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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79화 (479/556)

난 할 수 있어 479화

대찬이 흥읍 사옥으로 돌아오자, 직원들은 박수로 맞이했다.

대찬은 머쓱하게 웃으며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간 야근하랴, 대출이자 고민하랴 고생들이 많으셨습니다. 이제 해방입니다. 아, 당분간은 야근에서는 해방 못하시긴 합니다만.”

“지금 야근이 문젭니까.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사실 저도 내색만 안 했지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저 대출 500억 받은 거 아시죠? 이자만 얼만 줄 아세요?”

대찬은 암담했던 상황을 떠올리고 진저리를 쳤다.

진위생은 흐흐 웃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대찬에게 말했다.

“대표님, 다음 민관연석회의 일정이 예정돼있는데 저희 입장을 어떻게…….”

“아, 이번에는 한태윤 이사님 대신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못을 박아야죠.”

“넵.”

대찬은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민관합동연석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석우룡 장관, 축산업계 관계자들은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대찬은 그들과는 상반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에 뵙네요. 장관님도, 그리고 우리 위원장님, 협회장님들도.”

“…….”

대찬은 그들에게 굳이 악수를 청하지 않고 착석했다.

석우룡 장관은 원탁을 빙 둘러싼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하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대찬은 석우룡 장관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비공개로 전환하기 전에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덕분에 허탕을 면한 기자들이 대찬의 입술에 집중했다.

“저희 로튼 프룻츠는 법률이 정한 범위를 벗어나는 어떠한 형태의 통제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이게 저희의 일관되고 유일한 입장입니다.”

대찬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입니다. 제 할 말은 다 끝났습니다.”

기자들이 우르르 물러나고, 회의장에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석우룡 장관의 얼굴에는 조금의 기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대찬을 향해 눈빛을 쪼였다.

“아주 희희낙락이구만.”

“그러는 장관님은 우중충하시네요.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우십니까.”

“놀리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훼방을 정도껏 놓으셨어야죠.”

그러자 석우룡 장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축산업계 관계자들이 왁왁거렸다.

“그게 장관님께 무슨 무례인가!”

“위원장님들 낯짝도 두꺼우십니다.”

“나, 낯짝……?”

“여러분이 축산농가를 대표한다니, 서글프기 짝이 없습니다. 축산농민들 체면을 땅에 떨어뜨려도 분수가 있죠. 적당히들 하십시오, 진짜.”

대찬의 말 한 글자, 한 글자가 그들의 속을 잔뜩 헤집어놓았다.

로튼 프룻츠의 입장이 180도 선회되었다.

한태윤 이사는 분노를 꾹 억누른 채 고분고분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는데.

대찬은 앉자마자 혓바닥으로 뺨을 여러 대씩 내려쳤다.

“더 이상 중재라는 이름의 협박은 수용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방금 전에 다 드렸습니다.”

“저, 저 오만방자한…….”

“타협은 없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인내심을 갖고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말 듣기만 했다.

석우룡 장관은 주먹을 꽉 쥔 채 대찬에게 말했다.

“이번 건수로 모든 게 다 해결됐다고 믿는 건가?”

“네.”

“너무 안일하군.”

“안일하지 않습니다. 저는 장관님이 이 이상의 자충수를 둘 정도로 감각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축산업계 위원장들이 항의했다.

“장관님이 자기 자리보전하기 위해서 나서는 분이라고 폄하하는구만!”

“어디까지나 장관님은 농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축산업계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셨을 뿐이야.”

대찬은 한숨을 쉬고 석우룡 장관을 향해 말했다.

“위원장님도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으시면 아실 겁니다. 로튼 프룻츠는 비도축육 대량생산 체제를 완비한 후, 생산되는 모든 물량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여러분의 무엇을 고통스럽게 했습니까.”

“그거야 당장의 눈속임일 뿐이지. 언제든지 우리 모가지를 따갈 수 있지 않은가 말이야!”

“백 미터 밖에서 모가지 따려고 들어오는데 위원장님들께서는 비명만 지르고 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십니까. 비도축육이 범접하지 못할 전략을 세우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러라고 위원장 명함 파고 거들먹거리시는 거 아닙니까?”

