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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84화 (484/556)

난 할 수 있어 484화

“이건 조 대표의 이익이 걸린 문제이지만 내 이익이 걸린 문제이기도 해.”

“예, 제가 잘못된 선택으로 크게 한번 헛스윙을 하면 장관님의 재선에 유리하겠지요.”

“어허, 자꾸 삐딱선 타지 말게. 쓸데없는 감정 소모 하지 말자고.”

대찬은 대답 대신 술을 넘겼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안주는 차갑게 식어만 갔다.

석우룡 장관은 최대한 어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잘돼야 나도 농축산부 장관으로서 생색을 낼 수 있어. 그리고 자네와 관계 개선의 물꼬도 틀 수 있고.”

“관계 개선이라.”

“나를 믿고 믿지 않고는 전적으로 자네 선택에 달렸네.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겠지. 지금 내가 하는 이 말이 호의였는지, 악의였는지.”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더 해도 조 대표의 판단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겠나?”

“예.”

석우룡 장관은 씁쓸히 웃으며 잔을 넘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게.”

“그럼, 이만.”

대찬은 일말의 미련 없이 일어나 자리를 떴다.

석우룡 장관은 피식 웃으며 거푸 잔을 넘겼다.

대찬은 석우룡 장관의 앞에서는 단호한 태도만 유지했다.

하지만 마음은 단호하지 못했다.

“망할 노인네. 사람 속만 더 어지럽혀 놨네.”

석우룡 장관의 조언으로 대찬은 더욱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졌다.

대찬은 택시를 잡아타고 흥읍의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의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우디 아흐마드 왕세자가 다음 주 방한하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습니다. 이번 회담에서는 최근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건 아흐마드 왕세자의 숙원사업을 중점적으로…….

대찬은 콧김을 내쉬며 카시트에 몸을 묻었다.

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

Beef or pork.

쇠고기냐 돼지고기냐.

그것이 문제로다.

쇠고기, 돼지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대찬의 뇌리에 고기들만 기생충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금껏 쉽게 답을 주었던 직관이 먹통이 된 전화처럼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만 지나갔다.

그리고 사우디 아흐마드 왕세자가 한국 땅을 밟았다.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여러 번 회담을 하고.

양해각서에 사인을 하고.

대통령과의 일정을 마친 아흐마드 왕세자는 마지드가 일러주었던 대로 한국 경제인들과의 만나겠다고 밝혔다.

진위생이 대찬에게 와서 보고했다.

“사우디 왕세자가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네, 응해야죠.”

“왕세자의 제의를 받은 회사들은 진짜 몇 군데 안 되더라고요. 삼라, 대연, 경선, 락희, 필래 5대 그룹뿐이에요.”

“거기에 우리만 추가?”

진위생은 잔뜩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5+1이라고 하더라고요. 5대 그룹에 우리가 끼었다고.”

“그렇군요.”

“진짜 대박 아닙니까. 우리 대표님이 저 회장님들하고 동등한 입장이 된 거 아닙니까.”

“동등은 무슨.”

대찬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진위생은 자기만 들뜬 모습에 민망해졌다.

평소의 대찬이라면 은근히 이 분위기를 즐겼을 텐데, 가스 불 켜놓고 나온 엄마처럼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대찬은 이마를 쓸며 진위생에게 말했다.

“일정은 전적으로 왕세자 측에 맞춘다고 전하세요.”

“예.”

“왕세자 면담 끝날 때까지 서울에 머물 거예요. 회사 일은 한태윤 이사님께 일임하고 진위생 씨는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보고해줘요.”

“예… 알겠습니다.”

“나가보세요.”

“네, 대표님.”

진위생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대표실을 나갔다.

대표실을 나선 그는 김산호를 붙들고 슬쩍 물었다.

“대표님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내근비서는 진위생 씨이시잖습니까. 진위생 씨가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왜요?”

