌리에 머무는 유일한 낱말이었다.

극동일보의 상장절차는 빠르게 이뤄졌다.

시장에 풀린 극동일보의 신주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찬이 이 회사를 키울 용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엄청난 투자를 받을 이유도 없는 회사였다.

시장에 신주를 많이 뿌릴수록 대찬의 지분만 희석될 뿐.

극동일보의 상장은 거의 요식행위에 가까웠다.

대찬은 사재를 털어 웃돈에 웃돈을 얹어서라도 극동일보의 얼마 안 되는 신주를 최대한 긁어모았다.

뒤늦게 극동일보의 경영에 참여해보려던 심산의 대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극동일보의 지분을 사들였다.

그러나 시장에 풀린 주식만으로는 극동일보 경영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아서인지 이내 사들인 주식을 토해냈다.

졸지에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는 건 물론이요, 극동일보 내에서 어떤 직함도 얻지 못한 홍구완의 장남 홍승진은 이를 악물고 주식을 사들이려고 했다.

아직 자신과 홍승연의 지분을 합치면 40% 대 후반이니, 아직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찬 역시 공격적으로 지분을 거둬들이고 있어 주가가 천정부지로 솟은 상황이었다.

홍승진의 비서는 그에게 까다로운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대표님 소유로 돼있는 부산 극동호텔을 매각하면 자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가만히 놔두면 1년 365일 만실을 기록하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

그 배를 갈라 고기로 만들어 내다팔아야 조대찬의 맞수가 될 수 있다.

경영권 회복이 보장되는 게 아니고, 그제야 해볼 만해진다.

이러다가 경영권도 찾아오지 못한다면 꼬락서니가 정말 우스워진다.

“…젠장.”

게다가 극동일보 임직원 전원은 한마음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홍승진 전 국장의 귀환을 결사반대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붓을 놓는다. 극동일보의 이름을 버린다. 이를 분명히 밝힌다.’

풍파 없이 잘 자란 도련님은 모험을 두려워한다.

결국 그는 눈물을 삼키며 극동일보의 왕좌에 복귀하는 모험을 포기했다.

홍승진이 물러나면서 대찬은 주주로서는 극동일보의 2인자, 개인으로서는 임직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1인자가 되었다.

홍구완의 차남 홍승조가 사장이 되었지만 그의 권력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대찬의 권력은 그를 제치고 극동일보의 데스크를 선임할 정도는 되었다.

그 무렵, 대찬은 전길재 기자를 만났다.

“기자님이 독고다이 스타일인 건 아주 잘 알아요.”

“음?”

“들개처럼 떠돌다가 한 방에 특종을 낚아채는 부류의 기자라는 걸 잘 안다고요.”

“아.”

전길재 기자는 그제야 감을 잡은 듯 피식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