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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87화 (487/556)

난 할 수 있어 487화

아무래도 무스타파, 그리고 사우디 왕실은 대찬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간단합니다.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입니다. 그것도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죠, 누가 51을 가져갈 것이냐. 1번, 로튼 프룻츠. 2번, 사우디. 이것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쉽습니다.”

“예, 그러나 서로 가진 정답이 달라서 말이죠.”

“저희 로튼 프룻츠에 51%의 지분을 허용해주시면 사우디 내의 모든 유통과 판매는 그쪽에 맡기겠습니다.”

“그건 이미 합의된 문제 아닙니까?”

“유통과 판매를 전담하고, 생산설비까지 완전히 손아귀에 넣겠다는 건 지나친 욕심이십니다.”

“여기서 욕심 운운하지 맙시다. 서로 최대한의 이익을 도모하는 건 로튼 프룻츠나 이쪽이나 같으니까요.”

“협상은 한쪽의 최대한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벌이는 게 아닙니다. 그건 협상이 아니라 갈취죠.”

“저희가 계속 저희의 생각을 고집하면 조대찬 대표께서는 이 협상을 깰 겁니까?”

“협상이 아닌 갈취를 무방비하게 수용할 이유는 없겠죠.”

무스타파는 어깨를 으쓱이며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협상을 진행하기 어렵겠군요. 서로 생각을 좀 더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내일모레면 저는 사우디를 떠납니다. 오늘 합의를 봐야합니다.”

“그래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합의에 도달하겠습니까.”

“오늘이 아니면 저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별수 없는 일이지요. 내일모레 돌아가신다고요. 그때까지 생각을 정리해보고 다시 모이도록 하지요. 다시 오겠습니다.”

무스타파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순순히 보내주었다.

김산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찬에게 말했다.

“뭘 믿고 저렇게 배짱일까요?”

“우리가 귀국 안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전히.”

“참 나.”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났다.

로튼 프룻츠 일행이 사우디를 떠나는 날.

대찬은 부랴부랴 돌아갈 짐을 쌌다.

이때까지 사우디 측의 접촉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여유로웠다.

그 밑의 직원들만 안절부절 못했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우디 측만큼은 아니더라도 로튼 프룻츠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 까닭.

김산호는 발을 동동 굴렀다.

“대표님, 정말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은 걸까요?”

“괜찮든 안 괜찮든 저쪽에서 상대를 안 해주는데 어떡해.”

“…….”

“자, 빨리 챙겨. 체크아웃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직원들은 지나치게 무신경한 대찬의 모습이 지나치게 신경 쓰였다.

“정말 괜찮냐구요.”

거듭된 김산호의 물음에 대찬은 싸던 짐을 내려놓고 웃었다.

“저쪽이 왜 배짱인 거 같아?”

“그걸 모르니까 지금 답답한 거 아니에요.”

“우리, 사우디 들어올 때 편도만 끊었어.”

“…네?”

“저쪽이 왜 배짱이냐. 우리가 귀국 편을 안 끊어놨기 때문이야.”

“우, 우리 한국 가는 티켓 없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돌아갈 비행기 표도 없으면서 우리가 괜히 배 튕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저쪽에서도 우리 한번 호되게 혼내주겠다, 이거야.”

“저쪽이 우리 티켓 없는 걸 어떻게 알아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정신 차리세요. 여기 사우디야. 왜 모르겠어.”

“아…….”

잠깐 멍하니 있던 김산호는 다시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깃들었다.

“그럼 진짜 큰일 난 거잖아요. 지금 당장 표 끊으려고 해도 저쪽에서 막으면 말짱 황인데?”

“버스 탈 거야.”

대찬의 말은 김산호가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점점 더 파고들었다.

“…버스요? 리야드는 이 나라 거의 국토 정중앙에 있어요. 버스 타고 어딜 갈 수 있는데요.”

“리야드에서 담맘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담맘에서 바레인 마나마까지 다시 택시 타면 돼.”

“바레인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레인에서 두바이로 들어갈 거야. 사우디에서 계속 이렇게 불량한 태도로 나오면, 우리 파트너는 사우디가 아니라 두바이가 될 거야.”