“아니, 왕세자랑 1 대 1로 만나는데 하나도 안 기뻐하셔서.”

김산호는 키득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무서우셔서 그러시는 거 아닐까요?”

“무, 무서워서?”

김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 정도 거물하고 만나는 건 처음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아흐마드 왕세자라는 사람, 자기 사촌도 헬기 사고로 위장해서 죽여 버리는 사람이라잖아요. 나 같아도 무섭겠네요.”

“조 대표님도 사람이네요.”

“당연하죠.”

남의 속도 모르는 둘은 큭큭 웃었다.

왕세자와 접견하기 위해 5대 그룹 총수들과 대찬은 서울에서 5분 대기조가 되었다.

그들이 괜히 을을 자처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흐마드 왕세자는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의 실질적 소유주였다.

그는 국영 석유기업을 주식시장에 상장시켜 국가의 체질을 바꿀 종잣돈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이번 방한에서도 최소 10조에 달하는 돈 폭탄을 뿌리고 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니 대통령에게도 시큰둥하다는 총수들이 바짝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의 호출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서원웅은 대찬이 서울에 있는 동안 필래호텔에 머물도록 해주었다.

그 역시 대찬과 같이 5분 대기조 신세였다.

둘은 필래호텔의 스위트룸에 마련된 응접실에서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대찬은 웃으면서 뜨뜻한 차를 홀짝였다.

“이럴 땐 차보다는 와인 한 잔이 당기는데.”

“왕세자 전하께서 술 안 자시는 무슬림이시라. 혹여 술 냄새 풍겼다가 몇 조짜리 계약 날아가면 어떡해.”

“하긴, 술 한 잔 값으로 몇 조는 너무 아깝지.”

대찬은 피식 웃었다.

“이번에 사우디 리야드 외곽에 신도시를 건설하는데, 필래건설이 꼭 좀 따왔으면 하거든.”

“언변 좀 잘 발휘해야겠네. 그 큰 덩어리 먹으려고 다른 총수들도 달려들 테니.”

서원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그 음흉한 양반들 제치고 따낼 수 있을지.”

“근데 서청수 회장님은 안 오시고 네가 왔네? 요즘 통 안 보이셔.”

“그러게 말이야. 이럴 때는 좀 나서주셔도 되는데 나를 너무 믿으시는지.”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찬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게 마냥 기뻐 보이지만은 않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서원웅의 등을 다독였다.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잘할 거야.”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가 누굴 위로할 입장이 아닌 걸 알고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서원웅은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불렀을까? 로튼 프룻츠 불렀다는 건 사우디에서 비도축육을 취급하겠단 소린데…….”

“그렇겠지, 커피 사가려고 날 부르진 않았을 테니까.”

“비도축육이라, 그 동네에선 많이 민감할 텐데…….”

대찬은 자기 속내를 털어놓지도 못하고 웃기만 했다.

왕세자 접견은 재계 순위대로 이뤄졌다.

5대 그룹의 말석인 필래의 서원웅은 제법 오래 호텔에 대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차례가 왔다.

서원웅의 비서가 들어와 알렸다.

“실장님,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서원웅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강국이랑 같이 왔어?”

“아니. 같이 왔으면 여기 앉혔지. 혼자 왔어.”

“같이 타고 갈래?”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차 가져왔어. 네 차 뒤에 붙어서 바로 출발할게.”

“그래, 그럼.”

서원웅과 대찬은 함께 호텔 응접실을 나섰다.

왕세자와의 접견이 이뤄지는 영빈관에는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특히 5대 그룹 총수들 틈바구니에 뜬금없이 끼어든 대찬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대찬은 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쇠고기와 돼지고기.

아흐마드 왕세자에게 건넬 단어를 고르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제 차라리 꽃 한 송이를 꺾어 꽃잎을 떼며 둘 중 하나를 고르고 싶은 지경이었다.

대찬은 혼자 팔짱을 끼고 앉아 차 안에서 오래 대기했다.

