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80화
“역시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어요.”
“왜 또 목소리에 잔뜩 심통이 났어.”
“심통 안 나게 생겼어? 왜 하필 회사를 흥읍 같은 촌골에다 세워갖고.”
“어, 그거 흥읍시민 비하 발언이야. 혹시라도 밖에서 그런 말 흘리고 다니지 마. 골치 아파진다.”
“뻔질나게 서울 드나들면서 도로에서 시간 다 버리고. 돈도 많은데 헬기라도 한 대 뽑지 그래요?”
“그럼 강국이 너 헬기조종 면허 따야 돼. 안 그러면 외근비서로 실격인데. 잘리고 싶어?”
마강국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백미러를 통해 대찬을 바라봤다.
“조 대표님, 노조 맛 한번 보실래요?”
“…….”
“외근비서가 노조위원장 하는 꼴 봐야 말씀 고분고분하실 거예요? 파업 들어가서 중국 쪽 물량 후달리게 만들어요?”
“…닥칠게.”
대찬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대찬은 해뜰녘 사옥에서 백민하 사장과 만났다.
그는 악수를 건네며 웃었다.
“직원들 우르르 안 거느리고 혼자 왔습니다. 괜찮으시죠.”
“그게 작은 회사의 장점이자 단점이죠. 근데 이제 혼자 다닐 규모는 아니지 않나? 올해 안으로 시총 우리 앞지를 거 같은데. 그래프 보면 멀미나요, 멀미나.”
“사무직 직원은 몇 안 돼요. 충원해야죠. 아직 저 혼자서 거뜬합니다.”
“조 대표야 일당백이죠. 이미 실무진에서 논의가 거의 끝났으니 직원들 더 귀찮게 할 필요도 없긴 해요. 최종안에 사인만 해주면 됩니다.”
“상품기획 쪽은 전적으로 해뜰녘에 일임하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열심히 물건이나 대겠습니다.”
백민하 대표는 웃음을 머금었다.
“중요한 건 비도축육의 가격이에요. 눈 감았다 뜨면 가격이 낮아져 있으니 원가 책정하기가 까다롭거든요.”
“이제 기하급수적인 단가 하락은 없을 겁니다.”
“원가 높게 쳐서 받으려는 속셈은 아니고요?”
대찬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이며 웃었다.
로튼 프룻츠를 해뜰녘과 손잡고 본격적인 국내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해뜰녘은 기존에 수입산 분쇄육을 이용했던 냉동가공식품을 전량 로튼 프룻츠의 비도축육으로 교체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시점은 중국 측에서 폭증하는 물량을 어느 정도 소화한 연후로 잡았다.
2019년 2분기는 로튼 프룻츠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끝났다.
그동안 쏟아부었던 결과가 고개를 내밀까 말까, 간을 보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수확이 걷히기도 전이었지만 로튼 프룻츠의 주식은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무르익었다.
2분기 실적발표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튼 프룻츠 전 임직원은 근사한 식당에서 회식을 했다.
대찬은 잔을 들고 웃으며 외쳤다.
“우리 회사가 드디어 시가총액 1조를 달성했습니다.”
그의 선언에 직원들은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로 자축했다.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기업가치 1조의 스타트업을 유니콘이라고 하죠. 그건 비상장 기준이긴 하지만, 뭔들 어떻습니까. 우리가 유니콘이라면 유니콘이지. 그죠?”
은오영 소장이 대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대표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민 선배랑 둘이서 파푸아뉴기니 밀림을 헤치면서 원두 구하러 다닐 때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 현실이 됐습니다.”
직원들은 잔잔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건배!”
“건배!”
로튼 프룻츠의 전 직원들은 힘차게 외치고 일제히 술을 마셨다.
대찬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대번에 잔을 비웠다.
이런저런 일로 지쳐있던 심신이 시원한 한 잔으로 말끔히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석우룡 장관의 핍박에 직원들 역시 대찬 못지않게 마음고생이 심했다.
대찬이야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경력과 인지도가 있으니, 로튼 프룻츠가 와르르 무너져도 어떻게든 기사회생할 길이 있었다.
하다못해 서원웅의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지면 뭐라도 되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찬만 철석같이 믿고 무작정 대출을 받은 직원들은 사정이 달랐다.
로튼 프룻츠가 붕괴하면 그들의 인생도 붕괴하는 처지였다.
대찬이 도의적인 책임을 진다고 해도 그들 전부를 책임져줄 수는 없었다.
아마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터.
대찬은 그런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상황이 정리되자 침묵하던 주변 사람들도 슬슬 다시 대찬에게 연락을 해왔다.
