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86화
“감사합니다!”
“변탠가?”
대찬은 미소를 짓고 진위생을 바라봤다.
진위생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의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제발, 제발, 제발.
“진위생 씨.”
“…네?”
“진위생 씨는 고수혁 씨 출장 가 있는 동안 고수혁 씨 할머니 잘 모셔요. 알겠습니까?”
“넵! 저희 어머니보다 더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살생부 작성 끝났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눈 뜨고 고개 들어서 저승 가는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생존자들은 마피아 게임에서 아침을 맞은 시민들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조대찬, 김산호, 마강국, 고수혁.
사우디 행 4인조가 결성되었다.
* * *
“일 마치고는 호텔에 꼼짝 말고 틀어박혀 있어, 알았지?”
“이영아, 한 번만 더 말하면 열 번째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말하면 들어!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아?”
대찬은 피식 웃었다.
“파푸아뉴기니 밀림에서도 버텼어. 사우디는 껌이지.”
“얼씨구, 그런 사람이 서점에 가서 꾸란을 다 사 오셨어요?”
“사우디에 있는 동안 나는 무함마드의 제자야. 이슬람에서는 아멘이라고 안 하고 아민이라고 한대, 알고 있었어? 아—민.”
윤이영은 시시껄렁한 대찬의 말에 대꾸해줄 여유가 없었다.
“하루에 세 번 전화하고. 왕세자 전하가 부르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뛰어나가고. 술 먹지 말고.”
“사우디에서 술 먹으면 사형이야.”
“그러니까 먹지 말라고!”
윤이영은 대찬보다도 더 불안에 떨었다.
대찬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사랑해.”
“…사랑해.”
윤이영도 대찬의 등을 꽉 결박했다.
그녀의 몸이 살짝 진동하는 것이 대찬의 온몸으로 느껴졌다.
대찬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윤이영은 공항까지 따라 나와 출국장으로 대찬이 사라질 때까지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대찬은 그녀가 그 자세 그대로 돌아올 때까지 서 있을까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로튼 프룻츠와 마찬가지로 필래 역시 사우디 정부로부터 계약을 따냈다.
서원웅은 아랍 주재원 중 한 명을 대찬을 위해 통역으로 붙여주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대찬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의 킹 할리드 국제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그를 위해 사우디 왕실은 고위관리를 파견해 맞이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조대찬 대표님.”
“이렇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조대찬 대표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협상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네, 양쪽이 만족할 수 있는 협상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희도 조대찬 대표님의 지난 행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녹록하지는 않지만 말씀은 잘 통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찬은 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앞으로 머무시는 동안 왕세자 전하께서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할 것입니다.”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한다는 말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사우디 왕실은 대찬 일행을 확실하게 대우했다.
사우디에서 손꼽히는 고급 호텔에 그들이 묵도록 조치해주었다.
기본적인 체류비용 역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대찬과 마강국은 넓은 방을 차지하고, 다른 이들도 역시 2인 1조로 편안한 휴식이 가능했다.
고수혁은 대학을 졸업하고 로튼 프룻츠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울 뿐이었다.
즐거운 사람은 비단 고수혁뿐만이 아니었다.
외국물 좀 먹었다는 김산호도 희희낙락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긴장 좀 하라며 대찬은 한번 쏘아붙일까 했지만 관뒀다.
‘그래, 쉴 때는 맘 놓고 쉬어야지.’
대찬은 이런 사우디 왕실의 호의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호의를 받는다는 건 신세를 진다는 뜻이었다.
협상 상대에게 신세를 져서 좋을 게 없다.
한 치의 손해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접받으면 냉정하게 협상에 임하는 게 어려워진다.
기껏 편의를 봐주고 파격대우를 해줬더니 이렇게 빡빡하게 나오느냐.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런 비합리적인 하소연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찬은 지금의 파격적인 대우가 험난한 협상의 예고편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대찬은 호텔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잔뜩 들뜬 김산호와 고수혁, 마강국을 멀찍이 바라만 봤다.
고민은 혼자 감당하고, 저들은 일단 즐겁도록 두었다.
새벽 4시.
대찬은 눈을 떴다.
