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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89화 (489/556)

난 할 수 있어 489화

국내영업본부.

“국내영업본부장에는 남인수 이사님을 선임했습니다. 남인수 이사님은 SG리테일 이사를 지내시고 우리 로튼 프룻츠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남인수 이사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50대 중년 남성이었다. 옷차림도 어느 곳 하나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이 평범했다.

“남인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경영지원본부.

“경영지원본부장에는 추승호 이사님을 모셨습니다. 추 이사님 역시 여러 대기업에서의 경력을 갖고 계신 베테랑이십니다.”

정덕춘, 남인수, 추승호. 세 명의 본부장에 더하여 로튼 프룻츠 사우디 현지법인과 중국법인을 맡을 임원까지.

총 다섯 명의 임원이 새로이 로튼 프룻츠의 소속이 되었다.

대찬의 인선은 보통의 스타트업과는 사뭇 결이 달랐다.

진위생이 대찬에게 말했다.

“언론에서 말이 좀 있네요. 로튼 프룻츠, 올드보이 대거 기용. 이런 식으로.”

“나도 봤어요. 극동에서는 뭐라더라? 그…….”

“폐품 수거로 급하게 맞춘 구색이요.”

“암튼 성질 건드리는 데는 선수들이야.”

진위생은 멋쩍게 웃었다.

“사실 직원들 사이에서도 그런 말이 없는 건 아니에요. 참신함보다는 안정성에 너무 치중한 게 아니냐는.”

“네, 맞습니다. 지금 로튼 프룻츠에는 안정이 필요해요. 너무 웃자라서 밑동을 받쳐줄 든든한 베테랑이 필요해요.”

진위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그렇다고 저분들이 딱히 젊은 사람들에 비해 참신함이 떨어진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특히 정덕춘 이사님 같은 경우에는 저보다도 더 젊게 사시는 분이에요.”

“대표님의 안목이니 믿습니다.”

“믿어야지, 별수 있겠어요?”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로튼 프룻츠의 임원진은 의욕과 아이디어는 넘쳤지만 역시나 실무경험이 부족했다.

대찬도 높은 곳의 공기를 마신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태윤 이사 역시 필래에서 고속승진을 했다지만 임원의 일에는 초보였다.

이미 시스템도 갖춰졌겠다, 굳이 의욕만 넘치는 젊은 아마추어를 기용할 이유가 없었다.

대찬은 특히 해외영업본부 정덕춘 이사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언론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말에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 이사님.”

“그 언론이란 거에 극동일보도 포함입니까?”

“제 딴엔 1등 신문이라고 하잖습니까.”

정덕춘 이사는 픽 웃었다.

“보긴 봤습니다. 폐품 타령하는 거. 그 폐품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게 그 회사 신문이란 걸 아나 몰라.”

“하하.”

“나는 평판이나 명성에 신경을 씁니다. 단, 내가 신경 써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에 국한됩니다. 극동일보는 취급 안한 지 반만년은 됐습니다.”

시원시원한 그녀의 태도에 대찬은 더욱 신뢰를 가졌다.

그즈음, 필래 비바체의 경영진이 교체되었다.

대찬에게 불주사를 맞은 이후, 김풍호 대표는 대표 자리에 앉아 숨만 쉬었다.

그렇게 임기를 무난히 마친 김풍호 대표는 필래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어 대표 자리에 오른 사람은 옥문영 전무였다.

사실상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대찬은 둥지를 필래에서 로튼 프룻츠로 바꿨지만, 여전히 필래 비바체에서만큼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 대찬이 지원하고 그룹의 실질적인 지휘자인 서원웅이 묵인하니 그녀의 대항마는 없었다.

그리고 옥문영 전무의 능력은 이미 검증될 대로 검증된 터.

옥문영 전무 역시 대표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들뜨지 않고 덤덤히 받아들였다.

대찬은 옥문영 전무를 대표이사로 선임하는 이사회 자리에 직접 출석했다.

혹여 수상한 수작을 벌이는 반란표가 나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사외이사로서 떡하니 버티고 앉은 대찬을 본 이사들은 주저 없이 옥문영 전무를 대표이사로 선임하는 데 찬성했다.

옥문영 전무가 대표로 선임되고, 대찬은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옥 대표님.”

