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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91화 (491/556)

난 할 수 있어 491화

경북 울진.

여러 대의 검은 세단들이 항구 근처에 있는 낡은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개중 가장 비싼 차에서 홍구완 사장의 장남, 극동일보 뉴미디어의 홍승진 국장이 외투 단추를 여미며 내렸다.

그는 양복 여러 명을 거느리고 낡은 집으로 향했다.

낡은 집 역시 양복 여러 명이 대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홍승진의 진입을 막지 않았다.

홍승진이 대문 문턱을 넘자, 비장한 얼굴의 홍승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홍승진은 홍승연을 가만히 쏘아보다가 픽 웃었다.

“망할 년.”

“괜한 감정소모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는 어디 계셔.”

“잠깐 다른 곳에 모셔놨으니까 나랑 얘기부터 해.”

장남 홍승진은 한 번 더 깜찍한 막내 여동생을 쏘아보고는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홍승연은 덤덤히 자기가 저지른 사고의 결과를 설명했다.

“이미 증여 끝났어. 아버지 지분까지 합해서 내가 가진 극동일보 지분, 35%야.”

“너 기어코 정말……! 직계혈족한테 범죄행위 저지르면 그 증여 취소되는 거, 모르냐?”

“내가 무슨 범죄행위를 했는데? 아버지가 바람 쐬고 싶다고 하셔서 모셨을 뿐이야.”

“어디서 되도 않는 거짓말을……!”

“괜히 헛힘 빼지 마. 나도 대가리 클 만큼 컸어. 손쓸 수 있는 만큼은 다 손 써놨다고.”

홍승진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네가 그 지분 가졌다고 해서 회사를 통으로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너한텐 명분이 없어.”

“그래, 나도 뭐, 사주 노릇하는 덴 소질 없다는 거 잘 알아.”

“그럼 도대체 왜 이딴 짓을 벌인 건데.”

“평생 날 동생 취급도 안 해주던 큰오빠가 울진까지 내려와서 절박하게 매달리잖아? 충분히 벌일 가치가 있는 일이지.”

“뚫린 입이라고…….”

“내가 임직원조합이랑 짬짜미 벌여서 전문경영인 불러들이면, 오빠는 그날로 날백수야. 주제 파악 좀 하고 목소리 낮춰.”

“야, 홍승연!”

“일단 좀 앉아서 얘기해.”

홍승연은 덤덤한 얼굴로 홍승진과 쇼파에 마주 앉았다.

홍승연은 형제 중 홍승진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불러들였다.

그녀 역시 사태를 장기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버지의 극동일보 지분 30%를 손에 넣었으니 더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홍승연은 다리를 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홍승진 국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사장은 오빠 시켜줄게.”

“…뭐?”

“능력도 나보다 낫고, 그래도 오빠가 장남이니까 오빠가 사장 한다고 하면 누가 반대하겠어.”

“…….”

“하지만 분명히 알아둬. 오빠한테 회사를 주겠다는 게 아니야.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거지. 회사는 내 소유야.”

“야…….”

“뭐, 그렇다고 오빠가 대단히 힘쓸 건 없어. 가끔 내 민원이나 들어주고, 내 심기 거스르지만 않으면 되거든.”

홍승연은 씩 웃으며 홍승진 국장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나 35, 오빠 12. 합치면 47이야. 이 정도 지분이면 임직원조합도 선선히 우리 손 들어줄 거고. 오빠가 사장 자리에 오르는 데는 별문제 없어.”

“내가 사장 자리 하나면 옳다구나 네 편 들어줄 거 같아? 어림도 없어.”

홍승연은 씩 웃었다.

“내 편이 아니면 어떻게 할 건데?”

“…….”

“나, 그래도 큰오빠니까 배려해주는 거야. 오빠가 거절하면 바로 작은오빠한테 제안할 거고. 12프로나 9프로나 나한텐 거기서 거기니까. 그러다가 사장 노릇도 못 하는 수가 있다?”

“…뻔뻔하긴.”

“이러지 마. 우리 일가 중에 안 뻔뻔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오빠도 염치가 있는 인간이면 아버지부터 찾고 봤을 거 아니야? 이렇게 앉아서 나랑 다투기 전에.”

홍승진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아버지 상태가 도대체 어떻길래 네가 이따위로 나오는 거야?”

“아유, 그 지경이 되도록 오빠는 아버지 안 돌보고 뭐 했어?”

“…….”

“아버지랑 같은 회사에서 여러 번 마주쳤을 텐데. 큰아들이 무신경한 것도 정도가 있지.”

