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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83화 (483/556)

난 할 수 있어 483화

마지드는 그런 윤이영의 눈을 슬쩍 외면하면서 대꾸했다.

“죽이지 않고 얻는 비도축육을 고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

“우리는 가축에게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유제품이나 털, 뿔 같은 거요. 그것들의 공통점은 죽이지 않고 얻는다는 겁니다. 일종의 추출물이지요.”

“추출물…….”

“네, 비도축육도 세포를 추출해서 배양한 다음 얻어지는 먹거리 아닙니까.”

윤이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해석하기에 따라, 젖을 짠 다음 발효 시켜 치즈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요…….”

“하지만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들겠죠.”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렇겠죠.”

“왕세자 전하께서는 그들을 숙청할 계획을 갖고 있으십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려는 자애로운 왕실의 뜻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말이죠.”

달리 말하면 대찬의 손으로 그들을 숙청할 원인을 제공하라는 뜻.

윤이영의 몸이 저절로 긴장되었다.

“이 제안, 거절해도 괜찮은 건가요?”

“조대찬 대표는 사우디 왕가를 섬기는 몸이 아니니, 거절한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패기롭고 노련한 사업가가 놓칠까요?”

“…….”

“계획은 비밀스럽고 전격적으로 이뤄질 겁니다. 만약 이 제안을 조대찬 대표가 수락한다면, 로튼 프룻츠는 20억 이슬람 신도를 고객으로 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저 심부름꾼 역할만 잘 수행하면 될 것을.

자꾸 시시콜콜 질문을 던져오는 그녀가 마지드는 성가셨지만, 친절한 미소를 띠며 응대했다.

“말씀해보세요.”

“다음 주에 왕세자께서 방한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럼 그때 알려주셔도 늦지 않을 텐데…….”

마지드는 미소를 띠었다.

“늦습니다.”

“어째서죠?”

“왕세자 전하께서는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습니다. 돼지고기 때문이 아니라 조대찬 대표 때문에.”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왕세자 전하께서는 조대찬 대표가 담대한 파트너이기를 바라십니다. 성직자들의 퉁명스런 반항에도 흔들림이 없는.”

“남편을 변호하자면 그런 유약한 사람은 아니에요.”

마지드는 미소를 띠었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된 거 아닌가요?”

“하지만 왕세자 전하께서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시죠. 큰일을 하시는 분들은 대개 그럽니다.”

“그럼 어차피 확인하게 되실 텐데요? 이렇게 미리 와서 언질을 해주시는 이유를 질문 드렸는데. 의문은 그대로예요.”

“역시 담대한 남편 옆에는 현명한 부인이 있기 마련이군요.”

“대답을 들려주세요.”

“저는 우리나라를 변혁하려는 왕세자 전하의 뜻을 강력히 지지합니다. 왕세자 전하보다도 더 강경한 입장이지요.”

“그런데요?”

“저는 왕세자 전하의 결단을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귀띔을 해드리려는 겁니다.”

“…….”

“조대찬 대표가 수동적인 반응만 보인다면 협상은 순탄치 않을 겁니다.”

“그럼…….”

“조대찬 대표의 입에서 먼저 pork, 돼지고기라는 네 글자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왕세자 전하의 신임을 얻을 겁니다.”

“만일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되죠?”

“주저하는 파트너를 담대하다고 생각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불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는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습니다.”

“…….”

“아마, 조대찬 대표도 그럴 겁니다.”

윤이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니에요.”

“예, 물론.”

“일단 전달은 하겠습니다. 결론은 언제 말씀드리면 될까요?”

“다음 주에 왕세자 전하께서 방한하십니다. 따로 경제인들과의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그럼 그때…….”

마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조대찬 대표도 이례적인 초대장을 받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죠.”

마지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분명하게 강조했다.

“조대찬 대표의 입에서 먼저 돼지고기란 말이 나와야 합니다. p, o, r, k. pork.”

“…알았어요. 이만 들어가실까요. 바깥바람이 쌀쌀하네요.”

“그러시죠.”

마지드는 흡족하게 웃었다.

윤이영은 만찬에서 돌아오자마자 대찬에게 이를 알렸다.

대찬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돼지고기 비도축육?”