“고마워요. 이게 다 우리 조 대표님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택이에요.”

“많이 변하셨네요. 이런 공치사도 다 해주시고.”

옥문영 대표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찬은 필래그룹 사옥에 들른 김에 서원웅의 얼굴도 보고 갔다.

서원웅은 웃으며 그를 맞았다.

“소원성취 하셨네, 우리 조 대표님.”

“소원성취?”

“옥 전무님이 대표 되셨잖아.”

대찬은 서원웅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지금 생색내는 거야?”

“그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둘은 싱겁게 웃었다.

대찬은 마강국도 서원웅의 방으로 불렀다.

오랜만에 머리 아픈 일 얘기 대신 고등학생 시절, 대학생 시절의 시시한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졸업앨범을 꺼내 추억해도 할 말이 많은 시절이었다.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환담을 나눴다.

그때 방 밖에서 우당탕 급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셋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그쪽을 주시했다.

벌컥.

문이 급하게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대찬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서원웅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지금 급……! 아, 손님이 계셨네.”

홍승연이었다.

그녀는 대찬의 얼굴을 발견하고 역시 껄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꾸벅도 아니고 끄덕이었다.

지겹도록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극동일보의 아가씨를 예뻐하려야 예뻐할 수가 없었다.

홍승연도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남편인 서원웅에게 말했다.

“좀 있다 다시 올게.”

“급한 일이면 내가 잠깐 나가서 듣고 오고.”

홍승연은 대찬을 잔뜩 의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됐어.”

깊은 사정은 모르는 마강국은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뭐야? 왜 갑자기 춥지…….”

대찬은 웃으면서 서원웅에게 말했다.

“우리가 얼른 자리를 떠줘야겠네.”

“아니야, 왜. 더 있다 가지.”

“아냐. 괜히 마누라한테 타박 듣지 마세요. 마강국 씨, 갑시다.”

대찬은 마강국을 끌고 필래그룹의 사옥을 떠났다.

서원웅의 방 앞에 마련된 소파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홍승연은, 스쳐 지나가는 대찬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다 그가 사라진 걸 보고 부리나케 서원웅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를 듣고 대찬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홍승연 씨가 저렇게 한 번씩 푸닥거리할 때마다 무슨 사달이 꼭 나던데…….’

대찬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날 밤, 대찬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원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승연 씨한테 무슨 일 있어?”

“어… 음, 있긴 한데.”

서원웅은 아니라고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대찬의 질문에 긍정했다.

속인다고 속여질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무슨 일이야.”

“극동일보 쪽에 문제가 좀 있어.”

“무슨 문제.”

서원웅은 잠깐 한숨을 쉬고 말했다.

“지금 당장 밝히기는 어려워. 극비야. 아마 극동에 문제가 있다고 너한테 알려줬다는 것만으로도 와이프가 날 죽이려 들 걸.”

“많이 심각한 일이야?”

“심각해. 추후에 너한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나한테?”

“응, 그런데 당장은 아니야. 이해해줘.”

“오케이, 알았어.”

대찬 역시 서원웅을 더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다음날, 대찬은 진위생이 이끄는 비서팀에 극동일보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며칠 전.

홍승연은 아버지이자 극동일보의 사주인 홍구완을 만나러 갔다.

허구한 날 잔소리나 떽떽 떠들어대는 아버지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꾸준히 얼굴도장을 찍어둬야만 했다.

그래야 극동일보가 가진 엄청난 재산의 한 조각을 떼어먹을 수 있으니까.

재벌 사모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러느냐고 하겠지만, 홍승연에게 남편의 재산은 남편의 것이었다.

떵떵거리며 남편을 쥐락펴락하려면 극동일보가 소유한 돈과 권력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홍승연은 몸에 좋다는 것을 바리바리 챙겨 홍구완 사장의 흑석동 자택으로 향했다.

자기가 직접 고른 것이 아니면 입에도 안 대는 아버지라는 걸 알고 있다.

그저 이것들은 생색내기 선물에 불과했고 아마 가정부들이 알아서 나눠 가질 것이었다.

정성스레 난초 잎을 닦는 홍구완 사장의 앞에 홍승연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고요?”

“…….”

