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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76화 (476/556)

난 할 수 있어 476화

-“저는 장관으로서 로튼 프룻츠에게 공개적으로 제안합니다. 로튼 프룻츠 이사회의 사외이사 1인을 한국농어촌유통공사 측에서 지명하도록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외이사 1인은 중요 사항 의결에 큰 영향력은 없다.

어차피 사내이사 전원이 대찬의 사람이고, 나머지 사외이사도 대찬이 지명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정부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외이사가 회사 내부의 자료를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타격이었다.

대찬의 입장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석우룡 장관은 발톱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 사외이사는 국민의 식생활 안전과 국가 기간산업 보전을 위해 로튼 프룻츠의 부정부패를 감시, 감독할 것입니다. 축산업계와의 조율과 상생을 도모할 것입니다. 로튼 프룻츠의 경영권을 외국자본에 빼앗기지 않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할 것입니다.”

“누구 맘대로 회사를 도둑질하려고 들어!”

마강국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강국과 기분은 같았다.

-“만일 로튼 프룻츠가 이와 같은 중재안마저 수용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더욱 강력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질문은 로튼 프룻츠의 입장이 나온 연후에 받는 게 좋겠습니다.”

석우룡 장관은 조금 전의 말과 달리 질문을 받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의 발표는 그야말로 로튼 프룻츠에게는 핵폭탄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시간으로 주가가 폭락하고 있습니다.”

한태윤 이사는 음울한 목소리로 대찬에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죠. 저 정도면 농축산부가 컨트롤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으니까.”

“대응방법이…….”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선 없습니다. 모두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합니다. 사외이사를 받아들이는 플랜B까지 포함해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직원들은 당혹스러웠다.

대응 방법이 아예 없다.

대찬의 입에서 그런 희망 없는 말이 흘러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 이러다 빚더미에 앉게 되는 걸까.

대표가 자신 있어 하니까 대출 다 끌어당겨서 몰빵 했는데…….

직원들은 동요했다.

석우룡 장관의 선언에 청와대는 내색은 안 했지만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껏 농축산부가 이 정도의 큰 건에 단독행동을 벌인 적.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리고 야당 현역 의원 출신의 장관이 멋대로 활개 치고 다닌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응 매뉴얼이 없었다.

‘필요성은 어느 정도 동감하지만 다소 급진적인 발표.’

그렇게 견제구를 던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언론에서는 석우룡 장관보다도 앞서나갔다.

극동일보는 시장경제와 국가의 역할, 그 중간의 어딘가를 절묘하게 짚어냈다고 찬양했다.

로튼 프룻츠의 사외이사가 누가 될지 벌써부터 후보군을 추리기까지 했다.

로튼 프룻츠는 그날부터 대응책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대찬은 출근할 때마다 기자들의 틈바구니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렀다.

“이번 농축산부의 발표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튼 프룻츠 공식 입장은 아직 없는 겁니까!”

“주가가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은 갖추고 있습니까!”

“이번 중재안도 거부하면 더 강력한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는데,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실 겁니까!”

닥쳐!

대찬은 기자들에게 그렇게 일갈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그는 묵묵부답으로 기자들을 지나쳐 로튼 프룻츠 정문을 통과했다.

축산업계는 석우룡 장관의 발표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로튼 프룻츠의 지분을 사들이기 위한 자금 확보에 나서겠다고 신이 나서 떠들었다.

로튼 프룻츠의 주주들은 정부의 발표에 일제히 비난했다.

1인 시위에 나서는 이도 있고, 석우룡 장관의 차량에 달걀을 투척하는 이도 있었다.

이는 환영 일변도인 축산업계의 반응을 상쇄하는 정도는 되었지만 큰 물줄기를 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란스러웠다.

로튼 프룻츠는 벌집을 들쑤셔놓은 듯 그 소란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 소란 때문에 연구원들도 연구에 전념하지 못했다.

