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92화
“두바이를 시작으로 터키, 오만,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등과도 계약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아…, 예.”
“저는 특약사항으로 생산설비와 부대시설 건설에 한국 건설사를 기용하자는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이 특약사항을 청해건설에 발효시킬 용의가 있습니다.”
꼴깍.
김원삼 회장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침을 삼켰다.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청해건설은 실력이 충분하지만 덩치가 크지 않아 지금껏 존재감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죠. 일이 잘 성사된다면 청해건설의 실력을 국내를 포함해 해외시장에까지 어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만.”
“물론, 당연히…….”
“극동일보 지분 9%를 넘길 용의를 보여주시면, 저도 두바이를 비롯한 아랍제국에 청해건설에 대한 용의를 충분히 비치겠습니다.”
“중동 수주와 극동 9% 지분을 교환하자는 말씀이십니까.”
“표면적으론 그렇지 않죠. 청해건설이 수주를 감당할 능력이 되는지 철저히 검증할 겁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능력은 차고 넘칩니다만…, 아닙니까?”
“능력은 충분합니다.”
“지분 9%에 대한 값은 십 원 한 장 빼지 않고 제대로 쳐드리겠습니다. 회장님께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청해그룹 김원삼 회장은 대찬을 똑바로 바라봤다.
“극동일보 지분 9%는 조 대표님의 것입니다.”
“혹시나 사모님께서 반대하시면…….”
“반대 안 할 겁니다. 현명한 여자라서요.”
김원삼 회장은 대찬과 악수를 했다.
홍구완 사장의 장녀 홍승초는 자신이 가진 극동일보 지분 9%를 대찬에게 제값에 팔아치웠다.
대찬은 다시 로튼 프룻츠 지분을 저당 잡아 대출한 돈으로 지분을 사들였다.
홍씨 집안의 피만 흐르던 극동일보에 대뜸 조씨가 끼어들었다.
홍승초의 의자를 값비싼 대금을 지불하고 취한 대찬은, 바로 홍구완 사장의 차남이자 극동일보의 경영부장인 홍승조와 마주 앉았다.
홍승조는 대찬의 개입이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저희 집안싸움에 이런 유명한 분이 끼어드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 놀라셨죠.”
“하지만 저한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승한이는 저와 가까운 녀석이고, 조 대표님도 승연이 편을 들지는 않을 거 같으니 달라질 건 없는 거죠.”
대찬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런가요.”
“도대체 조대찬 씨는 이 판에 왜 끼어드신 겁니까? 지분 9%면 돈도 적잖이 들어가셨을 텐데.”
“저 졸부잖아요. 원래 급하게 번 돈은 급하게 쓰게 되잖습니까.”
“쉽게 번 돈이라 그렇죠.”
대찬은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쉽게 번 돈은 아니고, 급하게.”
“…뭐, 어찌 됐든 간에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이대로 가만히 넋 놓고만 있으면 끼어든 보람도 없이 저쪽이 홀라당 회사를 가져갈 텐데.”
“제가 9%, 홍승조 씨 9%, 그리고 홍승한 씨 5%, 여기에 임직원조합 30%까지 하면 총 53%. 그럼 과반이죠?”
“산수로는 그런데, 임직원조합이 우리한테 붙을 이유가 없잖아요.”
“붙게 만들어야죠. 저쪽에 파격적인 제안을 해보죠.”
홍승조의 눈썹이 꿈틀했다.
“파격적인 제안이라면.”
“극동일보 사주 일가의 망나니적 성질은 새삼 감출 것도 없는 사실이죠.”
대찬의 말에 홍승조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망나니 앞에서 망나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나 한번 보여드려요?”
“극동일보 임직원들도 바로 그런 행태에 이골이 났을 겁니다.”
“대체 뭘 말씀하고 싶은 겁니까.”
“극동일보 사주 일가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경영에서 벗어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경영진을 꾸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겁니다.”
그러자 홍승조는 기가 차다는 듯 메마른 웃음을 토했다.
“미쳤습니까? 앓느니 죽고 말죠. 경영권도 못 쥘 판이면 내가 왜 이 싸움을 합니까?”
“그래서 희망이라고 말씀드리잖습니까. 권한을 내려놓으라는 게 아니라.”
“자세히 말씀하세요, 자세히. 저는 게으른 금수저라 조 대표님처럼 공부 열심히 안 했거든요?”
“극동일보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킨다고 하면, 임직원조합이 우리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장을요?”
“홍승연 씨는 뭐 말할 것도 없고, 홍승진 국장도 못지않은 개판이라고, 평판이 아주 구리더라고요.”
