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485화 (485/556)

난 할 수 있어 485화

대찬은 두 시간 동안 아흐마드 왕세자를 면담했다.

다른 총수들보다도 훨씬 접견 시간이 길었다.

대찬만 밖으로 나오면 퇴근할 수 있는 기자들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뭐야? 삼라는 30분 만에 끝났고, 5대 그룹 중에 제일 길었던 필래도 1시간인데.”

“조대찬 이 인간은 아무튼 어그로 끄는 데는 선수야, 선수.”

“그러게 말이다. 사막나라 왕자님이랑 2시간 동안 무슨 할 얘기가 있냐.”

그렇게 피곤한 목소리들이 오가는 와중,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조대찬 나온다!”

“어? 어어!”

영빈관 앞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푹푹 쉬던 기자들은 일제히 일어나 카메라를 들었다.

대찬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표정을 한 채 밖으로 나왔다.

어김없이 기자들이 그를 에워쌌다.

대찬은 그들이 질문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흐마드 왕세자와의 접견은 제 입장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어떤…….”

대찬은 기자가 질문을 쏟아내는 걸 원천 차단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저희 로튼 프룻츠는 사우디 왕실과 합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비도축육 생산설비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유통과 판매는 사우디 왕실이 세운 기업이 독점적으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대찬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비도축육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습니다. 이는 사우디 왕실에서 전적으로 해결해주겠다는 답변을 얻었습니다. 저희 로튼 프룻츠는 관련하여 어떠한 문제도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왕세자가 이런 전격적인 제안을 한 이유는…….”

대찬은 역시 기자의 두 번째 시도도 차단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기자 여러분, 긴 시간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찬은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고는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대찬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윤이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찬은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영아.”

“잘된 거, 맞지?”

대찬은 피식 웃었다.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응, 맞아. 잘됐어.”

“뭐가 정답이었어? 소고기야 돼지고기야.”

“소고기.”

“그럼 마지드 그 새끼가 나한테 구라 친 거였어?”

대찬의 대답을 듣자마자 윤이영의 입에서 거친 언어가 쏟아졌다.

대찬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말 좀 예쁘게 해.”

“아니, 화나잖아. 뭔데? 그놈은 왜 나한테 거짓말한 건데?”

“그건 알 수 없지. 그 나라 내부사정이니까.”

윤이영은 혼자서 궁싯거리며 몇 마디 더 마지드의 욕을 하더니,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소고기를 딱 맞혔어?”

“내가 맞혔나. 윤이영이 맞혔지.”

대찬은 윤이영에게 공을 돌렸다.

“에이, 뭐 내가 맞혔대, 또.”

윤이영은 대수롭지 않게 부정했지만 내심 으쓱하는 기분이 느껴졌다.

연기로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남편을 속일 수는 없었다.

대찬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리 마누라 안목이 제대로라니까. 누굴 속이려 들어, 잽도 안 되는 게.”

대찬이 한 번 더 윤이영을 치켜세워주자 그녀는 흐히히,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기뻐했다.

“바로 집에 들어올 거지? 오늘은 특별히 내가 저녁 차려줄게. 큰일 했으니까.”

“오케이, 이왕이면 와인도 한 병 준비해줘. 아까부터 엄청 마시고 싶었거든.”

“알았어.”

윤이영은 콧노래를 부르며 전화를 끊었다.

대찬도 웃으면서 핸즈프리를 귀에서 뺐다.

윤이영이 대찬의 결정에 큰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다.

아마 마지드는 대찬 대신 윤이영을 선택하는 것이 속이기에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배우의, 그것도 대상 배우의 눈썰미란 대찬보다 우월했다.

윤이영의 판단이 전부는 아니었다.

‘석우룡한테 빚을 졌네. 본의 아니게.’

석우룡의 조언은 대찬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찬은 그의 면전에서는 시큰둥하게 대꾸했지만 실은 그가 발음하는 한 글자, 한 글자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대찬은 그가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고의로 대찬이 조언의 반대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건 석우룡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마지드를 신뢰하게 하려면 더 나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대찬이 왕세자의 분노를 야기하도록 해서 그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

석우룡은 지극한 현실주의자였다.

