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90화
-‘아버지가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니 그런 줄 알아라.’
그런 무성의한 변명을 믿어줄 형제들이 아니었다.
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권모술수의 노하우.
그들은 이미 아버지의 밑에서 어렸을 때부터 습득해왔다.
당연히 극동일보를 물려받을 줄 알았던, 장남이자 극동일보의 뉴미디어 국장을 지내는 홍승진은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막내가 철이 없다, 없다 하더니 이렇게까지 없을 줄 누가 알았어! 미친년, 지랄 났다!”
장남인 홍승진은 기가 막혔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갈피는 잡혔다.
홍구완 사장이 제대로 자기 구실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일을 꾸민 장본인은 막내 홍승연이라는 것.
아버지야 흑석동에 있든 홍천에 있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단, 신경 쓰이는 건 그의 안정된 후계 구도에 변수가 생기는 점이었다.
홍구완 사장은 극동일보 지분의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장남 홍승진 뉴미디어 국장이 소유한 지분은 12%.
차남인 홍승조 극동일보 경영부장은 9%.
장녀이자 중견급 재벌인 청해그룹의 사모님 홍승초는 9%.
차녀인 홍승한 극동TV 상무는 5%.
홍승연이 5%를 갖고 있었다.
나머지 30%는 임직원 조합의 몫이었다.
그들은 사주일가의 결론이 떨어지면 그대로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장남 홍승진 뉴미디어 국장은 아버지의 지분을 그대로 승계하고, 형제 중 하나만 자기를 지지해주면 극동일보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홍승연이 장난을 쳐서 아버지의 지분을 빼돌리든지 하면 골이 깨진다.
홍승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급히 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형제들 역시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못했다.
장녀 홍승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승연이 이년이 혼자서 다 처먹으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극동일보의 경영부장인 차남 홍승조는 피식 웃었다.
“걔가 어릴 때부터 욕심이 남다르긴 했지.”
“지금 그런 식으로 웃어넘길 일이야?”
“릴랙스 하고, 상황을 좀 여유롭게 보자고. 일단 사람들 풀어서 아버지 찾아야지.”
장남 홍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조 말이 맞다. 일단 아버지 가실 만한 곳에 사람들 쫙 풀어.”
극동TV 상무인 차녀 홍승한이 물었다.
“경찰에 말하면 금방 찾을 텐데?”
차남 홍승조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순순히 이끌리는 거 보니까 머리가 해까닥 하신 거 같은데, 만약 금치산자 상태라면 어떡할 건데?”
“뭐?”
“요즘 금치산자라는 말도 안 쓰지. 피성년후견인이라고 하는데, 법정에서 그렇게 때려버리면 곤란해져.”
“큰오빠가 후견인 하면 되잖아.”
차녀 홍승한의 말에 차남 홍승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같은 콩가루 집안은 제3자가 후견인으로 배정되는 수가 있어.”
“법원 따위가 우릴 무시하고 그럴 수 있다고?”
“힘이 하나로 모여 있어야 법원도 따위가 되지. 아니면 그냥 토실토실 살진 돼지로밖에 안 보여. 그럼 진짜 웃겨진다?”
“…….”
“그리고 아버지 상태 이상한 거 밖에 새 나가기라도 해봐. 그럼 어떤 변수가 생길지 장담 못 해. 결국 우리 손으로 찾아야 해.”
장남 홍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조 말이 맞아.”
홍승조는 씩 웃었다.
“자, 어쨌든 먼저 찾는 인간이 뒤통수 때리기 없기다? 막내처럼 유치하게 굴기 없기.”
“혹여나 그러면 내 손에 작살날 줄 알아라.”
장남 홍승진은 으름장을 놓았다.
그즈음.
홍승연은 홍천 별장을 비웠다.
형제들이 모였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아버지를 더 궁벽한 곳으로 이끌었다.
홍구완 사장은 가끔 정신이 돌아왔다.
서릿발처럼 사나운 목소리로 자기를 꽉 붙든 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놈 새끼들! 어디로 가는 거야! 엉! 너희 뭐 하는 놈들이야! 북괴 간첩이냐? 아니면 안기부가 나 조지라든!”
아저씨, 안기부 없어진 지가 언젠데.