두바이 등 7개 토후국이 연합체를 이룬 아랍에미리트연합은 국토가 아주 작고 그나마도 대부분 사막이었다.

면적과 식수, 전기, 시간이 재래육에 비해 아주 소량만 필요한 비도축육은 그쪽에서도 탐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일종의 종교적 유권해석을 내려주었다. 그러자 그쪽에서도 대찬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산호는 그래도 불안했다.

“만약 우리가 배신했다고 사우디가 암살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협상에 이렇게 개판으로 나와놓고 무슨 양심으로?”

“양심이 있으면 암살하겠어요? 안 무서우세요?”

대찬은 씩 웃었다.

“이 정도 배짱도 없이 큰 고기를 어떻게 먹나?”

“…….”

“자, 짐 다 쌌으면 빨리 버스 타러 가자고. 아니, 돈도 많은데 담맘까지도 택시로 갈까? 그게 낫겠어. 산호야.”

“네.”

“밴 큰 걸로 한 대 수배해. 기사도. 담맘까지 따따블로 가준다고 해.”

에라 모르겠다, 김산호는 자포자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찬은 기사를 고용하러 가는 김산호의 뒷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은 뒤, 바로 무스타파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스타파는 목에 기름기가 잔뜩 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 조대찬 대표님. 오늘 귀국이시라고.”

“네, 맞습니다. 귀국하는 날에 다시 모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오전 일정이 좀 있어서… 정말 오늘 떠나십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탑승객 명단에 대찬 일행이 없다는 걸 아는 무스타파는 여유만만이었다.

“네, 맞습니다.”

“에… 아니었으면 하는데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방문하기 전부터 세워놓은 일정이라.”

“아쉽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빈손으로 사우디를 떠나야 하는 겁니까?”

“양측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으니 별수 있습니까. 조 대표님께서 일정을 변경해주시면 아주 좋겠습니다만.”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건 어렵습니다. 아쉽군요. 차후 다시 논의하시죠.”

대찬은 전화를 끊고 바로 수배된 밴에 올라탔다.

보란 듯이 호텔 정문 앞에다 밴을 세워놓고 잔뜩 짐을 실은 다음에, 대찬은 조수석에 앉았다.

긴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찬은 기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담맘! 담맘! 오케이?”

“오케이! 담맘!”

기사는 시원하게 차를 몰았다.

대찬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던 사우디 측 요원은 깜짝 놀라 밴을 뒤쫓아갔지만, 밴은 저 멀리 사라졌다.

담맘까지는 400km의 긴 여정이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뒷좌석의 직원들은 모두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대찬의 눈은 말똥말똥했다.

사우디 기사는 그런 대찬을 의식해서 아랍어로 몇 마디 말을 붙였지만, 인사말밖에 떼지 못한 대찬은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기사도 이내 대찬과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대찬은 백미러로 뒤를 응시했다.

리야드를 출발해 담맘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차 한 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쫓아오고 있었다.

‘티 나도 너무 티 나게 쫓아오네.’

담맘에 도착한 대찬은 짐을 내리고 기사에게 두둑한 운임을 제공했다.

돈을 받은 기사는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오랜 여정에 지친 고수혁이 대찬에게 물었다.

“이제 국경 넘어서 바레인으로 들어가면 돼요?”

“바레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두바이 가는 표를 끊어야지.”

“아, 육군 천리행군 뺨치네요.”

그러자 마강국이 고수혁을 흘끔 바라봤다.

“야, 군대도 안 갔다 온 게 천리행군 어쩌고 그러기는.”

“그러는 마강국 씨도 미필이시잖아요. 소년가장으로 면제된 사람들끼리 이러기 있어요?”

“뭐? 이, 이게……! 그리고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서 마강국 씨, 마강국 씨 불러제껴!”

고수혁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게 우리 회사 방침 아니었어요? 따지려면 대표님께 따지세요.”

“허! 쬐끄만 게 진짜……!”

“쬐끄만 게 아니라 고수혁 씨예요. 자, 해보세요, 고수혁 씨.”

“허!”

그런 마강국을 보며 대찬은 피식 웃었다.

“고수혁 함부로 건드리는 거 아니야. 본전 찾기도 힘들어.”