“조용히 해.”

홍승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떠들었다.

“이건 오빠가 저지른 불효에 대한 벌이기도 한 셈이네.”

“홍승연.”

홍승연은 귀찮은 듯 손짓으로 홍승진의 입을 막았다.

“더 말할 거 없어. 선택해. 오빠가 거절하면 난 작은오빠 부를 거야.”

홍승진 국장은 다리를 꼬며 피식 웃었다.

“승조? 걔가 내 뒤통수치고 일 꾸밀 만큼 대범한 성격 같아?”

“당연하지. 아마 덥석 받을걸? 오빠 때문에 애초에 사장 자리는 꿈도 못 꾸던 사람이니까.”

“넌 아직도 승조를 그렇게 모르냐?”

“그래? 근데 왜 그렇게 오빠 입술에 경련이 일까?”

“…내가 뭐.”

“견물생심이라고, 눈앞에 턱 사장 명패가 있으면 작은오빠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 한번 보자고, 어디.”

홍승진 국장은 꼬았던 다리를 풀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그의 눈동자와는 달리, 홍승연의 눈빛은 평온했다.

홍승진은 울진에서 돌아와 형제들을 소집했다.

극동일보의 주주는 이들 형제와 임직원조합의 대표뿐이니, 임직원 대표를 뺀 주주총회라고 봐도 무방했다.

장남 홍승진은 어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승연이 만나고 왔다.”

짧은 말에 형제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 그년 지금 어디 있어!”

“일단 진정들 하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년 찾으면 재깍재깍 공유하기로 했잖아. 잊었어?”

차녀 홍승한이 목에 핏대를 세우자, 홍승진이 진정시켰다.

“일단 좀 들어봐.”

차남 홍승조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이죽거렸다.

“앞장서서 승연이 쥐 잡듯이 잡겠다던 사람이 얌전해진 걸 보니까, 무슨 거래를 하긴 한 모양이야?”

“억측은 하지 말고.”

홍승진은 점잖게 동생들을 제압하고 말을 이었다.

“이미 승연이가 손을 써 놨다. 아버지 지분, 자기 걸로 다 증여해놨어.”

“…뭐?”

“이미 되돌리긴 글러버린 거 같다.”

“형, 그게 무슨 속 편한 말이야? 그르긴 뭐가 글러?”

홍승진의 말에 차남 홍승조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쩌겠냐. 일이 이렇게 돼버린 걸.”

“허! 형이 언제부터 이렇게 성인군자처럼 마음이 넓었어?”

“우리도 현실적으로 판단을 하자는 얘기야.”

홍승진의 말에 홍승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굴 호구로 아나. 둘 사이에 무슨 짬짜미가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들러리 서줄 용의가 절대 없어.”

“…….”

유구무언인 홍승진을 보고 홍승조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형, 그렇게 살지 마.”

그는 홍승진을 쏘아보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남은 장녀 홍승초와 차녀 홍승한도 둘 사이의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승진은 그들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대세는 기울었다.

자존심이 뭉개졌지만 그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애써 자위했다.

장남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형제들은 함께 살길을 모색했다.

장남 홍승진 12%, 막내 홍승연 35%. 그렇다면 둘의 총 지분은 47%.

차남 홍승조 9%, 장녀 홍승초 9%, 차녀 홍승한 5%. 세 명의 총 지분은 23%로 이들이 임직원조합의 30%에 달하는 지분을 이끌어낸다면 결과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맏형 홍승진은 뉴미디어 국장으로 극동일보 내부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키워왔기에 그런 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남 홍승조는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해야만 했다.

만일 여동생 중 하나라도 전열을 이탈한다면 임직원조합의 의중과는 관계없이 쪽박을 차고 만다.

차남 홍승조는 손톱을 깨물었다.

극동일보의 경영부장인 홍승조는 회사 내부에 자신을 따르는 측근들을 불러 함께 대책을 강구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로튼 프룻츠로 적을 옮긴 정덕춘 이사의 옛 동료이기도 했다.

극동일보 쪽에 쭉 내밀고 있던 정덕춘 이사의 더듬이가, 살길을 강구하는 옛 동료들에게 닿았다.

정덕춘 이사는 그들을 만났다.

“우리 조대찬 대표님이 그쪽 사정에 개입할 의사를 갖고 계시는데.”

“개입할 의사가 있으면 뭐 합니까. 지금 외부인이 간섭할 여지가 전혀 없는데.”

정덕춘 이사는 백발의 착 달라붙는 단발머리를 쓸며 웃었다.

