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81화
대찬은 뒤늦게 자신을 바라보는 필래 빅스 팬들의 싸늘한 시선을 느꼈다.
“…너 뭐 하냐.”
서원웅 역시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처럼 열광하는 인간들은 정반대편의 기륭 타이거즈 팬들이었다.
그들과 동떨어진 대찬은 섬처럼 외로웠다.
희귀한 장면을 카메라들이 놓칠 리 없었다.
중계카메라와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대찬 쪽을 겨눴다.
“…….”
대찬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스르르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9회말 2아웃.
필래 빅스의 마지막 타자가 초구를 힘없이 건드려 내야 플라이로 아웃되었다.
그렇게 기륭 타이거즈의 1 대 0 승리로 끝났다.
그러자 필래 빅스의 팬들은 탄식과 쌍욕을 번갈아 뱉으며 관중석에서 일어났다.
대찬은 죄인의 심정으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휴대폰으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훑어보던 서원웅은 한숨을 쉬었다.
“기륭 첩자 조대찬과 필패요정 서원웅. 지랄 맞은 짝꿍이 오늘 경기 최고 역적이다. 추천 수 258.”
“…….”
“네가 경기를 망쳤다.”
“죄송합니다…….”
대찬은 혼이 다 빠진 얼굴로 황급히 경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귀신같이 달라붙었다.
삽시간에 대찬은 기자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평소 한국 산업의 미래를 묻고, 정치권과의 대립에 대한 해결책을 묻던 그들이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셨습니까?”
“…….”
“필래 빅스 팬들 사이에서 조 대표님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우롱당했다고. 모욕이라는 표현을 쓰는 팬들까지 있는데.”
대찬은 숨을 뱉으며 적절한 대답을 찾았다.
어설프게 눙치고 넘어가려고 했다가는 예상보다 큰 후폭풍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대찬은 얼굴에 웃음기를 싹 빼고 대답했다.
“우선 저의 경솔한 행동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필래 빅스 팬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대찬은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가 저자세로 나오자, 기자들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의 심기를 툭툭 건드렸다.
“왜 그런 행동을 하신 겁니까?”
“원래 제가 기륭 타이거즈를 오래 좋아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은연중에 개인으로서의 입장이 앞섰습니다. 다만, 오래전부터 필래에 몸담고 있어 필래 빅스 역시 응원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변명은 안 되겠지만. 거듭 사과드립니다.”
“요즘 대중은 말로만 하는 사과에서는 진정성을 잘 느끼지 못하지 않습니까?”
“…….”
대찬은 잠시 침묵했다.
그 잠깐의 침묵 동안 대찬은 최대한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생각을 막 마쳤을 때, 참을성 없는 기자가 대찬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조 대표님?”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말뿐인 사과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대찬이 순순히 수긍하자 기자들은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럼 말로만 사과를 끝낼 생각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대찬은 굽힌 허리를 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기자들은 개구리한테 돌멩이나 한번 던져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들은 대찬의 기다렸다는 듯 당당한 대답에 되레 당황했다.
“그럼 어떻게…….”
“필래 빅스 팬들을 위한 보답 차원에서 행사를 기획하고자 합니다.”
“행사라뇨.”
“오늘로써 필래 빅스의 3연승이 깨져버렸습니다. 일말의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졸지에 필패 요정이 돼버린 서원웅 실장에게도 면이 좀 안 서고요.”
대찬의 말에 기자들은 피식 웃었다.
대찬도 한결 여유를 되찾고 말을 이었다.
“빅스의 모기업인 필래그룹 측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필래의 협조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에 필래에서 고양시의 명물인 옛날 수제버거 가게를 프랜차이즈화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대찬이 갑자기 웬 햄버거 얘기를.
기자들은 어리둥절한 와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휘닉스햄버거. 할머니 한 분이 40년 넘게 운영하시던 지역 명물이죠…….”
“맞아요. 휘닉스햄버거. 고양시를 비롯해서 빅스 연고지 도시 몇 군데에 매장이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최근 레트로 감성이 유행하는 시류에 맞춰서 브랜드를 론칭했다, 뭐 그렇게 알고는 있습니다만.”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님께서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런데 그 말씀은 갑자기 왜 하십니까?”