그렇게 받아칠 법도 했지만, 좌우의 사람들은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을 결박한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는 수색작업은 영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무용하게 흘렀다.
“대표님, 극동일보 쪽 기류가 좀 이상하다네요.”
대찬에게 그렇게 보고하는 이는 진위생이 아니라 정덕춘 이사였다.
그녀의 바로 전 직장이 극동일보였으니 내부에 아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대찬이 극동일보의 동향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비서팀에 내리자, 그녀도 나름의 인맥을 가동해 알아보던 차였다.
“기류가 어떻게 이상합니까?”
“홍구완 사장이 요즘 회사에 안 나온다네요.”
“사주야 뭐, 안 나와도 그만 아닙니까. 알아서 잘 굴러가는 회사니까.”
정덕춘 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 영감쟁이가 얼마나 독한데요. 30초를 있더라도 매일 사옥에 출근도장을 찍는 양반입니다.”
“…그래요?”
“네, 제가 산증인이죠.”
“그렇다면 홍구완 사장의 신상에 이상이 있다는 뜻일까요?”
“안 나오는 자세한 곡절은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문제가 발생한 건 분명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덕춘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찬의 앞을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특이동향이 감지되었다.
극동일보 쪽을 주시하던 진위생이 대찬에게 보고했다.
“극동일보가 3분기에 역대 최악의 손실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역대 최악?”
“네… 무려 50억 적자라네요.”
“말이 안 되는데…….”
극동일보는 매년 300억 이상의 흑자를 기록해왔다. 다른 기업들처럼 매출에 변동이 큰 회사도 아니었다.
아무리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극동일보의 충성심 높은 독자들이 꾸준히 매달 구독료를 내며 떠받들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한 분기에 50억 적자를 봤다니.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거 의도적인 적자라고 봐야겠는데.”
대찬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왜.’
대찬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비서팀에서 올라온 보고를 공유받은 정덕춘 이사가 대찬을 찾아왔다.
그녀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증여세 깎으려는 수작이네요.”
“…네?”
“지금까지 나온 결과를 종합해보면 그래요. 홍구완 사장이 증발했다니. 권력욕, 물욕의 화신이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고 사라질 리는 없겠죠?”
“물론 없겠죠.”
“그럼 누군가 의도적으로 홍구완 사장을 강제로 어딘가 끌고 갔다는 소리예요. 홍구완 사장은 거기에 저항도 못하는 상태고. 그럼 그 다음 수순은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홍구완 사장의 재산을 자기 쪽으로 돌리겠죠. 재산 말고 뭐 볼 게 있겠어요. 늙은 몸뚱이는 고깃값도 못 받는 처진데.”
정덕춘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꽁꽁 숨겨놓은 돈은 몰래 빼돌린다고 쳐도, 이미 대외적으로 알려진 자산은 증여의 형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어요. 특히 주식.”
“그럼 극동일보 매출이 의도적으로 적자를 기록시켰다는 건…….”
“비상장주식을 증여할 때 매겨지는 세금은 그 기업의 가치와 최근 3년간의 손익을 따져서 계산하거든요.”
그제야 대찬은 정덕춘 이사의 말을 이해했다.
“의도적으로 적자를 기록해서 비상장주식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고, 그 상태로 증여를 받아 세금을 최대한 감면받는다, 이거죠?”
“네, 극동일보는 1년에 평균 300억 흑자. 그럼 분기 당 대충 80억 안팎의 이익이 나요. 80억을 마이너스 50억으로 바꿨단 말이죠.”
“130억 차이네요.”
“대충 계산 때려 봐도 큰돈이에요.”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홍구완 사장을 데려간 사람은 숨겨놓은 현금 따위가 아니라 지분까지 노리고 있다는 겁니까?”
“네, 이게 뭘 의미할까요.”
“무리를 해서라도 극동일보 지분을 확보할 사람은 사주 일가밖에는 없죠.”
“네, 그렇죠.”
그제야 대찬은 퍼즐을 다 맞추고 입을 벌렸다.
그는 서원웅과 함께 있을 때 홍승연이 급히 들어오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래, 이 정도 일이라면 그렇게 급할 만하지.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홍승연, 홍승연이다…….”
“홍가네 막내딸이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네요. 나머지 형제들이 요즘 자주 모인다는 첩보도 있거든요.”
