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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88화 (488/556)

난 할 수 있어 488화

마침 시장하던 터.

대찬은 피자를 먹으면서 무스타파의 말을 들었다.

“이미 전화로 큰 고비를 넘겼으니 나머지 부분은 쉽게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네. 첫째, 합작회사의 지분은 로튼 프룻츠 51%, 사우디 측 49%로 한다. 둘째, 사우디 정부는 로튼 프룻츠 사우디 현지법인을 조속히 승인한다. 셋째, 비도축육의 사우디 내 유통과 판매는 모두 사우디 정부 측에 일임한다. 여기까진 합의가 됐으니까요.”

“맞습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잔챙이에 불과했다.

피자 한 판을 다 먹어 치울 때쯤 협상은 끝났다.

대찬과 무스타파는 기술보안이나 인력 구성, 비자 등 정부 지원사항에 대한 협상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대찬은 피자를 먹느라 번들번들 기름이 묻은 손을 티슈로 닦고 무스타파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예, 조 대표님도…….”

무스타파는 정말 고생한 표정으로 대찬의 손을 맞잡았다.

대찬은 자기의 의중대로 사우디 진출에 대한 협상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와 나란히 앉은 고수혁은 웃으면서 말했다.

“첫 출장에서 많은 걸 배웠네요.”

“뭘 배웠는데?”

대찬은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협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배짱이다.”

“배짱이 만용이 되면 안 되겠지. 다가오는 데드라인을 내 것으로 만들 것. 그쪽이랑 협상 안 해도 괜찮은 플랜B가 있다는 걸 드러낼 것. 이 두 가지가 중요한데, 구체적으로는…….”

길어지려는 대찬의 말을 무시하고 고수혁은 지나가던 승무원에게 말했다.

“저 물 한 잔만 주세요.”

“예,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대찬은 고수혁에게 눈을 흘겼다.

협상이 끝난 이후.

사우디 정부는 계약사항을 철저하게 준수했다.

왕세자와 손을 잡은 로튼 프룻츠에게 감히 장난을 치려는 세력은 없었다.

그랬다간 찹찹광장에서 폭찹이 되고 말 테니까.

아흐마드 왕세자는 로튼 프룻츠를 연일 추켜세웠다.

-‘사우디 식탁의 축복.’

-‘무슬림에게 풍성한 식문화를 위해 신이 보낸 전령사.’

-‘사막에 내린 단비.’

장본인인 대찬이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과한 칭찬이 아흐마드 왕세자의 입에서 나왔다.

사우디 국민들도 은근히 로튼 프룻츠의 진출에 반색했다.

새로운 풍미의 고기를 싼값에 구입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로튼 프룻츠와 사우디 측 자본은 새로운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이름은 AL-F CELL.

비도축육을 고기가 아니라 세포 추출물로 규정한 사우디 최고율법학자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회사 이름에는 고기가 아닌 세포라는 뜻의 Cell을 쓰기로 했다.

로튼 프룻츠는 약자인 RF를 쓰기를 원했고, 사우디 측은 아랍어 고유명사를 쓰기를 원했다.

이를 절충하여, 로튼 프룻츠의 R을 영어의 The처럼 아랍어에서 정관사로 쓰이는 AL로 바꾸어 AL-F CELL을 사명으로 했다.

F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Food도 되고, Friendship도 되었다.

한국어 명칭은 독음 그대로 ‘알에프셀’로 하였다.

로튼 프룻츠는 알에프셀을 실질적인 모기업으로 거느렸다.

로튼 프룻츠는 알에프셀과 별도로 로튼 프룻츠의 브랜드를 홍보하고, 사우디에서 필요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사우디 현지법인은 사우디 내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보다 더 막중한 책무를 부여받았다.

그건 아랍에미리트연합의 두바이를 위시해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오만, 터키 등 다른 중동국가들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사우디는 로튼 프룻츠에게 1년 간 다른 나라와의 계약을 맺지 말라고 했지만, 그 시한이 지나자마자 로튼 프룻츠는 다른 중동국가들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때문에 1년이 지나자마자 바로 사업을 개시할 수 있도록 물밑에서 민첩하게 기초를 닦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대찬 일행을 한국에 남아있던 직원들이 박수로 맞이했다.

그들은 사우디 출장에 끌려가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도, 과연 일이 성사될까 숨죽이며 현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일행이 무사히, 그것도 큰 성과를 안고 돌아오자 그들은 일말의 부채 의식에서 해방되어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한태윤 이사는 빙긋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5천만 한국, 15억 중국, 20억 무슬림. 세계의 절반이 비도축육을 먹게 됐네요.”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안 계신 동안에도 중동 여러 업체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랑 손을 잡아달라고.”