“저희 로튼 프룻츠가 이 휘닉스햄버거에 비도축육을 무상으로 대거 제공할까 합니다.”
“무상으로요?”
기자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네, 그리고 필래 측에서는 무상으로 제공받은 비도축육으로 햄버거를 만들어 손님들께 무상으로 제공했으면 합니다.”
“잠깐, 한 푼도 안 받고 공짜 햄버거를 제공하라고요?”
대찬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매장이 대부분 빅스의 연고지에 있으니 방문하는 고객들 대부분이 이미 빅스의 팬이거나 아니면 잠재적인 팬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를 조금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원웅 실장님도 필패요정이라는 오명을 만회할 수 있고.”
“금전적 손해가 막심할 텐데요.”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네, 그래서 죄송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빅스의 최대 연승은 3연승. 빅스가 더 오래 연승을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4연승 이후 연승이 지속되는 기간 햄버거를 무상으로 제공할까 합니다.”
“그래도 발표는 필래 측과 상의 후에 하시는 게…….”
이제 오히려 기자들이 대찬의 처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대찬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서원웅 실장 역시 빅스의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한 만큼, 제 의견에 선선히 동의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대찬은 다시 한 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 빅스 팬 여러분께서 오늘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단순히 스포츠 가십거리로 끝날 일이 정규뉴스에 보도될 만한 기삿거리로 발전했다.
대찬의 깜짝 선언은 반만 깜짝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지루한 투수전이 이어지던 와중에 서원웅과 어느 정도 의견을 주고받은 내용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필래 빅스가 4연승을 하는 시점에서 연승이 끝나는 기간, 하루 4시간. 1인당 햄버거 1개 공짜.
서원웅은 대찬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였다.
서원웅은 앞으로는 대찬의 제안을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뒤로는 전화로 대찬을 쪼았다.
“이거, 괜찮겠어? 너무 돈 많이 들어가는 거 아니야?”
“작년 우승팀인 경선 와이번스 기준으로 계산하면 무료 햄버거가 배포되는 날은 총 9일이야. 하위권을 맴도는 빅스는 이것보다 훨씬 적겠지?”
“으음…….”
“5초에 한 개씩 팔기도 힘들겠지만 그렇게 판다고 치자고. 그럼 하루 4시간 팔면 총 2880개. 개당 3천 원씩 치면.”
“864만 원.”
“역시 수학은 네가 나보다 잘한다니까. 현재 휘닉스햄버거 매장 수는 스무 곳. 이걸 곱하면?”
“1억 7천 2백 정도.”
“작년 우승팀 기준으로 무상 햄버거 제공하는 날이 총 9일인데, 지금 시즌 절반은 소화했으니 대충 5일로 잡으면.”
“8억 6천 정도…….”
대찬은 빙긋 웃었다.
“그래, 8억 6천. 개인한테는 큰돈이지만 사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큰돈은 아니지.”
“비용 대비 편익을 따지면 확실히 그래.”
“그리고 패티는 우리 쪽에서 댈 거야. 정가에서 패티 원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진 않겠지만… 우리가 손실의 50퍼센트까지는 감수할게.”
“로튼 프룻츠가?”
“응. 우리가 절반은 감수해야지.”
“그렇다면 비용은 더 줄고… 편익을 따지면 일단 네가 말 한마디 해서 휘닉스햄버거 브랜드 인지도가 확 높아졌어. 그것만으로도 8억 원 어치는 충분해. 그리고 앞으로 빅스가 연승하려고 하자마자 기사가 나오겠지. 공짜 햄버거 어쩌고 하면서.”
“그래, 그 자체로 광고야.”
“그래, 그래…….”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휘닉스햄버거는 모든 지점 직영으로 운영하지?”
“응, 점주들 손가락 빨 걱정은 안 해도 돼.”
대찬은 피식 웃었다.
“잘됐네.”
서원웅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왜?”
“우리한테야 좋은 일이라고 치자. 근데 너한테 좋은 건 뭐야? 단순히 비난 모면하려고 지른 말은 아닐 거 아니야.”
“왜? 빅스 팬 여러분께 너무나도 죄송해서 결정한 일일 수도 있잖아.”
대찬의 변명은 서원웅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퍽이나 잘도 그러겠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문제야. 네 잘못을 왜 회사 돈으로 갚아?”
