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73화
한태윤 이사는 대찬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석 장관이랑 대립각 세우셨던 거, 후회하세요?”
“음, 그거 아시죠? 여우의 신 포도.”
“포도를 못 먹게 되니까 저 포도는 분명히 신 포도일 거라고 합리화한 여우, 그거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요.”
“석우룡 장관과 척을 지지 않더라도 결과는 같았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생각하려고요?”
“정말 그랬을까요?”
“장관 되고서 파리 말고 큰 호랑이를 때려잡아야 재미를 좀 볼 텐데, 석 장관 입장에서 잡을 호랑이가 몇 마리나 되겠어요.”
“그야 그렇죠. 농업, 축산업, 식품업, 거기서 때려잡을 대상이 검경만큼 다채롭진 않겠죠.”
대찬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로튼 프룻츠는 어찌 됐든 타깃이 됐을 거예요. 눈치 안 보고 억누르냐, 좋은 말로 살살 달래면서 꾀어내느냐, 그 차이였겠죠.”
“과연 그랬을까요? 아예 농림부장관 입각 제의를 거부하지 않았을까요?”
쯧,
대찬은 가볍게 혀를 차고 한태윤 이사에게 꿍얼거렸다.
“이사님, 언제부터 그렇게 집요해지셨어요? 그러니까 내가 신 포도라고 했잖아요, 신 포도!”
“하하…….”
대찬은 의자 팔걸이를 손으로 살살 쓸면서 말했다.
“대처하기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가만히 손 놓고 있다가는 진짜 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마땅한 방법이 있으십니까?”
대찬은 한태윤 이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론전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도 이미지가 나쁘지 않지만…….”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공세에 생채기 많이 입었죠. 석 장관은 나날이 인기 고공행진이고.”
“네, 그래서 언론을 전장으로 삼으면 우리가 필팹니다. 게다가 여당에서도, 야당에서도 때리지 않으니 무적에 가까워요.”
“이러다 정말 석 장관이 대통령 될까봐 무섭네요.”
한태윤 이사는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그런 무서운 말씀은 하지 마시고요. 결국 실력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한태윤 이사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실력으로 비하자면 우리 쪽이 더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써볼 방법이 있기는 하니까요.”
“어떤…….”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단 저 은행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으, 은행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대출을 받았다.
로튼 프룻츠 주식 전량을 담보로 해서, 한도 끝까지 대출을 받았다.
은행장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서 최대한의 예우로 대출을 승인해주었다.
500억.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런 부담을 안는 걸 당연히 집안에서는 반기지 않았다.
윤이영은 대찬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이거, 꼭 필요한 거야?”
“응, 아니면 좀 위험해질지도 몰라서.”
“그러다 주가라도 떨어지면 우리 완전 빚더미에 앉아.”
대찬은 웃으면서 윤이영의 어깨를 쓸었다.
“집에서 쫓아내면 얌전히 쫓겨날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지금!”
“부담 없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말란 소리는 못하겠어. 지금 상황, 충분히 걱정할 만해.”
“……알면서!”
“당신 걱정도 이해하고.”
윤이영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후… 그래, 내가 한 걱정을 오빠라고 왜 안 했겠어. 내가 괜한 소리 했네.”
“그래도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고 아무 말도 안 했으면 그건 그것대로 섭섭했을걸.”
대찬의 말에 윤이영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대찬은 빙긋 웃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지가 되었다.
대찬은 대출을 받자마자 한태윤 이사에게 연락했다.
“이사회 소집해주세요.”
“이사회는 왜…….”
“이사회에서 대규모 유상증자, 신주발행을 결의할 겁니다.”
“신주발행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 그대로 새로운 주식을 찍어내겠다는 뜻이었다.
한태윤 이사는 대찬이 왜 그렇게 하는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하라는 대로 했다.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로튼 프룻츠의 등기이사들은 대찬의 뜻대로 신주발행을 단행하는 건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신주를 발행하는 방식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제3자 배정방식이었다.
새롭게 발행하는 주식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만 배정하는 것이었다.