“그랬군요. 앞으로 중동 쪽 업무도 바빠지겠는데요. 국내나 중국 시장에 소홀해져서는 안 됩니다. 산토끼 잡으려다가 집토끼 놓치는 우를 범해선 곤란해요.”

“네, 안 그래도 정봉무역의 왕핑웨이 총경리가 여러 번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중국 쪽 물량은 꼭 지켜달라고.”

“그 양반, 아량 넓은 따꺼처럼 굴더니 은근히 소심하다니까요.”

“하하, 걱정이 이해는 됩니다. 별 볼 일 없던 정봉무역이 이번 건으로 훅 커졌으니까요.”

“걱정 말라고 하세요. 여러모로 아직은 중동 시장보다는 중국 시장이 우리한테는 더 큰 손이니까.”

“그렇게 당부해놓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대찬은 석우룡 장관과 따로 만났다.

어쨌건 그가 대찬에게 진실을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그 귀띔은 대찬의 판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석우룡 장관은 만나자는 대찬의 말에 선선히 응했다.

“축하해요, 조 대표. 이제 어엿한 다국적기업의 수장이 되셨구만, 그래.”

“장관님의 도움이 컸다는 걸 부정할 순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조 대표 입에서 오랜만에 듣기 좋은 소리가 나오네.”

석우룡 장관은 대찬의 인사를 좋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즐겼다.

“저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좋다고 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나쁘다고 합니다.”

“알지, 내가 조 대표를 모르겠나. 아무튼 이번 일로 우리 사이의 묵은 앙금이 좀 풀어졌으면 하는데.”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억하겠습니다.”

“참 나, 그렇게 딱딱하게 나올 것 없잖아요. 사람 감정이 어떻게 물하고 기름처럼 그렇게 딱 나뉘나? 화로 위에 눈 한 점 녹듯 사르르 녹는 게 사람의 마음이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장관님과 제 관계는 다분히 공적인 관계입니다. 마음을 교감하는 그런 사적인 친분은 더 도모할 뜻이 없습니다.”

“섭섭하게 또 이러나.”

“오늘은 그저 감사인사를 드리려고 모신 겁니다. 인사 다 드렸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먼저 자리를 떴다.

석우룡 장관은 허탈하게 웃었다.

“뻣뻣한 새끼.”

중동과의 계약까지 따낸 로튼 프룻츠는 현기증이 올 정도로 성장했다.

절대 개척되지 않을 것 같던 이슬람 세계가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비도축육에 문호를 개방했다.

사우디의 설비가 완공되기 전까지, 선박을 통해 비도축육이 공급되었다.

중국 측 물량을 상대하느라 연일 비지땀을 흘리는 평택 제2목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산했던 부산 제3목장이 갑자기 바쁘게 돌아갔다.

중국 측의 수요도 연일 폭증했다.

평택 제2목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는데도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로튼 프룻츠는 가까운 부지를 물색해 대대적으로 설비를 증설하기로 결정했다.

로튼 프룻츠의 해외 수출 물량은 눈을 감았다 뜨면 늘어나있었다.

이제 본진인 국내시장이 초라해 보일 정도.

그즈음, 대찬은 지분 소량을 매각하여 500억 가량의 채무를 모두 변제했다.

윤이영은 그 어떤 일보다 그 사실에 기뻐했다.

중국에 이어 중동까지 빗장이 풀렸다.

비도축육을 생산하는 설비는 물론 흥읍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들 역시 과부하가 걸렸다.

중동시장이 열리자 식량자급에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려운 사정의 이유야 제각각이었다.

태평양의 섬나라들은 지나치게 작은 국토 때문에 가축을 키울 토지가 부족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인 북부, 중부 아프리카 국가들 역시 토지와 전기, 식수가 부족했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북유럽 국가들은 비도축육의 생산과정이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이라 관심을 보였다.

유럽과 걸핏하면 마찰을 빚는 러시아는 식량제재조치의 대안으로 비도축육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특히 육류 수송이 까다로운 시베리아 지방의 국민들이 자급할 수 있는 좋은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소고기가 풍부한 남미 등지를 제외하곤, 전 세계에서 비도축육의 도입 여부를 두고 크고 작은 논쟁이 벌어졌다.

전 세계적으로 비도축육의 인지도와 가치가 무섭게 확산되었다.