“응, 내가 기억하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전했어.”

“흐음….”

“아, 특히 pork라고 말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어. 강박처럼.”

“그래, 뭐 아주 일리 없는 말은 아니야. 최소한 그 나라 사정에 밝지 않은 내가 생각했을 땐.”

“하지만 좀 위험하지 않겠어? 세포를 추출해서 배양한 거니까 추출물이다. 이건 논리가 좀 비약해.”

대찬은 윤이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흐마드 왕세자에 대한 정보는 나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어. 그 양반 별명이 뭔지 알아?”

“몰라.”

“미스터 에브리싱. 모든 걸 자기 맘대로 해치운다는 거야.”

윤이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무리해서 밀어붙인다면 정치적 부담은 있겠지만, 아주 개연성 없는 얘기는 아니야.”

“그럼 이거, 받아들일 거야?”

대찬은 즉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래도 이상하지? 왕세자가 묻기도 전에 내가 먼저 돼지고기를 입에 담으라니.”

“나 붙들고 그렇게 말해봤자 내 머리만 복잡해져.”

“고작 그렇게 하라는 이유가 담대한 파트너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마지드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만 해도 윤이영의 머리와 마음은 복잡했다.

이미 과부하가 걸렸다.

이것저것 재는 대찬의 계산에 유익한 도움을 줄 메모리가 없었다.

대찬은 쩝, 입맛을 다시며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그 마지드란 사람 말만 듣고서는 판단할 수 없어. 이러나저러나 일이 잘 안 됐을 경우에 감당해야 할 무게가 장난 아니란 말이야.”

대찬의 말에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왕세자 면전에서 돼지고기 운운했다가 잘못되면 외교문제로까지 번질 수도 있어.”

“최소한 언론에서 날 가만두지 않을 거고.”

“그래도 선택해야 해. 공이 오빠한테 넘어왔으니까.”

“만약 돼지고기 운운하지 않았다가 이 건수를 놓치면 난 속 쓰려서 반년은 드러누워 있어야 돼.”

윤이영은 대찬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왜, 조대찬 씨의 그 비상한 직관으로 딱 찍어버리지?”

“내 두 눈으로 마지드라는 그 인간을 상대했다면 직관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오호라, 핑계 한번 대단해?”

대찬은 웃으면서 윤이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서, 직관을 발휘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뭐?”

“네 직관을 믿어보자.”

윤이영은 허탈한 웃음을 토했다.

“오빠, 난 경영자가 아니야.”

“연기자지.”

“그래! 난 연기자야. 내가 직관 발휘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아니면 내가 찍은 반대로 가려고 그러는 거야?”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선 네가 더 정확할지도.”

“무슨 말이야, 그게?”

“마지드 그 인간, 너한테 연기하고 있었니?”

“…어?”

대찬은 윤이영 쪽으로 상체를 숙이면서 다시 물었다.

“마지드가 연기하고 있었느냐고.”

“…….”

윤이영은 마지드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 눈빛, 손짓을 복기했다.

그녀의 기억이 자신의 질문에 회피하는 마지드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응? 이영아.”

“내 눈을 피했어.”

“그렇다면?”

“분명히 연기였어. 돼지고기도 고기가 아니냐, 결국 돼지 비도축육도 교리 상 금지되는 것 아니냐는 내 질문에 눈을 피하면서 대꾸했어.”

“돼지고기 비도축육은 치즈처럼 가축의 추출물에 불과하다, 그 대답을 하기 전에 시선을 회피했다 이거지?”

“응, 맞아. 분명 내 눈을 피했어.”

“마지드가 연기, 그러니까 거짓말을 했다. 굳이 너한테. 이건 내 판단에 중요하게 작용할 거 같은데.”

윤이영이 황급히 대찬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야. 내 말만 듣고 저지르지는 마.”

“왜? 연기대상 배우 윤이영의 안목이면 믿을 만하잖아.”

“아니야, 몰라. 내 말 믿지 마!”

윤이영의 표정에는 솔직한 곤란함이 묻어 나왔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쓸었다.

“알았어. 네 말만 믿고 무턱대고 결정하진 않을 거야. 그래도 여러 정보 중에 하나인 건 분명해. 믿을 만한.”