“우리 대표가 극동일보에 원한이 장난 아닌 거, 그쪽도 알지?”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근데 조대찬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니까요?”

“자리가 없으면 만들어야지.”

“빈틈이 없는데 어떻게 만들어요.”

“우리 대표가 또 그런 쪽에는 희한한 재주가 있잖아. 일단 우리랑 긴밀한 사이는 유지하자고. 그래서 나쁠 건 없잖아.”

“알았으니까 소주나 더 사줘요. 푸념이나 하다 갈라니까.”

정덕춘 이사는 웃으면서 동료들에게 술을 시켜주었다.

정덕춘 이사는 대찬에게 극동일보 홍씨의 꼬여버린 난맥상을 보고했다.

가만히 듣던 대찬은 빙긋 웃었다.

“맞는 말씀 하셨네요. 자리가 없으면 만들어야죠.”

“저도 앞에서는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우리가 극동 일에 끼어들 여지가 없기는 해요, 대표님.”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이 너무 많은 거잖아요?”

“네?”

정덕춘 이사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 쫓아내고 그 의자에 앉으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홍구완 사장의 장녀 홍승초 씨가 청해그룹 사모님이라고 하셨죠?”

“네, 맞아요. 홍승초가 9% 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이 9%부터 사들여야겠습니다.”

“홍승초가 과연 순순히 지분을 내줄까요?”

“묵직한 보따리 싸들고 얘기를 나눠봐야겠죠. 정 이사님이 다리 좀 놔주시겠어요?”

대찬의 말에 정덕춘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대찬이 만난 사람은 장녀 홍승초가 아니라 그의 남편인 청해그룹 회장이었다.

대찬은 그와 웃으며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조 대표님 모르면 간첩이죠. 청해 김원삼입니다.”

“앉으시죠.”

“예.”

김원삼 회장은 대찬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얘기를 하는 내내 자신과 대찬 사이에 젊고 혁신적인 기업가라는 연결고리를 유독 강조했다.

대찬이 보기에 그는 별로 젊지도 않고 혁신적이지도 않았지만, 듣기 좋은 말로 그를 띄워주었다.

한참 입바른 소리를 해주고 나서야 김원삼 회장은 대찬의 용건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조 대표님이 저를 굳이 뵙자고 한 이유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장님도 별로 에두르는 걸 좋아하진 않으실 것 같으니.”

“예, 편하게 말씀하시죠.”

“홍승초 사모님께서 가진 극동일보 지분 9%를 저한테 파십시오.”

“…예?”

김원삼 회장은 당황했다.

조대찬. 네가 아무리 극동일보에 한이 맺혀도 그렇지.

극동의 복마전에 뜬금없이 대찬이 발을 들이겠다는 것이 선뜻 이해 가지 않았다. 게다가 대찬이 극동일보의 깊숙한 내부사정을 이미 웬만큼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시라…….”

“네, 갑작스럽죠. 즉답을 내놓으시기 어려우신가요?”

“하하…….”

“촌각을 다투는 사안이라 그랬으면 하는데.”

청해그룹 김원삼 회장은 떨떠름하게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좀 그렇죠. 더군다나 제 소유도 아니고 집사람 소유인 것을…….”

“청해건설이 요즘 중동 쪽에 관심이 많죠?”

“예?”

“그런 풍문을 들어서요. 아닌가요?”

“그건 맞습니다. 웬만한 건설사라면 중동 큰손의 러브콜을 기다리기 마련이죠.”

청해건설은 청해그룹의 몸통이라도 봐도 좋은 핵심 계열사였다.

견실한 중견 건설사였지만 중동 쪽에서는 제대로 기지개를 켜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다 긴다 하는 대기업이 주문을 족족 가로채는 까닭.

중동발 큰 건수는 건설사의 실력만으로는 따내기 쉽지 않았다.

좁은 국토에 건물이 들어설 만큼 들어섰으니, 청해건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대찬은 그런 청해건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지금 저희 로튼 프룻츠가 두바이 측과 대규모 비도축육 생산시설 계약을 추진 중입니다. 아마 중규모의 산업단지가 될 겁니다. 사우디와의 협약이 있어서 당장은 아니지만, 해가 바뀌면 바로 착수에 들어갑니다.”

“그렇습니까?”

“예, 별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핵심 설비를 제외한 부대시설의 건설을 청해건설 측에 의뢰할 용의가 있습니다만.”

“저희한테요.”

김원삼 회장은 부러 덤덤한 척 했지만 들뜬 기분을 아주 감추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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