침묵의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는 저 불똥이 자신한테 튈까 봐 무서워서 침묵했을 것이고.
누구는 안 그래도 머리 아픈 대찬에게 조언이나 위로랍시고 몇 마디 건네 봤자 사람만 귀찮게 만든다는 걸 알아서 침묵했을 것이다.
로튼 프룻츠가 다시 정상화되자, 서원웅은 대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요즘은 그래도 마음 좀 편하지?”
“살 만해. 죽었다 살아났다. 역시 정부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야. 내가 먼저 건드린 것도 아니긴 하지만.”
“기세가 꺾인 이상, 석 장관도 이제 네 눈치 안 볼 순 없게 됐어. 로튼 프룻츠 없는 흥읍은 생각할 수 없으니까.”
“나도 구태여 석우룡하고 기 싸움 벌일 생각은 없지만… 글쎄.”
“잘 될 거야.”
서원웅은 가벼운 격려를 보태고 말을 이었다.
“급한 일도 끝났겠다, 머리도 좀 식히고 그래야지.”
“왜, 내 머리 식혀줄 계획이라도 있나 보네.”
서원웅은 민망한 듯 웃었다.
“운 띄우자마자 바로 아네.”
“뭔데? 편하게 얘기해.”
“야구나 한 게임 보러 가자고.”
생각보다도 제안이 가벼워서 대찬은 가볍게 웃었다.
“야구? 갑자기?”
“알잖아. 우리 구단 이번 시즌에 1군 콜업 된 거.”
“아아, 필래 빅스.”
필래그룹은 한 손에 꼽히는 대기업이면서도 여태 프로 스포츠 구단을 운영하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그걸 두고 돈 낭비라고 했다.
서원웅이 후계자로 낙점되고 슬슬 영향력을 넓히게 되자, 그의 의중이 경영에 많이 반영되었다.
서원웅은 국내 프로야구 열 번째 구단 유치신청을 했다.
필래그룹은 기업보다 일반 소비자를 상대로 돈을 벌어들이는 비중이 더 컸다.
거기에 필래 비바체가 주요 계열사로 떠오르면서 그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그러니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프로 야구단을 창설하는 게 옳다는 판단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영 내키는 반응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백억 단위의 적자를 보는 사업을 굳이 벌여야겠냐는 것.
그럼에도 서원웅의 강력한 요청에 끝까지 어깃장을 놓지는 않았다.
돈 많은 기업이 구단을 만들겠다고 했으니 일사천리로 일이 해결되었다.
2019년에는 1군으로 올라와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팀명은 필래 빅스(Beaks).
한반도에서 멸종된 딱따구리의 일종인 크낙새를 마스코트로 했는데, 크낙새의 상징적인 부리를 팀명으로 삼은 것이었다.
구장은 고양시에 세워졌다.
명시적인 연고지는 경기도였지만, 특히 서울 강북을 포함한 수도권 북부를 겨냥했다.
서울 남부에 세 곳의 구단이 있었으니, 북부를 공략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서원웅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성적이 좀…….”
“안 좋을 수밖에. 올해 처음 올라왔는데 어떻게 잘해.”
시즌 초반, 필래 빅스는 예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필패 빅스니, 필래 스몰스니 하는 조롱 섞인 별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던 게 요즘은 상황이 그나마 좀 나아져 있었다.
“그래도 시즌 중반 들어가서 현금 껴서 트레이드로 비싼 선수도 데려오고 하니까 좀 반등하고 있거든.”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소식은 들었어. 요즘 3연승 중이라며?”
“맞아.”
“그래서 야구 보러 간다는 거구나? 그나마 분위기 좋을 때.”
“안 좋을 때 가봤자 선수들 사기만 떨어뜨리는 거니까.”
“그러자. 나도 오랜만에 바람 좀 쐬게.”
대찬은 서원웅이 정말 머리나 식히자고 야구장 나들이를 제안한 게 아니란 걸 알았다.
한창 뜨거운 감자였던 석우룡 장관과의 대립을 마무리하고 난 대찬은 그 어느 때보다 주가가 높았다.
그와 야구장에 동행하면 서원웅 자신도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2세대 경영인이었던 아버지와는 다른 면모를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런 걸 시시콜콜 따져봤자 좋을 게 없기에 대찬은 그저 웃으면서 선선히 승낙했다.
경기 당일.
대찬은 서원웅과 함께 필래 빅스의 라커룸을 방문했다.
구단주의 방문에 잔뜩 얼어붙은 코치들이 선수들을 윽박질러 질서 있게 도열시켰다.
서원웅은 난처하게 웃으며 쓸데없는 군기 잡기를 경계했다.