대찬을 인간적으로 미워하고 혐오할 수 있지만, 그저 골탕이나 먹이자고 불러다 그런 얘기를 흘리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잘못되면 자기도 날아가거든.’

석우룡 장관을 만날 때, 대찬의 주머니에는 녹음기가 항상 켜져 있었다.

석우룡 장관의 주머니도 마찬가지.

모든 대화는 언제든 폭탄으로 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일 잘못된 정보를 흘려 일이 잘못되면.

로튼 프룻츠가 크게 기우뚱하거나 더 일이 커져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하면.

그 뒷감당을 석우룡 장관이 해낼 재간이 없었다.

코 풀려다가 코가 뽑히는 수가 있었다.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나중에 로튼 프룻츠의 대성공에 자기가 일조했다는 생색거리로 삼으려고 했다.

그리고 차기 총선에서 대찬을 아군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립으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그게 더 개연성 있는 추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대찬은 아흐마드 왕세자를 만나러 가기 전, 만몽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거사님, 이번에 한국 온 사우디 왕세자 보셨어요?”

“봤지. 네놈하고 1 대 1로 만난다고 하니까 어떻게 생긴 상판대기인지 봤지.”

“무모한 모험을 즐기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계속 유리한 입장을 만들면서 압박해 들어가는 사람일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인마. 내가 점쟁이냐?”

“점쟁이는 아니라도 그 비슷한 부류시잖아요.”

“새까맣게 어린놈이 누굴 보고 부류, 부류 거려? 좀 잘 나간다고 이젠 숫제 안하무인인 거냐?”

“아이, 그러지 마시고요.”

대찬의 집요한 요구에 만몽은 툭 던지듯 말했다.

“모험은 잃을 것 없는 놈이 하는 거야. 있는 놈은 얻을 것보다 잃을 걸 먼저 생각해.”

“네?”

“바빠! 끊어.”

만몽거사는 정말 그렇게 일갈하고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래도 항상 해주실 말은 다 해주시고 끊으신다니까.’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윤이영의 직관과 석우룡의 조언으로 기울었던 대찬의 판단에 만몽거사의 식견이 쐐기를 박았다.

“Beef.”

대찬이 그 한 단어를 입에 올리기까지 그런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논의가 마무리된 후, 아흐마드 왕세자는 대찬에게 말했다.

“조 대표님이 이 자리를 떠난 그 시각부터 우리의 논의는 세상에 공개됩니다.”

“예.”

“이 다음부터는 속도전입니다. 저는 큰 보폭으로 나아갈 겁니다. 로튼 프룻츠가 보폭을 맞춰주지 않으면 나는 위태로워집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자님의 뜻이 이뤄져야 저희 역시 20억 무슬림을 고객으로 유치할 수 있습니다.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겁니다.”

아흐마드 왕세자는 대찬에게 악수를 건넸다.

대찬은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미스터 에브리싱.

모든 것을 다 해내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아흐마드 왕세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는 단순히 고기를 사고 파는 행위가 아니라 나라의 근본을 뒤흔드는 격변의 시작이었으므로.

아흐마드 왕세자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가자마자, 대찬 역시 사우디진출 TF를 구성했다.

대찬이 직접이 TF의 장을 맡았다.

대찬을 대체할 인력이 로튼 프룻츠 안에, 아니 대한민국 안에 아무도 없었다.

신호탄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울려 퍼졌다.

다가올 일들이 그야말로 격변임을 알리듯, 신호탄은 잔혹했다.

진위생이 우당탕 대표실 안으로 들어와 급히 알렸다.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

평소 같았으면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했을 대찬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질책부터 하지 않았다.

진위생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사우디 상공부 차관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뭐라고요? 설마 그 차관이 마지드 알 아사프예요?”

진위생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죄목은.”

“반역… 이랍니다.”

반역.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웬만해선 듣기 어려운 단어였다.

아흐마드 왕세자는 급한 숙제를 하듯 마지드를 법정에 세우자마자 사형에 처했다.