“하긴 그것도 그러네.”
“야, 그거 횡령이야.”
“횡령이라…….”
“노리는 게 뭐야. 빨리 말해.”
“그 공짜 햄버거 이름 말이야. 로튼 프룻츠 버거로 해줘.”
서원웅은 피식 웃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최대수혜자는 휘닉스햄버거가 될 거야. 우리도 콩고물 정도는 손에 묻혀야지. 그래야 회삿돈을 끌어다 쓰지.”
대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설령 이익을 더 보는 쪽이 로튼 프룻츠라고 해도 들어가는 비용이 적으니 오케이 사인을 내렸을 것이다.
“좋아. 바로 업무협약서 체결하자.”
“좋아, 좋아.”
둘은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필래 빅스가 오늘부로 7연승을 기록합니다! 필래그룹은 휘닉스햄버거 직원들께 꼭 연승수당을 지급하시기 바랍니다. 조대찬 씨도 이러면 상황이 곤란하게 됐군요.”
중계방송의 캐스터는 놀리는 듯한 말투로 활기차게 외쳤다.
“…….”
대찬은 머리를 싸쥐었다.
“미친놈들이 왜 갑자기 잘나가는 건데!”
공짜 햄버거 정책을 시작하자마자 필래 빅스는 마법처럼 잘 나갔다.
파죽의 7연승.
4연승부터 공짜 햄버거를 뿌리니까 4연승, 5연승, 6연승, 7연승.
벌써 나흘째 공짜 햄버거를 뿌렸다.
남은 시즌 5일 정도만 공짜 햄버거를 뿌리면 될 것이라는 대찬의 계산이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휘닉스햄버거의 아르바이트들은 속으로 대찬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필래 빅스의 팬들은 필패요정 서원웅을 필승요정으로 격상시켜주었다.
필래 빅스가 연승을 이어갈수록 대찬의 속은 쓰려만 갔다.
의사는 그에게 위염 진단을 내려주었다.
대찬은 넋이 나간 채로 마강국을 불러 맥주를 마셨다.
마강국은 남의 속도 모르고 제멋대로 지껄였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잘 알아서 더 후벼 파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대표야, 빅스 팬들이 햄버거 이름을 제대로 안 불러준다더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정식명칭은 로튼 프룻츠 버거잖아.”
“그래.”
“근데 그렇게 안 부른다고.”
대찬은 영 못 미더운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조거지 버거.”
푸학.
대찬은 맥주를 먹다가 사레가 들렸다.
“조… 뭐?”
“조거지. 조대찬 거지 만드는 버거. 혹은 조대찬의 거덜 난 지갑 버거, 라고.”
“빅스 훌리건들이 그렇다니까. 상스럽기는!”
“상스럽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지. 이번 7연승으로 얼마가 털렸더라?”
대찬은 그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런 말이 제일 얄미운 거 알지? 틀린 말은 아니라는 둥.”
“얄미우라고 한 소리야.”
속이 새까맣게 타버린 대찬은 맥주를 훌훌 넘겼다.
그날 이후로 대찬은 스포츠토토에서 필래 빅스의 상대편에 돈을 걸었다.
제발 그만 좀 이기라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였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대찬의 바람과는 반대로 필래 빅스는 10연승을 달리고 나서야 한 번 쉬어갔다.
예상보다 지출이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효과 역시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공짜 햄버거는 필래 빅스의 일종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필래 빅스가 상승세를 타면 햄버거 먹겠네, 하는 말이 관용어구로 쓰였다.
야구 문외한 몇몇이 필래 빅스가 아니라 버거스의 줄임말인 벅스로 오해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필래는 막 론칭한 휘닉스햄버거의 인지도를 급상승시켰다.
덤으로 신생아 이미지밖에 없던 필래 빅스에 한 겹 색깔을 입혔다.
로튼 프룻츠는 조거지 버거라는 오명을 쓰기는 했지만 긍정적인 효과에 비하면 큰일은 아니었다.
비도축육으로 만든 햄버거를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먹였다.
그럼으로써 비도축육에 대한 거부감을 완전히 일소시켰다.
로튼 프룻츠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인 건 덤이었다.
그리고 대찬은 겉으로 드러내진 못했지만 필래 빅스의 강력한 안티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