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75화
농림축산식품부
수신자 : 주식회사 로튼 프룻츠
제목 : ‘축산업의 미래를 위한 민관합동연석회의’ 발족에 관한 협조 요청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최근 비도축육의 대두로 인해, 축산업계의 불안감이 매우 심화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당사자 간의 자율적인 문제해결을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으나, 축산업계의 강력한 요구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축산업과 비도축육 업계의 상생을 위하여 「축산업의 미래를 위한 민관합동연석회의」를 구성하고자 합니다.
로튼프룻츠는 비도축육 업계의 대표기업으로서, 연석회의에 반드시 참여해주실 것을 요청 드립니다.
붙임 : 「축산업의 미래를 위한 민관합동연석회의」협조 요청 1부. 끝.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비치된 팩스가 수신음을 내며 농축산부로부터 공문을 전달받았다.
고미수는 그 공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가 진위생에게 전달했다.
진위생도 눈살을 한번 찌푸리고 대표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농축산부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이리 주세요.”
대찬은 공문을 받고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리 아플 걸 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대찬은 바로 한태윤 이사를 대표실로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이사님이 우리 측 연석회의 대표로 참여해주셔야겠습니다.”
“네? 제가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 장관 놀라고 깔아놓은 판에 정성껏 장단 맞춰줄 이유 없잖아요.”
“그렇긴 하죠.”
“사실 맘 같아선 진위생 보내고 싶은데.
“그럼 또 언론에서 까대겠죠. 성의 없다고.”
대찬은 말만 들어도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니 말입니다. 한 이사님이 수고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가죠. 남기실 당부는 없으십니까?”
“기존의 우리 입장만 고수하시면 됩니다. 1밀리의 타협도 없어요. 어차피 일은 회의장 밖에서 이뤄질 겁니다.”
한태윤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찬이 전해들은 민관연석회의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한우 위원장 이하 축산업계 요인들이 다수 포진한 상태.
돌부처 같은 한태윤 이사도 참을 인 자 세 번을 새겨야만 했다.
석우룡 장관은 은근히 그들의 편을 들며 로튼 프룻츠를 압박했다.
“로튼 프룻츠는 지금껏 국민적 지지와 정부, 국회의 도움으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게다가 국민의 식생활에 미치는 파급력이 큰 만큼, 다른 기업보다 훨씬 더 무거운 사회적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겁니다.”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노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가 중요합니다. 지금 축산업계의 이 아우성을 면전에서 들으시고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타협의 의지를 먼저 저버린 건 축산업계입니다. 지난 올림픽 때에도…….”
쾅!
한태윤 이사가 상대를 성토하려 하자, 석우룡 장관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제지했다.
“이 와중에 남 탓이나 하고 있고!”
“장관님, 일단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저희 로튼 프룻츠의 입장도…….”
“시종일관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유익함이 있습니까?”
한태윤 이사는 입을 다물었다.
대찬이라면 석우룡 장관의 윽박지름에도 꼬박꼬박 각주에 미주까지 달았을 것이다.
한태윤 이사는 그런 성품은 아니었다.
이미 쪽수에서 밀리는 터.
한태윤 이사는 석우룡 장관을 등에 업은 축산업계의 비난만 온몸으로 받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찬은 전화로 보고를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바로 퇴근하세요.”
“그래도 뵙고 따로 보고를…….”
한태윤 이사의 목소리는 전례 없이 지쳐 보였다.
“아닙니다. 퇴근하세요.”
“알겠습니다. 좋은 소식 못 전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저 대신 수모 당하셨는데 죄송은요. 오늘은 푹 쉬십시오.”
대찬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가만히 대표실에 앉아만 있었다.
그 이후로도 민관합동연석회의는 여러 차례 열렸다.
양상은 바뀌지 않았다.
일방적인 린치였다.
시일을 오래 끌 수 없었다.
은오영 소장과 다르샨 싱 전무가 대찬을 찾아와 보고했다.
은오영 소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찬을 바라봤다.