방식은 공개 참수형.

공개처형의 단골 장소인 ‘찹(chop·토막내다)찹광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곳에서 마지드는 목이 잘렸다.

대찬이 불과 얼마 전에 눈빛을 교환했던 마지드였다.

그런 그가 형장도 아니고 광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니.

대찬에겐 퍽 충격적이었다.

왕세자가 사우디 국민의 안정적인 식자재 공급과 맛있는 음식으로 행복을 누릴 권리를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섰는데.

일개 차관 따위가 이를 방해했다.

중요한 교역 상대인 한국의 기업인에게 돼지고기를 입에 담으라.

그런 끔찍한 반역인 동시에 배교행위를 했다.

그게 반역죄의 소상한 내용이었다.

-“마지드 차관은 왕세자 전하의 최측근으로 기용되었으나 실은 수구적인 성직자의 하수인이었습니다. 매우 분노합니다.”

사우디 왕실 대변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마지드의 처형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알렸다.

돼지고기를 외치다가 찹찹광장에서 참수당한 마지드 빈 이브라힘 알 아사프.

외신은 ‘폭찹(porkchop·조각낸 돼지고기를 구워 소스에 곁들여 먹는 음식) 차관이 처형당했다’고 보도했다.

대찬은 쓴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찌릿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광장에 모여든 사우디 국민들이 돌을 던지며 마지드 차관을 욕보였고, 목이 잘린 다음에는 환호성을 지르며 왕세자를 찬양했답니다.”

“…그랬겠죠. 이 이후로 비도축육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특히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마지드와 같은 부류로 묶여 폭찹이 되겠군요.”

“예, 아마도…….”

“우리도 수틀렸다가는 저 꼴 나는 수가 있어요. 사우디의 망나니는 외국인이라고 봐주지 않으니까요.”

“무섭습니다.”

“네, 무섭네요.”

대찬과 진위생은 동시에 진저리를 쳤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신정국가이며 왕정국가이다.

대찬은 새삼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대찬은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자마자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발급받기 까다롭기로 소문난 사우디 비자가 일사천리로 발급되었다.

대찬은 경이로운 속도로 준비를 마치고 사우디로 떠났는데, 그 잠깐 사이에도 비도축육 도입에 반대하는 성직자 다섯 명이 찹찹광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사우디에 혼자 떠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는 논의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결국 로튼 프룻츠 직원 몇몇을 대동해야만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직원들은 대찬의 눈을 설설 피했다.

결국 대찬은 자원받기를 포기하고 직접 지목해야만 했다.

그는 사무직 전 직원을 모아놓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갈 사람은 가야지.”

“대, 대표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무섭잖아요. 그냥 갈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사우디 갈 사람이라고 해주세요.”

김산호는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대찬은 그의 의견을 즉각 수용했다.

“그래, 내가 좀 배려가 없었네. 역시 산호가 내 빈틈을 잘 메우네.”

“…예?”

“김산호, 가자.”

“아악!”

김산호는 머리를 싸쥐고 절망했다.

이 순간, 그의 눈에 비치는 대찬은 갓 쓰고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저승사자와 다름없었다.

대찬은 덤덤히 다음 타자를 지목했다.

다른 직원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속으로 믿지도 않는 주님을 찾았다.

마강국 역시 덩치에 맞지 않게 눈을 질끈 감고 덜덜 떨었다.

“당연히 가야 될 사람이 쓸데없는 희망을 품고 있네. 마강국, 갑시다.”

“잉…….”

“난 홍은주 씨를 데려가고 싶은데.”

대찬의 말에 얼음공주 홍은주의 어깨도 움찔했다.

대찬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워낙 여자한테는 잔혹한 나라라 어쩔 수 없이 뺄게요.”

휴, 홍은주는 본능적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술자가 필요한데, 은 소장님이나 싱 전무님이나 필수인력이라 장기간 출장은 불가능해요. 대신 고수혁.”

“예? 저, 저요?”

“그래요, 당신. 갑시다.”

고수혁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얼굴에 홍조를 띠며 웃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기분에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