“제발 이것저것 따져보고 결정해, 응? 알았지?”

“알았어. 걱정 마. 잘못되더라도 네 책임은 조금도 없어. 네 직관을 믿는 건 결국 또 내 직관이니까.”

대찬은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윤이영의 판단을 깊이 신뢰했다.

반쯤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

그러나 대찬이 그렇게 속 편히 결정하도록 상황이 내버려 두질 않았다.

뜻하지 않게 왕세자의 비밀 지령을 전달하는 중책을 소화한 윤이영을 대찬이 토닥이고 있을 무렵.

이번에는 대찬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은 뜻밖이었다.

대찬은 액정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받지 말까.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전화를 받았다.

“네, 장관님.”

“조대찬 대표, 오랜만이지? 한때는 시시때때로 전화도 하고 밥도 먹고 그랬는데.”

석우룡 장관이었다.

그쪽도 통화가 영 내키지는 않는 듯 불편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나도 조 대표한테 다시 전화할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용건을 말씀하시죠.”

잠깐 망설이던 석우룡 장관은 입술을 뗐다.

“전화로는 조금 그렇고. 내일 오랜만에 밥이나 먹지. 조 대표한테 결코 무익한 제안은 아니야.”

대찬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러시죠.”

다음날, 석우룡 장관과 대찬은 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보통 자리를 가지면 탁 트인 곳을 선호했는데, 둘의 관계가 외부로 내세울 만하지 않게 된 까닭이었다.

석우룡 장관은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마지드 빈 이브라힘 알 아사프.”

“…예?”

“얼마 전에 사우디아라비아 실무단 만찬장에서 조 대표 와이프가 그 사람 만났지?”

“무슨 말씀이신지.”

“마지드. 사우디 상공부 대외무역부문 특별보좌관 말이야.”

“잘 모릅니다.”

대찬이 시치미를 떼자 석우룡 장관은 피식 웃었다.

“낯빛 한번 안 바뀌고 거짓말을 하는군. 그러지 말게. 이미 다 알고 있어.”

“…….”

“조 대표 와이프랑 그 사우디 관료랑 둘이 밖에 나가서 밀담까지 나눴다던데.”

석우룡 장관은 대찬보다 더 정확히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세상에, 그렇습니까라니. 이봐, 조 대표. 정치인 해도 되겠어.”

“제가 장관님께 그걸 확인해줄 의무는 없습니다.”

“없지. 확인해주든 안 해주든 관계없어. 난 조 대표한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해주려고 자리를 마련했으니 말이야.”

“정보라니요.”

석우룡 장관은 대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인간이 조 대표한테 뭘 제안했는지는 몰라도, 그거 독이 든 성배야. 마시지 마. 아니, 성배도 아니야. 그냥 해골물이야.”

“근거가 뭡니까.”

“이봐, 자네가 날 한번 찜 쪄 먹더니 내가 아주 홍어좆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렇게 본 적 없습니다.”

대찬의 말투는 시종 딱딱했다.

석우룡 장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나 3선 국회의원에 야당 요직 두루 거치고 야당 출신으로 장관 된 사람이야. 조 대표보다 양과 질 모두 우수한 채널을 갖고 있다니까.”

“그건 압니다.”

“영업 비밀을 공개할 순 없고…, 아무튼 분명히 일러두겠네.”

“…….”

“마지드 알 아사프, 그가 자네한테 교활한 수작을 부리는 거야. 신뢰하지 말게.”

대찬은 석우룡 장관을 똑바로 바라봤다.

“장관님.”

“그래.”

“장관님의 그 말씀이 그 반대의 결정을 하게 만드는데요.”

“허.”

“입장 바꿔 생각해보십시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내가 당신 엿 먹이려고 이런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게 당연합니다.”

“이봐, 조 대표.”

대찬은 쓰린 속을 강술로 씻어 내리고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나, 자네 싫어해. 자네도 날 싫어할 거고. 근데 이건 사춘기 애들처럼 유치한 감정싸움의 차원이 아니야.”

“그럼 무슨 차원입니까? 사춘기 애들만도 못한 어른들을 한두 번 봤어야지요.”

석우룡 장관도 쓴웃음을 지으며 술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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