“아버지.”

홍승연의 부름에도 홍구완 사장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난초만 쓸었다.

홍승연은 의아해서 아래로 내린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아버지, 홍구완 사장의 눈은 항상 매서울 정도로 총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날은 어딘가 흐리멍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홍구완의 눈을 보고 나니 난초를 닦는 손짓도 기계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했잖니.”

“…네?”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니. 징그럽다니까.”

“그게 무슨…….”

홍구완 사장은 멍한 시선으로 홍승연을 바라봤다.

“둘이 있을 때는 오빠라고 하라니까. 왜, 그건 네가 징그러워서 못하겠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홍구완 사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홍승연에게 다가갔다.

다가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홍승연에게는 더없이 낯설었다.

홍구완 사장은 자기에게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정아.”

“미, 미정이요?”

“아, 네 이름이 미정이가 아니었나? 은영이었나?”

“네? 대체 무슨…….”

홍승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홍구완 사장은 그저 실없이 웃었다.

홍승연은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흐허허, 내가 머리 얹어준 처녀들이 한둘이 아니라. 네 이름이 뭐였지?”

홍승연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미정이는 누구고 은영이는 또 누구야.

동공이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홍승연의 머리도 빠르게 돌아갔다.

‘아빠가 미쳤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고, 홍구완 사장의 손을 꽉 붙잡았다.

“미정이 맞아요. 미정이.”

그러자 홍구완 사장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렇지? 미정이 맞지? 역시 홍구완이 대가리 아직 안 죽었다니까. 그런데 다른 망할 년들은 나한테서 한몫씩 챙기고 다 뿔뿔이 흩어졌는데 너는 왜 여기 남았니?”

“내가 어딜 가겠어요. 나는 망할 년 아니니까 옆을 지켜야지.”

홍승연은 차마 아버지를 오빠라고 부르지는 못했다.

홍구완 사장의 멍청한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옆을 지켜? 그래? 으허허허.”

홍구완 사장은 홍승연의 손등을 가볍게 치며 기뻐했다.

그녀는 홍구완 사장의 방을 나오자마자,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가정부들을 불러 모았다.

“요즘 아버지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예? 아…….”

가정부들이 슬금슬금 눈을 피하자 홍승연이 사납게 다그쳤다.

“뭐 켕기는 거 있죠. 빨리 말해!”

“그, 그게 요새 좀 이상하세요.”

“언니, 오빠들도 알아요?”

“아직 모르시죠. 아가씨처럼 자주 찾아뵙질 않으니…….”

그 말을 들은 홍승연은 잠깐 미소를 머금었다가 다시 정색했다.

“알았어요. 당장 아버지 짐 싸세요.”

“…예?”

“당분간 흑석동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지내신다고 했어요.”

“다, 다른 곳이라면…….”

“아줌마는 알 거 없어요. 빨리 채비해요, 빨리! 나 내일 아침에 올 테니까 그때까지 준비 다 해놔요.”

“어르신 말씀도 없이…….”

“내가 딸이잖아! 아버지 지시 듣고 이러는 거니까 얼른 채비해. 알았어요?”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홍승연은 닫힌 방문을 흘끗 돌아보며 씩 웃었다.

홍승연은 남편인 서원웅에게 이를 알리고 바로 홍구완 사장을 홍천 별장으로 옮겼다.

모신다는 표현보다는 수송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홍구완 사장의 이동은 비밀스럽고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녀는 흑석동 자택에 남은 가정부들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오빠나 언니들이 아버지 보러 오면, 오랫동안 여행 떠나신다고, 당분간 올 거 없다고 하셨다고 전하세요. 알았어요?”

“괘, 괜찮을까요?”

“아버지 지시라고 하잖아요. 왜 자꾸 토를 달앗!”

“아, 알겠습니다!”

“나 분명히 경고했어요. 내 말 개무시하면 진짜 재미없을 줄 알아요.”

“네… 아가씨.”

홍승연은 눈을 흘겨 한 번 더 단단히 경고하고는 자리를 떴다.

가정부들 앞에서 독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뒤돌아서서는 입을 벌리고 흐흐 웃었다.

‘이거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찾아왔잖아. 역시 아빠는 막내딸을 제일 예뻐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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