사우디에 와서 생긴 버릇이었다.
여느 이슬람 국가가 그렇듯, 하루 다섯 번 솔랏이라고 불리는 기도 시간이 있다.
메카를 향하여, 아잔이라는 기도 소리에 맞춰 기도를 올린다.
다섯 번의 아잔 중에 첫 번째 아잔은 4시 반에 호텔 바깥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기상나팔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지는 이등병처럼, 대찬은 첫 번째 아잔이 들리기 직전에 눈을 떴다.
알라후 아크바르—
아쉬하두 안 라 일라하 일랄라—
아쉬하두 안나 무함마단 라술룰라—
아쉬하두 안나 알리얀 왈리울라—
얼핏 들으면 염불처럼 들리기도 하는, 구슬프고 처량한 바이브레이션을 들으며 대찬은 세수를 했다.
모든 것이 현대적인 수도에서 이 아잔이 전통의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찬은 객실 안에 비치된 안락의자에 앉아 협상에 필요한 자료들을 뒤적였다.
첫 번째 아잔이 끝나고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사우디 측 인사가 대찬을 방문했다.
“간밤에 잘 지내셨습니까.”
“네, 덕분에.”
“어디 불편하신 건 없고요.”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없습니다.”
대찬은 단순히 그가 간밤에 잘 잤는지 문안인사나 여쭈자고 찾아오는 게 아님을 잘 알았다.
전장에서는 총으로 싸우지만 협상 테이블에서는 정보로 싸운다.
혹여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익한 정보를 얻을까 싶어 대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대찬은 그에게 콩고물은 던져주지 않았다.
그러나 철통같이 수비에만 치중하는 건 본전치기밖에 되지 않았다.
능숙한 사람은 그걸 역이용하기도 한다.
그에게서 식사를 대접받은 대찬은 식후 티타임을 가졌다.
대찬의 기색을 살피던 그가 대찬에게 물었다.
“여독은 어느 정도 풀리셨습니까.”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이제 슬슬 협상을 진행하셔야죠.”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벌써 귀국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일주일이요?”
“네, 사전에 말씀드렸는데.”
“아아, 그러셨죠. 날짜로는 들었는데 일주일 남으셨다니, 시간이 새삼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슬슬 아잔 소리가 이방인인 저한테도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니,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죠.”
사우디 측 인사는 웃음을 지었다.
“그거 기분 좋은 말씀이로군요.”
“일정은 최대한 사우디 측에 맞추겠습니다.”
“예, 그럼 조만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우디 측 인사가 먼저 자리를 뜨자,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따로 앉아있던 대찬의 직원들이 참새처럼 이쪽으로 날아왔다.
김산호가 대찬에게 물었다.
“아니, 저 인간들 왜 이렇게 뜸을 들인데요?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니까.”
“안 믿는 거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는 걸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홀짝였다.
“내가 일부러 타이트하게 얘기한다고 믿는 거야.”
이런 쪽으로는 별 관심 없는 마강국의 귀에는 지루한 얘기들일 뿐이었다.
따분한 표정으로 자리만 채우고 있던 그는 고수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고수혁, 너 담배 피우냐?”
“네? 아, 아뇨…….”
대찬은 마강국에게 찌릿 눈빛을 쏘았다.
“야,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참 나, 대표님, 얘가 무슨 애예요. 얘 수염 자국 생긴 것 봐. 아우, 징그러.”
대찬은 가볍게 혀를 차고 다시 김산호에게 말했다.
“시간은 우리 편이야.”
“이미 사우디는 칼을 빼 들었으니까요. 낙장불입. 우리가 배짱 좀 튕겨도 웬만하면 받아줘야 할 입장이죠.”
“아니면 왕세자 입장이 우스워지니까. 그러니 내가 일부러 더 촉박한 척을 하면서 그쪽을 압박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근데 우리 정말 일주일 뒤에 뜨잖아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착각은 자유. 우리는 저쪽이 부를 때까지 기다린다.”
“넵.”
사우디 측은 가볍게 서면 혹은 유선으로 입장만 교환할 뿐, 치열한 논의에는 돌입하지 않았다.