홍승조는 자기 형이 개판이라는 지적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극동일보 주식을 홍씨 집안 바깥에서 사고 팔 수 있게 하면, 지금처럼 사주 일가가 회사를 멋대로 휘젓고 다니지 못한다는 기대가 생길 테니까요. 또, 사장이 교체될 거란 희망도 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게 뭡니까? 그 말대로라면 내가 사장 노릇도 못하게 된다는 건데.”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상장을 전제로 임직원조합을 끌어들인 후, 상장 전에 신주를 발행해서 저한테 배정하세요.”
“조 대표님한테요?”
“네, 저 돈 많습니다. 제법 많은 지분을 부담 없이 수용할 정도로.”
“그래서요.”
“제가 20% 정도의 지분을 갖게 되면, 저한테도 확실한 힘이 붙습니다. 제 대외적인 이미지는 나쁜 편이 아닙니다. 임직원조합을 충분히 설득해낼 수 있어요.”
“뭘 설득한다는 겁니까?”
“홍승진 국장과는 달리 홍승조 씨가 합리적인 마인드를 갖춘, 극동일보를 이끌 자격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요.”
“그 말씀은, 나한테 사장 자리를 주시겠다?”
“엄연히 말하자면 저와 극동일보의 임직원이 홍승조 씨를 사장으로 추대하는 거죠.”
“직원들 눈치나 살피는 사장 자리에 내가 왜 눈독을 들여야 합니까?”
“결과적으로 그저 힘으로 찍어 눌러 얻은 자리보다 훨씬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힘이야 좀 덜하겠지만.”
“상장 말고 다른 방법은 없고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면 당장이라도 막내 여동생한테 쪼르르 달려가 구두 밑창이라도 핥으시죠.”
“뭐, 뭐라고요?”
“그런다고 뭐가 떨어질 것 같지도 않긴 하지만요. 저도 홍승연 씨 성질머리 잘 알거든요. 당해봐서. 굽힐수록 더 세게 밟는 성질이잖아요.”
“…….”
“지금 바로 대답하기 어려우시면 내일까지 연락 주세요. 그때까진 기다려드리죠.”
대찬은 그렇게 툭 던지듯 말을 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파투가 나도 그는 딱히 손해 보는 것이 없으니까.
청해건설에 일감을 던져주는 거야, 로튼 프룻츠의 돈도 아니고 두바이 측이 부담할 일이었다.
꾸준한 흑자를 내는 극동일보 지분은 갖고 있으면 나쁠 것도 없다.
혹여 차후 경영권 다툼이 재발한다면 그때 비싼 값에 팔아치워도 되고.
대찬은 홍구완 사장의 차남 홍승조에게 칼자루를 넘기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그렇게 밀실의 바깥으로 나가려는 대찬을 홍승조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잠깐.”
“네, 홍승조 씨.”
“손잡으시죠, 저랑.”
대찬은 웃으면서 홍승조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홍승조는 조심스럽게 대찬의 손을 맞잡았다.
극동일보 임직원조합의 우두머리는 완벽히 홍승진 국장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임직원조합 우두머리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아래에서 흔들면 그대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는 약한 권위였다.
대찬은 정덕춘 이사를 앞세워 극동일보의 높고 낮은 사람들과 접선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홍승연-홍승진 연합이 임직원조합을 완벽히 구워삶기 전에 약을 쳐야 했다.
홍승조에게 알린 대로, 대찬은 임직원조합에 극동일보를 비상장회사에서 상장회사로 전환하겠다고 공언했다.
극동일보의 일관된 논조는 노조는 사회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극동일보 내에도 노조는 있었다.
그들은 근무환경 개선과 임금 상승 등을 계속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럴 이유가 없는 사주 일가는 번번이 그 요구에 침묵 혹은 겁박으로 일관했다.
대찬은 그들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하겠다고 알려왔다.
극동일보 노조위원장은 그런 대찬의 약속을 불신했다.
“제가 뭘 믿고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마 홍승진 국장 측에서도 비슷한 제안을 했을 겁니다. 잘해주겠다고.”
“…….”
“저는 극동일보의 대주주로서 상장회사 전환에 앞서 노동환경의 획기적인 개선을 대외적으로 약속하겠습니다. 저와 홍승조 씨, 홍승한 씨의 지분을 다 합해봤자 임직원조합에 못 미치는 거, 아시죠.”
“…예.”
“이는 달리 말하면 회사의 주인을 홍씨에서 임직원들로 바꾼다는 뜻이 됩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저희에게 동참을 당부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뭐…….”