“참 야속하네요. 기쁜 소식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흉흉해서야.”
“가뜩이나 흉흉한데 기쁜 소식이라도 기쁘게 들어야죠.”
대찬은 웃으면서 둘을 앉히고 차 한 잔씩을 타주었다.
잔을 내려놓으면서, 대찬은 은오영 소장에게 물었다.
“완수됐습니까?”
“예, 완수됐습니다. 우공이산, 묵묵히 연구에 열중했던 결과가 이제 나왔습니다.”
“어디 열중만으로 될 일인가요. 두 분의 비상한 두뇌가 가장 큰 몫을 해냈죠.”
“아,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대찬은 빙긋 웃었다.
“이제부터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할 수 있다니……. 꿈같은 얘기가 현실이 됐군요.”
“다만, 요즘 회사 분위기가 이래서…….”
“일단 표정 관리는 하고 있어야죠.”
“대량생산 체제가 완비됐다고 하면, 지금 불난 집에 신나 붓냐고 난리가 날 텐데요.”
“아무튼, 단가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까?”
대찬의 질문에 다르샨 싱 전무가 대답했다.
“단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내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충분히 수입산 냉동 분쇄육과 붙어도 해볼 만한 수준입니다. 이제부터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설비 싸움입니다.”
“설비는 더 확충할수록 단가는 내려간다.”
다르샨 싱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부터 연구팀도 둘로 나눠 한쪽은 양, 한쪽은 질을 맡을 생각입니다.”
“부스러지는 분쇄육 형태가 아니라 여러 조리방식에도 완벽히 대응될 수 있도록 연구를 지속해주세요.”
“물론 그쪽으로도 열심히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표님.”
은오영 소장은 대찬을 흘겨보며 말했다.
“아주 우리가 도깨비 방망이인 줄 아시죠! 아니면 무슨 핸드폰 게임 자동사냥 켜놓은 것처럼 이래 하라 하면 이래 하고, 저래 하라 하면 저래 하고!”
대찬은 애처럼 투정 부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오랜만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러고 보니 요새 소장님이 연구에 소홀하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누, 누가 그럽니까! 어떤 놈이야!”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핸드폰 게임 한다고.”
“설마 고수혁 그 새끼?”
“발끈하시는 거 보니까 틀린 말은 아닌가 보네요.”
“아, 아니거든요? 제가 연구하느라 하루에도 비지땀을 한 됫박씩 쏟는다고요.”
“알죠, 알죠. 소장님도 고생하시고, 저도 제 나름의 소임을 다하고 있잖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안기부장 노릇도 하시고 말이죠.”
“국정원으로 바뀐 지가 언젠데. 자,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겁니다. 상황이 끝나면 즉각 대량생산에 돌입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젠 업계와의 관계가 파탄지경으로 치달았으니, 더 이상 업계 눈치 볼 것도 없습니다.”
“아주 막 나가버리자고요!”
대찬은 웃으면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일단 석우룡이라는 큰 산 먼저 하나 넘고 말이죠.”
대찬의 말에 모두의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스르르 빠졌다.
대찬은 민망하게 웃었다.
“기뻐할 건 기뻐하자고요.”
“참 나, 회식도 못하겠네요. 그럼 당장 다음날 극동 1면에 떡하니 뜰 거 아닙니까?”
이젠 한국 사람이 다 된 다르샨 싱 전무는 직접 극동일보의 표제까지 예측했다.
“로튼 프룻츠, 축산농가 눈물 외면하고 밤새 폭탄주.”
“싱 전무님, 나중에 우리 망하면 언론고시라도 보세요.”
“대표님은 망한다의 망 자도 꺼내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대찬은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로튼 프룻츠는 곧 완전체가 될 것이다.
고기와 유사한 것을 고기보다 비싸게 파는 회사가 아니다.
고기와 유사한 것을 고기보다 싸게 파는 회사가 된다.