“그 아줌마, 대담한 일을 벌이고 있구만.”
정덕춘 이사는 피식 웃었다.
“집안 꼴 잘 돌아가네요. 우리야 웃으면서 귤이나 까먹으면 됩니다.”
“벌써 정 이사님을 선임한 효과가 나오네요. 남들보다 한 발짝 앞서서 홍가네 시트콤을 즐길 수 있게 됐으니.”
“앞으로 보실 효과에 비하면 이 정도는 발톱의 때만도 못해요.”
대찬은 정덕춘 이사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다가 멈칫했다.
“잠깐, 이대로 홍승연이 홍구완 사장의 지분을 흡수하면 상황이 이상해지지 않습니까?”
“음, 홍구완 사장한테 금치산자 판정이 내리기 전이라면 그 증여는 유효하죠. 홍승연이 가진 지분이 5%, 홍구완 사장 지분이 30%…….”
“둘의 지분을 합치면 35%. 그럼 임직원 조합의 지지만 얻으면 홍승연이 극동일보 사주가 되는 거 아닙니까.”
“수학적으론 그렇죠. 하지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에요.”
“임직원 조합이 그런 양아치 같은 일을 벌인 막내딸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낮으니까.”
정덕춘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만에 하나라면.”
“…만약을 붙이면 안 될 일은 없죠.”
대찬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홍가네 시트콤의 속편이 조가네 시트콤이 될 수도 있었다.
대찬은 급히 서원웅을 만났다.
평소 이사회에 참석할 때 겸사겸사 들르는 대찬이 이사회도 없는데 찾아왔다.
서원웅도 눈치가 있어서 대찬이 저간의 사정을 짚어냈음을 알았다.
대찬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마누라가 지금 일을 쳐도 거하게 치는 거 같은데.”
“…….”
“맞지. 부정하면 너도 공범이야.”
서원웅은 한숨을 쉬었다.
“부정하면 공범이라니, 부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맞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럼 노코멘트밖에 방법이 없네.”
서원웅은 우회적으로 긍정했다.
여기서 발뺌해봤자 이미 확신을 얻은 대찬의 생각을 바꿀 확률은 없었다.
“이거, 사고도 보통 사고가 아니야. 잘못 엮이면 너도 된통 당해. 알지?”
“알아. 지금 나도 고민 중이야.”
“승연 씨가 헛꿈 꾸고 있어. 이런다고 극동일보 못 먹어.”
서원웅은 팔짱을 낀 채 깊은 한숨만 쉬었다.
“나한텐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던데.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치겠네.”
“선 긋고 관망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
“네 마누라 일인데 그렇게 태평할 수가 있어?”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좋아 마누라지. 너 같으면 저런 여자랑 살고 싶겠니.”
“허, 이게 웬 뜻밖의 고해성사람.”
“고해성사라고 할 것도 없어. 지친다, 지쳐. 평생 피워보지도 않은 담배가 당긴다니까. 대찬아, 나는 네가 참 부럽다.”
대찬과 서원웅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너는 이 아사리판에 개입할 의사가 없어?”
“와이프는 사태가 정리되면 필래 쪽 자금으로 지원 사격 해주기를 원하는 모양새야.”
“그럼 네 의중은.”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바빠. 최대한 투명하게 경영권 승계하려면 가진 현금도 빠듯하고. 와이프한테 지원 사격할 여력이 없어.”
“으음…….”
“게다가 우리가 극동 같은 큰 언론사 일에 대놓고 개입하면 골치 아파져.”
“그렇겠지.”
“결국 큰돈 들여 먹어봤자 독사과야.”
“그럼 필래의 방침은 관망, 또 관망?”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어. 와이프가 결자해지해야 돼. 그게 본인이 원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알았어. 근데 나는 너처럼 관망은 못해.”
서원웅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이 사태에 어떻게든 개입해야겠어.”
“뭐? 네가 왜.”
“승연 씨가 무슨 형태로든 극동일보의 전권을 쥐는 건 나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야.”
“…개입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단 뜻이야.”
대찬은 서원웅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직 나도 플랜은 없어. 내가 주도할 상황이 아니니까. 하지만 빈틈이 보이면 주저하지 않을 거야.”
“…….”
서원웅은 대찬의 선언에 응원도 저주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