“뭐 저런 걸 데려왔어?”

고수혁은 끝까지 지지 않았다.

“데려온 게 아니라 제 발로 당당히 합격한 거예요, 마강국 씨.”

“아우, 저걸 그냥!”

대찬은 톰과 제리 같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에 나섰다.

“사막 한가운데서 이러지 맙시다. 유치하게…….”

마강국은 씩씩거리며 고수혁을 노려봤고, 고수혁은 그쪽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둘의 유치한 다툼에 관심이 없는 김산호는 대찬에게 일 얘기만 했다.

“굳이 담맘에 안 내려도 되지 않아요?”

“음?”

“이대로 다리 건너서 바레인으로 들어가면 되잖아요. 괜히 짐 내리고 싣고 할 것 없이요.”

이제 쭉 뻗은 다리만 건너면 섬나라인 바레인 왕국이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진짜 심각해지거든.”

“…네? 일은 이미 심각해진 거 같은데요.”

대찬은 대답 대신 부랴부랴 차를 대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한 떼의 남자들을 바라봤다.

직원들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그들은 로튼 프룻츠 일행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스탑! 스탑!”

그들은 헐레벌떡 일행에게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조대찬 대표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바레인 통해서 두바이로 가려고 하는데요, 문제 있습니까?”

“비자 있습니까?”

“사우디 측에서 1년짜리 비자를 내주신 덕분에 바레인은 아무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쪽이 그걸 모르진 않으실 텐데.”

“바레인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실 계획입니까?”

“사우디로요? 아뇨. 두바이로 들어가서 비도축육에 대한 업무를 논의할 계획입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지 마십시오!”

“네? 저는 사우디 왕실의 통제를 받는 신민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도축육을 중동 국가들 중에서 사우디에 독점 공급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협상을 마무리하고 가시죠.”

“그쪽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지금 무스타파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어이구, 무스타파는 오늘 일정이 빡빡해서 저랑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하셨는데…….”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 아무튼, 기다리십시오!”

“자세한 걸 모르는 분과 더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스타파랑 통화를 연결해주십시오.”

사우디 측 요원은 급히 무스타파와 연결을 해주었다.

안 그러면 대찬은 정말 다리 건너 바레인으로 사라질 태세였다.

전화를 받은 무스타파는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조대찬 대표님! 내가 거기 가고 있으니까 꼼짝 말고 계십시오.”

“무스타파, 오전에 바쁘시다고 하셨죠. 저도 일정이 바쁜 사람입니다. 마냥 기다릴 입장이 아닙니다.”

“금방 간다고요!”

“바레인에서 바로 두바이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조 대표님!”

“지금 확정을 해주십시오. 합작회사의 지분 51%를 우리가 가져야겠습니다.”

무스타파는 한숨을 팍 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합작회사와 별도로, 로튼 프룻츠의 사우디 현지법인에 대한 승인도 즉각 이뤄졌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대신 두바이와의 협상은 최소 1년 뒤로 미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껏 왕세자가 직접 낚은 고기를 두바이에게 맨입으로 제공하면 체면을 구긴다.

대찬 역시 사우디 측의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협상이란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니까.

“좋습니다. 두바이 일정은 취소하죠. 협상이 마무리되면 바레인에서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휴.”

진정성이 가득 담긴 무스타파의 안도의 한숨이 대찬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했다.

무스타파는 정말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대찬에게 다가왔다.

“정말 사람 진땀나게 하시는군요.”

“무스타파는 사우디로 불러놓고 제대로 상대 안 해주시면서 이미 제 땀 한참 빼놓으셨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 솔직한 협상이 가능하겠군요.”

“네, 모쪼록 좋은 방향으로 결과를 냈으면 합니다.”

무스타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아까 전의 통화로 로튼 프룻츠는 좋은 방향의 결과를 얻으셨습니다.”

“하하, 사우디 측에도 좋은 결과가 있어야겠죠.”

“자, 얼른 얘기 나누시죠. 왕세자 전하의 심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스타파는 부랴부랴 대찬을 협상장으로 이끌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럴듯한 협상장은 마련되지 않았다.

협상은 근처의 피자헛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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