대찬은 이사회를 통해 대출받은 500여억 원어치의 주식을 자신에게 배정해서 신주를 발행했다.
두 번째는 기존 주주에게 배정하는 방식, 그리고 마지막은 자격에 상관없이 일반에 새로운 주식청약을 모집하는 일반공모 방식이었다.
대찬이 직접 나서서 주식을 대량으로 매집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로튼 프룻츠의 임원들도 나섰다.
최소한 대찬이 나서서 주식을 사들였다는 뜻은 회사를 지킬 수 있고, 이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있다는 뜻이었다.
민승기 역시 자신의 지분 전량을 담보로 새롭게 주식을 사들였다.
오윤 전무, 은오영 소장, 다르샨 싱 전무, 한태윤 이사 역시 그렇게 했다.
대찬은 그들의 결심을 듣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대단한 우리 로튼 프룻츠. 임원진 전원이 빚쟁이 신세야, 빚쟁이.”
그러자 은오영 소장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대장 빚쟁이가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부채도 자산인 거 몰라요? 저 어마어마한 자산가입니다.”
“참 나, 빚쟁이든 자산가든 한 가지만 하세요. 우리는 뭐 빚쟁이고 자기는 자산가야?”
“자기? 지금 대표보고 자기라고 했습니까?”
그러자 은오영 소장은 실실 웃으며 민승기에게 말했다.
“민 사장님, 지금 조 대표님 할 말 없으니까 괜히 시비 거는 거 보셨어요?”
민승기는 딴 곳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못 봤는데요.”
“…….”
대찬이 은오영 소장을 뚫어져라 노려보자, 은오영 소장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임원진이 일제히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로튼 프룻츠의 직원들도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하고 새로운 주식을 배정해 달라 요구했다.
어떻게 임원진만 재미를 보냐고 항의했지만, 그런 농담조의 거친 항의에는 회사를 위하는 마음이 들어있다는 걸 대찬은 모르지 않았다.
대찬은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우리사주조합장에는 진위생이 선임되었다.
로튼 프룻츠의 우리사주조합은 도합 1%의 지분을 확보했다.
이렇게 되자 대찬을 비롯한 임직원이 소유한 지분이 비 온 뒤에 죽순 자라듯 쑥 커졌다.
조대찬 이하 임직원의 보유 지분이 기존보다 12% 늘어났다.
도합 35%.
평범한 상황 같으면 쵸 후쿠히로 회장이 경영권을 잠식할 것이라느니 하는 말이 나올 이유가 전혀 없는 수준이었다.
대찬은 그렇듯 결정된 사항을 들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석우룡, 조대찬, 쵸 후쿠히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더없이 좋은 트리오가 얽혔으니 기자들도 회견장을 가득 메웠다.
대찬이 단상에 서고, 로튼 프룻츠의 주요 임직원이 단상 뒤에 마련된 의자에 착석했다.
다르샨 싱 전무, 은오영 소장, 오윤 전무, 민승기 대표, 그리고 직원 대표로 고릴라 덩치의 마강국.
이는 로튼 프룻츠가 단합되었다는 묵시적인 상징이었다.
특히 은 소장과 싱 전무를, 사진을 찍었을 때 바로 대찬의 좌우에 밀착한 것처럼 보이는 구도에 앉혔다.
단상에 선 대찬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여러 언론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로튼 프룻츠의 대표로서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쵸 후쿠히로 회장님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분이 보유한 지분은 제 경영권을 지키는 데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습니다.”
대찬은 단상 위에 비치된 냉수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언론의 보도로 인해 안팎으로 로튼 프룻츠의 미래를 우려하는 의견이 많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대찬은 자신에게 카메라를 겨누고 있는 저들이 그 원흉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두당 다섯 대씩 뺨을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상상은 상상으로 만족했다.
“그런 우려는 우리 로튼 프룻츠에 있어 매우 큰 불안요소로 작용합니다. 이에, 저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제 지분을 기존의 20퍼센트에서 27퍼센트까지 늘렸습니다. 더불어, 로튼 프룻츠의 임직원들도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저를 포함한 모든 임직원의 지분을 35퍼센트까지 늘렸습니다. 더 이상 주주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의혹성 보도를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대찬은 건조하게 입장을 밝히고 단상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때 기자 무리 중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외쳤다.