‘비프, 포크, 비프, 포크, 비프, 포크…….’

1시간 넘게 서원웅이 단독으로 아흐마드 왕세자와 접견하는 동안.

대찬은 그 두 단어만을 되뇌고 되뇌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져서 흘끗 밖을 바라보니, 서원웅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기자들이 그에게 달라붙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게 대찬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내 차례네.”

대찬은 흡, 숨을 들이쉬고 겉옷의 단추를 여몄다.

그리고는 홀로 차 밖으로 나왔다.

비프 오어 포크,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결정은, 아흐마드 왕세자의 눈을 보고 직관으로 내릴 생각이었다.

대찬이 차에서 내리자 서원웅에게 달려들었던 기자들의 절반이 뚝 떨어져 이쪽으로 달려왔다.

대찬은 굳은 표정으로 갈 길을 걸어갔다.

기자들이 대찬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오늘 왕세자의 초청을 예상하고 있었습니까?”

“아흐마드 왕세자가 비도축육을 수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힐까요?”

“이슬람 율법이 육류를 상당히 까다롭게 취급하는데, 조 대표님을 초청한 이유가 뭘까요?”

대찬은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뭘 알아야 대답을 하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대꾸했다.

“왕세자 접견 후, 제가 아는 한도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럼, 들어갈게요.”

대찬은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서원웅과 대찬은 스쳐 지나갔다.

서원웅은 응원의 눈짓을 보냈고, 대찬은 옅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왕세자가 앉아있는 접견실로 향하는 걸음 걸음이 무거웠다.

‘비프, 포크, 비프, 포크…….’

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복도에는 아흐마드 왕세자의 수행원들이 서 있었다.

개중 한 명이 대찬을 향해 웃어 보였다.

마지드 빈 이브라힘 알 아사프.

눈이 마주치자 그는 대찬을 향해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포-오-크.

천사의 도움일까 악마의 속삭임일까.

대찬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안내를 받아 아흐마드 왕세자가 앉아있는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왕세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탁.

문이 닫혔다.

이제 이 공간에는 아흐마드 왕세자, 대찬, 그리고 통역 한 사람뿐이었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왕세자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튼 프룻츠 대표 조대찬입니다.”

“앗 살라 알라이쿰.”

왕세자의 경쾌한 인사에 대찬도 웃으며 대답했다.

“와 알라이쿰 쌀라.”

“앉으세요. 이렇게 뵙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통역이 부드러운 말투로 통역해주는 덕분에 대찬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왕세자는 주저하지 않고 얘기를 꺼냈다.

“제가 한국 유수의 재벌총수를 만나는 와중에 조대찬 대표님과 만나고 싶어 했던 이유를, 대충은 짐작하시리라 봅니다.”

“예, 비도축육에 관한 논의 때문이겠죠.”

아흐마드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희는 왕세자님의 요구에 응할 준비가 돼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종교와 강하게 결부된 나라입니다. 내가 비도축육을 단순히 식량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예.”

대찬은 대답하면서 아흐마드 왕세자를 바라봤다.

비프, 오어 포크.

“나는 이 사업을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보수적인 성직자들과의 전장으로 삼을 겁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왕실의 수호자였지만 지금은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입니다.”

“예…….”

“자, 이 상황에서 나는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쇠고기 비도축육을 들여와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치를 것이냐. 아니면 돼지고기 비도축육을 들여와 판을 크게 벌이느냐.”

대찬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자 아흐마드 왕세자는 대찬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조 대표님이 사우디의 왕세자라면? 무슨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Beef or pork.”

대찬은 아흐마드 왕세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왕세자는 씩 웃었다.

그는 대찬이 대답할 때까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을 태세였다.

대찬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딱 한 낱말만을 발음했다.

“Beef.”

“…쇠고기를요?”

“예, 제가 왕세자님이라면 쇠고기를 선택할 겁니다.”

아흐마드 왕세자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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