로튼 프룻츠 직원들도 거의 반쯤은 멍하니 앉아있는 것으로 업무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대찬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꾸 대출 이자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차라리 핀볼이나 지뢰찾기라도 해야 되나 싶었다.

그렇게 로튼 프룻츠가 녹다운 직전까지 몰린 그때.

대찬은 전화 두 통을 받았다.

-“최근 중국에서…….”

대찬은 백색소음처럼 켜놓았던 TV의 음량을 줄이고 전화를 받았다.

첫 번째 전화에서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그는, 두 번째 전화를 받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점이 중요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예. 그럼 조만간에 또 말씀 나누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대찬은 두 번째 전화를 끊고 깊게 호흡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직원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망연자실한 모습.

대찬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로튼 프룻츠에 폭탄을 투하한 석우룡 장관 측도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목을 조르는 입장이라고 해서 여유가 넘치진 않았다.

그들도 그들의 사정이 있었다.

여론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장관의 지지율은 80%에 육박하는데 이 사태에 대한 여론은 반반으로 갈렸다.

왜 정부가 잘나가는 벤처기업에 손을 대냐는 것.

이런 나라에서 무서워서 누가 사업을 벌이겠냐는 것.

석우룡 장관의 참모도 우려를 표했다.

“청와대 쪽에서 경고를 보냈습니다. 이런 단독행동은 장관님의 신상에 전혀 이로울 게 없다고…….”

그러나 석우룡 장관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정도면 싸게 막았구만. 됐어. 로튼 쪽에서는 아직도 반응이 없나?”

“똑같습니다. 내부 논의 중이다.”

석우룡 장관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피식 웃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지요.”

“그 여우같은 놈도 별 수 없는 모양이구만.”

“시간은 저희 편 아니겠습니까, 장관님.”

석우룡 장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나 욕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농축산부가 로튼 프룻츠 쥐어짜서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그런 목소리는 쑥 들어갈 거야.”

“그야말로 불세출의 농축산부 장관으로 남는 셈이시죠.”

“하하, 사람, 참.”

“탄력받아서 내후년 대권까지……?”

“너무 앞서가지 말게나.”

석우룡 장관은 점잖게 질책하면서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참모는 목소리에 더 힘을 실었다.

“요즘은 참 뉴스 보는 맛도 납니다. 일주일 내내 장관님한테 딸랑거리는 보도만 나오잖습니까.”

“그렇게 자만할 때가 가장 위험한 거야. 자네도 너무 풀어져 있지 마.”

“하하, 물론입니다. 그래도 즐길 건 즐기면서 살아야 인생이 재밌지 않겠습니까. 아, 지금 정오 뉴스 할 시간이네요. 이놈들이 또 우리 장관님한테 뭐라고 굽실거리나 볼까요?”

참모는 빙긋 웃으며 장관실에 비치된 TV를 켰다.

띠리리링.

TV 켜지는 소리마저도 경쾌하게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정오 뉴스입니다. 우선 속보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속보……?”

뉴스를 틀어놓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석우룡 장관과 참모들의 시선이 일제히 화면으로 향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이 지금 현재 인천공항에 급거 입국하여 최근 로튼 프룻츠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아나운서의 말에 석우룡 장관의 눈빛이 가늘게 떠졌다.

“저 반 쪽발이 새끼, 갑자기 뭐야.”

그 시각.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로튼 프룻츠 직원들도 TV에서 흘러나오는 쵸 후쿠히로라는 이름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쪽을 올려다봤다.

그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숟가락을 놀리는 사람은 단 한 명.

대찬 뿐이었다.

대찬은 그쪽으로 귀만 활짝 열어놓은 채로 열심히 국을 떠먹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인천공항에 홀로 입국했다.

짐도 작은 캐리어 하나뿐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기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외부에 소식을 미리 발설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몇몇 지상파 방송 기자들만 불렀다.

그 기자들에는 최재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조촐한 언론인터뷰가 이뤄졌다.

규모는 조촐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모든 지상파 방송에서 쵸 후쿠히로 회장의 회견을 생중계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몇 개의 마이크 앞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무거운 근심이 깔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장복광입니다.”