사우디의 입장은 사우디 측 자본 51%와 로튼 프룻츠의 자본 49%를 투입하여 회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내가 머리에 총 맞았냐, 그걸 받게.”
대찬은 그들의 입장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남 좋은 일만 실컷 하고 정작 열매는 저들이 꿀꺽 해치우는 수가 있었다.
아니, 그럴 것이 확정적이었다.
대찬은 로튼 프룻츠 51%, 사우디 측 49%였다.
사우디는 또 그걸 우리 돈 들여서 남 좋은 일 한다고 원치 않았다.
누가 됐든 51%를 가져가야만 했다.
다른 부분들은 다 부차적인 사항에 불과했다.
이 상태로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대찬이든 사우디든 한쪽의 발언권이 커지는 계기가 필요했다.
대찬은 그걸 시간이라고 봤다.
만일 이 판이 엎어진다고 해도, 로튼 프룻츠의 타격은 크지 않았다.
이미 왕세자가 이맘(이슬람의 예배 인솔자) 몇 명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비도축육의 율법적 해석을 마친 상태였다.
사우디가 이미 대외적으로 종교의 빗장을 열었다.
그러니 굳이 이 나라가 아니어도 척박한 사막지대에서 식수난·식량난에 허덕이는 이슬람 국가들의 좋은 대안식량이 될 자격을 얻은 셈이었다.
이미 터키와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에서는 로튼 프룻츠에 논의의 장을 열자고 제안한 상황.
이렇듯 사우디와의 협상이 불발돼도 아쉽긴 하지만 치명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우디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제때 논의를 완수하지 못하면, 미스터 에브리싱이라던 아흐마드 왕세자의 입지가 우습게 된다.
그러니 대찬은 불과 일주일 남은 시간에도 여유로울 수 있었다.
사우디는 자신들 역시 아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서둘러 논의에 착수하지 않고 짐짓 여유를 부렸다.
수박 겉핥기만 하며 허송세월하는 와중.
대찬은 협상테이블 바깥의 외부일정을 소화했다.
사우디 왕실은 그에게 국영방송에 출연하여 비도축육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대찬은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국영방송국인 알 사우디야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담을 나눴다.
“비도축육은 같은 양의 고기를 얻기 위해 들어가는 자원의 1퍼센트만 있으면 됩니다. 물, 전기, 토지, 기타 등등 모든 자원에서 말입니다. 비도축육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 여러분의 식생활에 커다란 혜택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첨예한 이슈가 터졌지만 수도 리야드의 거리는 평화로웠다.
한국 같았으면 죽일 놈 살릴 놈 외치며 거리와 광장을 점령하고 시위가 벌어져도 골백번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리야드의 거리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따금 눈에 띄는 외모의 대찬을 보고 현지인 몇몇이 숙덕거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협상과는 관계없는 외부일정만 소화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호텔에서만 보내자, 마강국은 혀를 내두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럴 거면 사흘 일정으로 왔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힘을 빼놓을 대로 빼놓은 다음 협상하겠다는 거지.”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런다고 조대찬 힘이 빠지나.”
“그러게, 난 오히려 힘이 솟네.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건 저쪽에서 엄청 신경 쓰고 있다는 거니까.”
“협상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거겠지.”
대찬은 마강국을 기특한 눈으로 흘긋 봤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내가 개새끼냐?”
마강국은 꿍얼대며 담뱃불을 붙였다.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표님 머무는 객실에서 담배연기 피우는 비서가 세상천지 어디 있냐?”
“지금은 비서가 아니라 막돼 처먹은 네 친구로서 피우는 거다. 됐냐?”
대찬은 기가 막힌 듯 픽 웃었다.
그렇게 시일을 보내고 사우디 측에서 대찬에게 만남을 제의한 건 대찬의 귀국 이틀 전이었다.
사우디 측 협상단은 대찬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찾아왔다.
왕실이 거의 대부분의 자금을 대고 있는 한 헤지펀드가 대찬의 파트너였다.
협상의 대표는 자기를 무스타파라고 소개했다.
“조대찬 대표님, 귀국까지 이틀 남으셨다고.”
“그렇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무스타파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