“백 미터 밖에서 모가지 따려고 들어오는데 어느 세월에 호신술 연마하고 있나? 빽 소리 질러서 경찰을 불러야지. 안 그래?”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백 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석 장관님이 제 모가지 따려고 하셔서 빽 소리 질러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럼 위원장님들도 허구한 날 그러고 계십시오.”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석우룡 장관을 바라봤다.

“장관님, 농수산유통공사 돈으로 주식 집어넣으려면 지금이 타이밍입니다. 지금 놓치면 연일 상한가라 세금 낭비 논란이 일 겁니다.”

“…….”

석우룡 장관은 거친 말들이 입술을 뚫고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대로 내뱉었다가는 저 망할 놈의 주머니 안에서 돌아가는 녹음기에 그대로 담길 것이다.

그럼 언론플레이에 놀아나는 건 이제 대찬이 아니라 자신이 될 테니.

대찬은 석우룡 장관에게 한 번, 위원장들에게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 입장은 말씀드렸고, 장관님과 업계 입장도 충분히 들었으니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이제부터는 장외에서 말하고 들으시죠.”

대찬은 그들의 대답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논의를 종료했다.

석우룡 장관은 가만히 앉아서 그가 떠난 빈자리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그런 그를 향해 위원장들이 하소연했다.

“장관님! 이제 어떡하면 좋습니까.”

“…….”

“장관님!”

거듭 위원장들이 우는 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석우룡 장관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대찬에게 뺨 맞고 위원장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은 도대체 자립심이라는 게 없습니까!”

“자, 장관님.”

“이쯤 되면 자구책을 낼 만도 하잖아요. 근데 여기 붙잡고 읍소, 저기 붙잡고 읍소! 울려고 위원장 딱지 달았어요!”

“저, 저희가 무슨 힘이 있다고 독자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하겠습니까. 힘없는 농민들 지켜주라고 장관님이 계신 거 아닙니까…….”

“한심한 인간들 같으니! 전원 사퇴하고 지도부 다시 구성하세요. 댁들은 축산농가 대표할 자격이 없습니다!”

석우룡 장관은 책상을 쾅 두드리고 자리를 이탈했다.

그가 떠나고 위원장들은 궁싯거렸다.

“씨불놈이, 만만한 우리한테만 지랄이야…….”

로튼 프룻츠의 초도물량 비도축육 2톤이 항공편을 통해 중국으로 향했다.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젊은 기업가와 우수한 기술자 덕분에 비도축육의 종주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를 굳이 또 콕 집어 발언했다.

석우룡 장관을 우회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의도였다.

여론은 뒤집혔다.

-석우룡 장관의 칼은 고철이 되었다.

-조대찬을 가만히 놔둬라.

-로튼 프룻츠를 가만히 놔둬라.

그 목소리가 주류가 되었다.

석우룡 장관은 공식입장을 짧게 내보냈다.

“농축산부는 감정적 판단을 자제하고, 냉철하게 국민의 이익을 위해 심사숙고하겠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중재안을 거둔다든지 하는 전격적인 조치는 없었다.

칼을 빼어 들 때는 요란하게.

칼을 거둘 때는 흐지부지.

그게 석우룡 장관이 십수 년 정계에 몸담으면서 체득한 기술이었다.

불세출의 장관이라지만 청와대의 압력을 정면으로 견딜 정도의 맷집은 가질 수 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석우룡 장관은 온건파 의원에서 혁명적 장관으로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꿨다.

그러다 다시 혁명적 장관에서 온건파 장관으로 슬그머니 색깔을 바꿨다.

그건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다.

로튼 프룻츠에 정부의 마수를 뻗치는 일은 애초부터 없었던 일인 듯 언론에서 자취를 감췄다.

석우룡 장관은 한번 칼끝이 무뎌졌다고 사직서를 제출하지는 않았다.

그건 수지가 안 맞았다.

그는 대선주자급 행보를 관두는 대신, 소소한 행복을 확실하게 지켜나갔다.

알게 모르게 농축산부의 예산을 자신의 지역구인 흥읍 쪽으로 쫄쫄쫄 흘려보냈다.

그 소식이 대찬의 귀에도 들어갔다.

한태윤 이사가 대찬에게 직접 보고했다.