기자들은 숨죽인 채 그의 말을 지켜보기만 했다.

-“최근 한국 언론, 그리고 정부에서 제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외면할 수 없는 일이기에, 직접 한국으로 들어와 제 입장을 밝히고자 입국했습니다.”

석우룡 장관 측과 로튼 프룻츠 측은 지금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TV 속 쵸 후쿠히로 회장의 입에 주목했다.

대찬은 입 안 가득 밥을 넣은 채로 우물거렸다.

쵸 후쿠히로 회장의 발음은 어눌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되 한국에서 살아보지 못했으니 그의 한국어는 능숙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쵸 후쿠히로 회장의 말은 어눌한 와중에도 잘 들렸다.

같은 말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연습한 티가 났다.

-“저는 최근 언론과 정부의 태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로튼 프룻츠의 경영권을 노리고 지분을 늘려온 게 아닙니다. 항상 해오던 일상적인 투자였을 뿐입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솟는 느낌이 들었다.

-“저는 그 누구도 로튼 프룻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로튼 프룻츠에 투자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서서히 액수를 늘려갔습니다. 액수를 늘릴 때는 항상 조대찬 대표와 상의했습니다. 제가 자칫 걸림돌이 될까봐…….”

쵸 후쿠히로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로튼 프룻츠가 싹을 틔울 때는 관심도 없던 분들이, 꽃을 피우니까 너도 나도 나서서 숟가락을 올리면서, 떡잎부터 알아보고 물 댄 사람을 도둑놈으로 몰다니요…….”

훌쩍.

그는 콧잔등을 씰룩이곤 말을 이었다.

-“저 외국인 맞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 맞습니다. 제가 로튼 프룻츠 경영권을 빼앗으면 한국의 미래에 유익한 회사가 외국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도, 맞습니다. 걱정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주먹을 꼭 쥐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립니다. 저는 로튼 프룻츠의 경영권을 빼앗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제 성은 쵸입니다. 한국말로 하면 장(張) 씨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장씨들은 일본식으로 성을 바꿨습니다. 대개 하리모토(張本)로 바꿉니다. 야구선수로 유명한 장훈 씨, 그분의 일본 이름은 하리모토 이사오입니다.”

쵸 후쿠히로는 숨죽인 채 자기만 바라보는 기자들을 죽 둘러보고 말했다.

-“하지만 제 이름은 쵸입니다. 장 씨를 그냥 일본말로 발음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장 씨입니다. 그건 어머니의 뜻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일본사람으로 살아도 근본은 기억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이름은 후쿠히로지만 성은 장이라고요. 저는 한국을 몸 바쳐 사랑하지 않지만 아무렇지 않게 등에 칼을 찌를 정도로 등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걸 화면으로 지켜보는 석우룡 장관은 콧잔등을 씰룩였다.

“쇼하고 있구만. 어울리지도 않게 눈물 콧물 짜내면서 쇼하고 있어!”

“이제 우리 국민들도 저 정도의 쇼에는 속지 않습니다.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석우룡 장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복광이를 인천까지 들여놓다니, 조대찬이 수완도 어지간하지만 거기까지지. 장복광이한테 지분을 다 토해내라고 했으면 모를까.”

말이 씨가 되었다.

석우룡 장관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쵸 후쿠히로 회장은 이 자리가 단순히 눈물 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제가 여기서 피를 토한들, 대부분 제 진심을 믿지 못할 겁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는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눈을 부릅떴다.

-“조대찬 대표는 저보다 한참 어리지만 저는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잘되기를 누구보다 바랍니다. 제가 그 사람의 걸림돌이 절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제가 보유한 로튼 프룻츠 지분 10%를 전량 매각하겠습니다. 장외의 제3세력에게 판매하지 않고, 장내에서 모두 팔겠습니다.”

그의 선언에 석우룡 장관은 의자 팔걸이를 쾅 내리쳤다.

“저, 저 미친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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