이제 강남육 같은 치사한 마케팅 전략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도축육은 이제 비도축육 그 자체로서 가치와 경쟁력을 지닐 것이다.
출발선 앞에서 뛸 준비를 하는데.
크라우칭 스타트를 하려고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두 손은 가볍게 땅을 짚고 있는데.
하필이면 이 원수 같은 놈이 화약총을 들고 있다.
그는 비식비식 웃으며 쏴줄까, 말까, 쏴줄까, 말까 조롱하고 있다.
몇 번의 연석회의로 명분을 쌓은 석우룡 장관은 바로 특단의 대책이라며 직접 정부의 결단을 발표했다.
대찬과 로튼 프룻츠 임직원은 모두 TV 앞에 앉아 그 발표를 지켜보았다.
석우룡 장관은 좌우로 관료들을 거느리고 등장해서는 직접 단상 앞에 섰다.
-“지난 몇 번의 연석회의를 통해 정부는 축산업계와 로튼 프룻츠 사이의 입장을 조율하고 간극을 좁히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로튼 프룻츠는 기업의 이익이 심대하게 침해당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정부의 중재안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중재안이 아니라 협박이지, 망할 놈.”
대찬의 등 뒤에 앉은 직원들 사이에서 거친 말들이 쏟아졌다.
대찬은 묵묵히 석우룡 장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기업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자유 시장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나, 정부는 국민의 식생활과 장기적인 식량대책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수입육의 공세에 한 번 휘청였던 축산농가가, 로튼 프룻츠의 존재로 인해 아예 절멸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지랄, 지랄, 상지랄.”
은오영 소장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비도축육은 향후 우리 국민의 식생활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의식주라는 말이 있듯, 식량은 인간이 생명을 영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국가 기간사업으로 여겨지는 전기, 철도, 수도보다도 어쩌면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아, 제발.”
고미수는 머리를 싸쥐었다.
-“전기, 철도, 수도는 모두 국가가 공기업의 형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수급이 필수적이며, 경제적 이득보다는 안전과 위생이 우선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로튼 프룻츠는 엄연한 사기업으로, 이를 공기업화하겠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며 시도될 수 없는 공상에 불과합니다.”
“뭐야, 지금 우리를 공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소리야?”
마강국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는 한 기업의 이익보다는 국민 전체의 행복과 안전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농축산부의 견해입니다.”
“아.”
석우룡 장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로튼 프룻츠 직원들은 일희일비했다.
-“게다가 로튼 프룻츠는 현재 외국 자본의 경영권을 노린 침투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조대찬 대표 이하 임직원이 부랴부랴 지분을 늘렸지만, 개인의 자격으로는 한계가 뚜렷한 미봉책일 뿐입니다.”
대찬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묵묵히 화면만 응시했다.
-“저희는 민간기업의 이익추구 보장과 국가적 식량계획 사이에서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꿀꺽.
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농축산식품부는 로튼 프룻츠의 안정적 경영과 식량의 안정적 보급을 위해, 대규모 출자를 결정하였습니다.”
“…출자?”
-“농축산식품부는 산하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명의로 대규모 출자를 단행, 로튼 프룻츠의 지분 5%를 매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맹윤주가 김산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김산호 씨, 저 정도면 그냥 체면치레 수준 아니에요? 5%면 딱히…….”
“저걸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첫걸음에 5%면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니죠. 지분을 더 늘릴 수도…….”
그들의 수군거림을 알 리 없는 석우룡 장관은 꿋꿋이 입장발표를 이어나갔다.
-“또한 축산업계도 이에 호응하여 2%이상의 지분을 사들이기로 내부적인 결정을 도출했습니다. 또한 국민연금 역시 동참해줄 것을 건의할 계획입니다.”
그 말에 기자의 귀가 쫑긋 섰다.
“잠깐, 지금 그 말씀은 정부나 청와대와 협의가 아직 안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석우룡 장관은 험악한 눈빛을 그쪽에 뿌렸다.
“질문은 모든 발표가 끝난 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기자는 바로 눈을 아래로 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