상황은 대충 진정됐지만 여전히 로튼 프룻츠는 석우룡 장관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농수산유통공사에서 신축 미래식량 R&D센터를 흥읍에 짓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역시 정치를 하려면 그 양반처럼 해야 돼요. 감당 안 되니까 바로 장사 접고 지역구만 챙기네요.”

“그래도 이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닙니까?”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노골적이긴 하죠. 언론에서도 문제 삼을 거고. 근데 지역구에서는 되레 좋아하죠. 저렇게 욕을 먹어가면서도 우리 챙겨준다고.”

“참, 왜 하필 흥읍에 센터를 짓냐고 비판이 들어오니까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미래식량의 선봉은 로튼 프룻츠다. 로튼 프룻츠 본사가 흥읍에 있어서 R&D센터도 흥읍에 짓는다. 문제없다.”

대찬은 어안이 벙벙해서 한태윤 이사를 빤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암튼 대단해.”

“저희로서는 좀 껄끄러워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석우룡이 다시 이쪽 지역구 의원으로 복귀하면 우리에게 좋을 게 하나 없습니다.”

“그러니 내년 총선이 있기 전까지 주변에서 건들지 못할 정도로 체급을 키워놔야 해요.”

“맞습니다.”

한태윤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튼 프룻츠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였던 석우룡 장관의 압박은 그렇게 끝났다.

전화위복.

대찬은 석우룡 장관의 압박 카드 덕분에 두 가지의 큰 성과를 얻었다.

일단 쵸 후쿠히로 회장의 지분이 사라졌다.

이로써 대찬의 사내 장악력에 도전할 세력이 아예 없어졌다.

쵸 후쿠히로 회장의 자금이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이미 로튼 프룻츠의 주식은 계속 천정부지로 치솟는 와중에도 여전히 저평가 종목의 대표로 꼽혔다.

다만 쵸 후쿠히로 회장과의 연결고리 하나가 끊어진 것이 인간적으로 아쉬울 뿐이었다.

또 하나의 성과는 중국 시장을 개척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석우룡 장관을 견제하려는 청와대 덕분에 등 떠밀어지다시피 만들어진 결과이기는 했다.

로튼 프룻츠가 경쟁업체보다 기술에서 아득히 앞서있어도 내내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것이 글로벌 경쟁력이었다.

글로벌 경쟁력은 기술이 전부가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은 역시 미국이다.

로튼 프룻츠는 미국 시장 진출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차라리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 미국 증시에 상장했으면 모를까.

근본이 시작하기를 한국 기업으로 시작했다.

그린블러드가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

그린블러드가 제대로 시장성을 확보한 상태라면 모를까, 로튼 프룻츠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구만 리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 정부가 언제 로튼 프룻츠에게 빗장을 열어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찬도 내심 미국 시장은 먼 미래에 개척하기로 단념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다른 해외시장을 개척하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비도축육에 대한 법적 제도가 완비된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그렇기에 시장에서 로튼 프룻츠의 가치를 판단할 때는 엄연히 국내시장만을 염두에 뒀다.

아무리 크게 자라는 물고기도 작은 어항에 가두면 작게 자란다.

국내시장은 작은 어항이었으니 당연히 평가도 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졸지에 중국이라는 큰물에서 헤엄치게 되었다.

항공편으로 운송된 초도물량 2톤에 이어, 인천항을 통해 2차 물량 20톤, 3차 물량 100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로튼 프룻츠의 비도축육 물량이 지속해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흥읍의 생산설비에서는 끊임없이 고기를 찍어냈다.

비도축육이 재래육보다 우위에 있는 부분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속도였다.

소를 잡아 고기를 만들려면 최소한 2년은 키워내야 한다.

그러나 비도축육은 실험실에서 3주면 충분했다.

비도축육의 생산속도가 서른 배 이상 빠른 셈이었다.

게다가 같은 양의 고기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면적도 훨씬 좁았다.

그러니까 생산, 물류, 판매로 이뤄지는 순환이 재래육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해외 판로를 확보한 로튼 프룻츠는 더 의욕적으로 사업 확장에 나섰다.

국내시장은 해뜰녘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다양한 비도축육 제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대찬은 해뜰녘 백민하 사장과 자주 만났다.

흥읍과 서울을 수시로 오가는 덕분에 대찬의 외근비서인 마강국은 죽을 맛이었다.

그는 서울로 들어가는 꽉 막힌 간선도로에서 한숨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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