“극동일보 구본진입니다. 질의응답 안 하십니까.”
대찬은 그대로 지나가려다가 단상을 꽉 붙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만일 그냥 지나친다면 불통의 CEO라느니, 황급히 자리를 뜬다느니, 도망을 간다느니 하는 말이 따르리라.
대찬은 구본진을 지목하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조 대표님은 로튼 프룻츠 창업 전에 보유한 재산이 그리 많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을 어디서 훔쳐 오진 않으셨을 테고, 결국 다 빚인데.”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임직원 전원이 그런 빚더미에 앉게 되었단 소리 아닙니까?”
“억측은 자제하십시오.”
“만약에 로튼 프룻츠 주가가 한번 출렁이면 그대로 다 나가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기자님 말씀대로 설혹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한들, 개인적인 채무로 인한 문제이니 회사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구본진은 씩 웃었다.
“왜 문제가 없습니까? 조 대표님이 곧 로튼 프룻츠고, 로튼 프룻츠가 곧 조 대표님인데. 개인적인 채무라고 해도 이건 심각한 오너리스크죠.”
“그건 저를 제외한 로튼 프룻츠 전 임직원을 모독하는 말씀입니다.”
“모독하려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이지요.”
“로튼 프룻츠는 이미 백년대계를 갖추고 시스템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회사입니다. 동네 구멍가게가 아닙니다.”
“그럼 조 대표님은 지금 동네 구멍가게를 모독하시는 겁니까?”
대찬의 바로 뒤에 앉은 은오영 소장이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저 미친 개새끼, 쌍쌍바 새끼.”
대찬은 하마터면 그 말을 그대로 구본진에게 쏟아낼 뻔했다.
대찬은 정신을 붙들고 유치한 말꼬리 잡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동네 구멍가게는 사장님이 안 계시면 안 돌아가니까요. 모독의 의도는 없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쯤 하죠.”
대찬이 단상을 뜨려고 하자, 구본진이 다시 그를 붙잡았다.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대찬은 화를 삭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더 말씀하세요, 그럼.”
“언론의 보도에 대한 조 대표님의 태도는 기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예민합니다.”
“예민….”
“이런 보도에 일일이 반응하면 어떻게 회사를 제대로 경영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마다 빚을 내서 주식을 사실 겁니까?”
대찬은 구본진의 아래턱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었다.
지금의 상황을 ‘이런 보도’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구본진이 잘 알 것이다.
그러면서 가증스럽게.
“기자님의 판단은 존중합니다만, 저는 이 방법이 저와 회사와 주주의 권익을 지키는 것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제 판단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구본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생각이 있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상황을 봐야 하기 때문에.”
“아, 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런 경영 방식은 굉장히 아마추어적으로 보일 염려가 있습니다. 로튼 프룻츠가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기업이라고 할 때, 이는 굉장히 우려할 만한 지점입니다.”
이제 구본진은 대찬을 공격하기 위해 로튼 프룻츠가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기업이라는 말까지 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객관이라는 게 어디서 온 객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염려와 우려,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 경영에 대한 평가는 오직 결과로써 말씀드릴 겁니다.”
“경영권을 노린 외인의 투자, 그리고 거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영진의 부족한 경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로튼 프룻츠는 사기업입니다.”
“지금껏 외부의 많은 도움을 받아놓고, 이제 와서는 사기업이다?”
“외부의 많은 도움을 이끌어낸 건 순전히 국민 여러분의 지지 덕분이었습니다. 정부에 빚진 적은 없습니다.”
구본진은 남들이 다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추어, 아마추어.”
대찬은 구본진을 향해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구본진 기자님은 저랑도 잘 아는 사이시죠.”
“그렇긴 하죠.”
“그만큼 저를 잘 아실 겁니다.”
구본진은 고개를 들어 대찬을 똑바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