“홍승진 국장을 믿습니까, 아니면 저를 믿습니까? 그동안 홍구완 사장, 홍승진 국장에게 내내 당해온 전력이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보다 제가 더 신뢰가 안 간다면, 그건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요.”
“물론 홍승진 국장보다는 조대찬 씨를 덜 불신합니다. 하지만 덜 불신한다는 게 신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이 아니면 극동일보의 주인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오지 않을 겁니다.”
노조위원장은 대찬의 말에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황제의 권력을 누려온 홍씨 일가였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분석이 타당하다.
노조위원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30%의 지분을 대표하는 임직원조합장을 전 직원 투표를 통해 교체하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회사의 요직을 꿰찬 홍승진 국장 측 임원들이 이 시도를 무력화하려고 했다.
당연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들은 통제력을 상실했다.
직원들은 한참 숨을 참다가 수면 위로 올라온 고래처럼 격정적이었다.
직원들은 기어코 홍승진 측 임직원조합장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노조위원장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걸 실시간으로 보고받은 차남 홍승조는 대찬에게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저쪽이 넘어왔으면 그냥 주총에서 아버지 끌어내리고 날 사장으로 추대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직원들도 사람이에요. 홍승조 씨가 예뻐서 손 들어준 줄 아십니까?”
“귀찮게 상장은 무슨….”
“바로 입 싹 닦아버리면 다 물거품 됩니다. 허튼소리 마시고 약속 이행하세요.”
“선생님도 아니고, 가르치시기는.”
‘비아냥거리는 건 홍씨 DNA에 새겨져 있나 봐.’
대찬은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겼다.
대찬이 임직원조합의 지분을 이쪽으로 당겨오자, 홍승연-홍승진 연합은 당혹했다.
당연히 극동일보의 주도권을 가져올 것이라 자신했던 홍승연도.
막내 여동생 홍승연의 바지사장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감수하려 했던 홍승진도.
이 상황에 분노하고 당황했다.
홍승진 국장은 자기가 수족처럼 부리는 임원들을 모아놓고 꽥 소리를 질렀다.
“직원들 구슬리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러라고 당신들 억대 연봉 받아 가는 거 아니야?”
“그게…….”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염치로 꼬박꼬박 월급 타가는 거야?”
“조, 조대찬이 개입해서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바람에…….”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
임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만 하고 대답하지 못했다.
“조대찬? 걔가 뭔데. 당신들 20년, 30년 이 회사 다니지 않았어? 조대찬이는 40년, 50년 다녔나? 왜 쪽을 못 써?”
“죄송합니다…….”
홍승진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훅, 뜨거운 콧김을 뿜었다.
잔뜩 성난 콧김이 한참 어린 녀석 앞에서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린 임원들의 눈가에 와서 닿았다.
뒤에서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상황을 바라보던 홍승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주 일가에게 직원들은 숫자였다.
몇 명이 들어오고, 몇 명이 나가고.
얼마를 벌고, 얼마를 쓰고.
숫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냥 개념 덩어리일 뿐.
그런 숫자들이 홍씨의 세계에 개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그런데 개입도 그냥 개입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려 든다.
그리고 그걸 충동질하는 장본인이 하필이면 또 조대찬이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첩첩이 짜증이었다.
그녀 못지않게 짜증이 솟은 홍승진은 고개를 조아린 이들 앞에 괴팍한 목소리로 계속 윽박질렀다.
“월급 올려준다고 해! 그러면 되잖아! 돈만 보고 일하는 애들, 돈 챙겨준다고 하면 되잖아!”
“연봉 인상을 제안하긴 했습니다만…….”
“했습니다만, 뭐!”
“조대찬 측에서 더 획기적인 제안을 하는 바람에…….”
이제 임원들은 홍승조 측도 아니고 조대찬 측이라고 했다.
“그럼 우리가 더 획기적인 제안을 하면 될 거 아냣!”
“…믿질 않습니다.”
“뭐?”
“무슨 말을 해도 직원들이 믿지 않습니다.”
홍승진은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잖아요, 아저씨.”
“오너 일가에 대한 불신이 깊습니다. 그냥 공수표라고 생각합니다. 나중 가면 입 싹 닦을 게 뻔하다고…….”
“허! 그러니까, 지금 당신들이 부족해서 이 모양이 된 게 아니고, 내가 못나서 그런 거다? 우리 아버지가 못나서 그런 거다?”
“그, 그런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밥값들 좀 해요, 밥값들 좀. 진짜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고.”
“예…….”
그러나 그들은 끝내 밥값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