그즈음, 로튼 프룻츠의 시가총액은 2조 원을 돌파했다.

그 말인즉슨, 30%에 육박하는 대찬의 재산은 6천 억 안팎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범인의 계산으로는 눈이 팽팽 돌아가는 거금이었다.

저마다 크고 작은 로튼 프룻츠 주식을 지니고 있는 직원들도 가진 지분만큼 크고 작은 이익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을 오롯이 즐기지 못했다.

업무가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로튼 프룻츠 직원들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업무량도 감당 못할 수준인데, 업무처리를 위해 요구되는 능력 역시 본인이 가진 것 이상이었다.

특히 한태윤 이사는 업무를 보다가 화장실로 뛰어가 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로튼 프룻츠의 임원진은 회사 규모에 비해 양적으로 초라했다.

로튼 프룻츠의 임원급 인사는 민승기, 오윤, 다르샨 싱, 은오영, 한태윤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민승기는 RF시스템의 대표로 대구에 내려가 있고, 오윤 전무는 서울 사무소에서 식음료 사업을 전담하고 있다.

다르샨 싱과 은오영은 당연히 연구.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비도축육 사업부를 진두지휘하는 건 한태윤 이사 한 명뿐이었다.

가혹한 일이었다.

일당백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한태윤 이사는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있었다.

‘답답한 양반, 힘들면 힘들다고 하지.’

대찬은 혼자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쥔 한태윤 이사를 유리로 된 벽을 통해 바라봤다.

한태윤 이사의 자리에는 갖가지 영양제가 즐비했다.

타고난 강골인 한태윤 이사가 영양제에 의존해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한 비정상이었다.

가혹행위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대찬은 고급 인재를 대량으로 채용할 필요성을 체감했다.

적어도 이사급의 자리를 서너 개는 만들어야 했다.

물론 그 밑의 직원들은 그 몇 배로 채용해야 했다.

대찬은 헤드헌팅 전문기업을 통해 다섯 명의 임원과 계약했다.

로튼 프룻츠의 직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태윤 이사를 전무로 두 계단 승진시켰다. 보직은 총괄기획실장.

로튼 프룻츠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니 승진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그가 비도축육 사업의 전반적인 사무를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세 명의 본부장을 두었다.

대찬은 세 명의 본부장을 전 직원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직접 소개했다.

해외영업본부.

“해외영업본부장에는 정덕춘 이사님을 선임했습니다.”

정덕춘은 나이가 퍽 들어 보이는 여자였다. 실제 올해로 예순 살이라고 했다.

정확히 5대5로 가르마를 탄 단발머리는 완전한 백발이었다. 척 보기에는 가발 같았다.

테가 굵고 둥근 안경이 이색적이었다.

“정덕춘 이사님은 삼라전자 홍콩법인, 이집트법인에서 일하시고 버거칸 한국법인의 마케팅 총괄부사장, 극동일보 경영마케팅 총괄이사를 역임하신 관록 있는 인재입니다.”

정덕춘 이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정덕춘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러자 직원들은 술렁였다.

극동일보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비단 대찬뿐만 아니라 로튼 프룻츠 전 직원은 극동일보에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극동일보를 혐오하는 오너가 친히 극동일보 출신 인사를 영입하다니.

‘저러면 극동일보가 덜 때릴 줄 알고 그러는 건가?’

직원들의 의문을 정덕춘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해소해주었다.

“노파심에 저를 극동일보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걱정되는군요.”

“…….”

마음을 읽힌 직원들은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저는 극동일보에 단물 쪽쪽 빨아 먹히고 버려진 신세입니다. 이 한 마디로 제 결백을 증명하죠.”

정덕춘 이사는 씩 웃으며 말했다.

“홍구완 개새끼.”

그러자 좀 과격한 쪽으로 그녀와 코드가 맞는 직원들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정덕춘 이사는 웃음을 머금었다.

경력으로 보면 정덕춘은 로튼 프룻츠에 이사급으로 초청될 인물이 아니었다. 이미 대기업의 총괄부사장을 역임했으니 적어도 그 정도의 대우는 해줘야 맞았다.

그런데 정덕춘 이사는 스스로 로튼 프룻츠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대찬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말했다.

“저는 외부로부터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받고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관뒀습니다. 하지만 난 아직 자신이 있어요. 짬 대우 안 바랍니다. 이사 직함이면 충분해요. 봉급도 많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일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정덕춘 이사의 눈은 그 어떤 젊은이보다도 열정이 넘쳤다.

대찬은 그녀와 바로 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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