보통 구단주가 경기장에 와서 경기만 보고 가는 경우는 없었다.
“어려운 여건이지만 잘해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열심히 즐기면서 경기해주세요.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두둑한 돈 봉투라도 하나씩 돌려야 구단주의 체면이 살았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수들은 더욱 의욕이 충만해져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대찬 역시 서원웅에게 빌붙어 선수들과 한 번씩 악수를 하고 라커룸에서 물러났다.
“선수들 기세가 좋네. 앞으로 4연승, 5연승도 하겠어.”
“1군 콜업 첫해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목표로 했는데, 너무 과한 욕심이었나 싶어.”
“선수들 얼굴 보면 가능도 하겠는데. 두고 보자고. 기적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
서원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래 빅스는 첫해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관중몰이가 되었다.
주말 경기에는 그래도 70% 정도의 좌석이 들어찼다.
대찬과 서원웅은 테이블석에 앉아 햄버거와 치킨 그리고 맥주를 먹으면서 경기를 관전했다.
-너와 나 하나 되어, 무적 필래 빅스 승리를 위해— 워어어어—
무지막지하게 크게 틀어놓은 앰프에서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남색 바탕에 짙은 자주색 폰트가 박힌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이 응원가를 열심히 따라 불렀다.
-무! 적! 필래 빅스! 아아아악!
대찬과 서원웅 역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카메라들은 대찬과 서원웅의 투 샷을 열심히 찍어갔다.
대찬은 카메라 셔터 세례가 부담스러워 선글라스를 썼다.
서원웅은 씩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조대찬이 인기가 좋아, 그렇지?”
“그냥 관심이지. 인기하고 관심은 달라. 내 욕 한번 하겠다고 죽어라 나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거든.”
“그래도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걸.”
대찬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닭다리를 들었다.
배도 출출하고 허겁지겁 물어뜯을 요량이었지만 자기를 겨누는 카메라를 보고 대찬은 닭다리를 깨작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우물거리며 서원웅에게 말했다.
“나는 원래 대대로 기륭 타이거즈 팬인데 말이야.”
하필 이날 경기도 필래 빅스와 기륭 타이거즈의 경기였다.
대찬은 본능적으로 원정 응원석 쪽으로 눈길이 갔다.
서원웅은 목소리를 죽여 경고했다.
“티 내지 마. 너는 오늘 빅스 훌리건이야.”
“걱정 마. 내가 누구냐. 윤이영 남편이잖아. 연기력 옮아서 그 정도 시늉은 쉽게 하지.”
서원웅은 싱겁게 웃었다.
대찬과 서원웅은 나란히 앉아 야구를 보면서도, 경기가 지루한 투수전 양상으로 이어지자 이내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딴청이란 일 얘기였다.
서원웅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이번에 해뜰녘하고 사업 크게 벌이던데.”
“우리야 고기 만들어내는 목장인데 그걸로 제품을 만들 능력은 없으니까. 해뜰녘 정도면 훌륭한 파트너지.”
“우리하고도 해.”
“필래? 필래푸드?”
“그래. 필래푸드.”
“글쎄…….”
대찬이 대답을 주저하자 서원웅은 경악했다.
“지금 해뜰녘하고는 하는데 우리하고는 못하겠다는 거야?”
“필래는 큰손이니까. 일단 해뜰녘하고 해보고, 좀 시장을 알고 나서 큰손이랑 거래를 해야지.”
서원웅은 헛웃음을 지었다.
“시장을 알고 나서? 너, 로튼 프룻츠보다 필래에 더 오래 몸담았어. 벌써 까먹었나봐.”
“그러니까 내 말은…….”
“뭘 더 알아야 되는데?”
“어, 잠깐만.”
딱!
경쾌한 소리에 대찬의 귀가 쫑긋 섰다.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려던 대찬은 멈칫했다.
시선이 그라운드로 향했다.
“어, 어어?”
응원석의 관중들도 대찬과 같은 곳을 바라봤다.
경쾌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투수가 던진 공이 빠르게 담장 밖을 향해 날아갔다.
공을 던진 투수도, 공을 때린 타자도 직선에 가까운 포물선을 그리는 공을 바라봤다.
배트 중앙에 정확히 맞은 공은 멈출 줄 모르고 뻗어 나갔다.
중계석에 앉은 해설자와 캐스터도 흥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구 쭉쭉 뻗어 나갑니다! 좌익수 뒤로 넘어갑니다! 0 대 0의 지루한 균형을 깨는 솔로 홈런! 기륭 타이거즈가 1대 0으로 앞서갑니다! 잠자던 호랑이가 기지개를 켭니다!”
“그렇지!”
대찬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주먹을 콱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대찬만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