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72화
진위생은 안쓰럽게 웃으며 대찬을 다독였다.
“그래도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대표님은 일개 기업인이 아니에요. 얼마 전에 한국인이 좋아하는 한국인 여론조사 차트 인도 하셨잖아요.”
“사람들은 얕게 아는 만큼 얕은 거짓에도 쉽게 돌변해요. 대중이 나를 잘 아는 게 아니니까. 석우룡이 마음먹고 조지려 들면 위험해요.”
“…그렇다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방법은 없잖아요.”
대찬은 눈을 살짝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일단 책잡힐 일은 최소화해야겠네요. 직원들한테도 단단히 당부해놓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너무 괘념치 마시고요.”
대찬은 진위생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볼펜, 미안해요.”
금방 평정을 찾은 대찬을 보고 진위생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
진위생의 말은 심적인 위로가 됐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현실도피에 불과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석우룡 의원, 왜 전대미문의 야당 소속 장관이 되는 길을 선택했는가.
대찬은 그것부터 짐작했다.
석우룡 장관이 내각에 입성한 후.
그 당의 강성 지지자들은 석 장관을 비난했다.
당을 등지고 악마에게 복무하는 길을 택했다며.
정치판에서 쉰내가 날 정도로 눌러앉은 석 장관이 그걸 예측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 비난을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을 이익을 생각했다는 건데.’
뜨뜻미지근한 개혁적인 직무수행만으로는 수지가 안 맞는다.
국민적 관심을 받으려면 개혁이 아니라 혁명적 직무수행을 해야 한다.
혁명적이라는 말은 과격하다는 뜻.
나한테 적개심을 가진 갑이 과격하기까지 하다면.
‘최악이다.’
대찬은 암담한 결론에 도달했다.
“임명장, 석우룡. 국무위원에 임함.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보함. 대통령…….”
대찬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석우룡 장관의 모습을 불안한 모습으로 지켜봤다.
그는 헌정사상 가장 많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농림부장관이었다.
그는 아마 제1공화국에서 사형당한 조봉암 이후, 가장 유명한 농림부장관이 될지도 몰랐다.
때문에 그의 취임식에도 이례적인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걸 의식한 듯, 석우룡 장관의 취임사도 퇴고를 많이 거친 티가 났다.
“저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서, 농업, 임업, 식품업, 특히 축산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직무를 행하겠습니다. 야당 출신이라고 무작정 정부의 방침에 딴죽부터 걸지 않겠습니다. 또, 내각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여 정부의 부정과 무능에 눈감지도 않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석우룡 장관은 ‘축산업’에 부러 힘을 주어 발음했다.
대찬은 그 칼날 같은 발음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는 진위생에게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석우룡 장관의 일거수일투족을 나한테 보고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보고서 작성할 필요 없습니다. 구두로 전달하세요.”
“미행이라도 할까요?”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날 소리. 그냥 미디어에 노출된 동향만 체크해서 나한테 알려주면 돼요.”
“알겠습니다. 발자국 소리 작은 조선족 친구들 많이 아는데…….”
“당신 사장 신세 망치고 싶으시면 나 몰래 친구들한테 미행시키세요.”
진위생은 멋쩍게 웃었다.
석우룡이 혁명적 직무수행을 할 것이라는 대찬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가 처음 타깃으로 삼은 대상은 농협의 부패한 직원들이었다.
석우룡 장관은 직접 카메라 앞에 나서서 그런 천인공노할 직원의 비리사실을 공표했다.
“쌀 수매대금을 멋대로 횡령하고, 농민들이 먹을 거, 입을 거 아껴 한푼 두푼 모은 예금을 횡령해 주식으로 날려 먹고. 죄송합니다. 나쁜 말 좀 쓰겠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직원을 농협중앙회는 왜 방치하고 있습니까? 경찰은 뭐 하고 있습니까? 농민의 피눈물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는 피를 토할 기세로 격정적으로 외쳤다.
농협은 농림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특성상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는 농민들의 뒤통수를 때렸던 농협 직원들의 뒤통수를 후렸다.
당연히 농민, 그리고 석우룡 장관을 예의주시하던 국민들은 찬사를 보냈다.
기실 그가 그런 횡령 사실을 농협중앙회보다, 경찰과 검찰보다 먼저 알아챈 건 3선 국회의원으로서 지니고 있는 인맥과 사조직의 힘이 컸다.
필리핀의 대통령 두테르테는 한 도시의 시장을 역임했을 때, 직접 민병대를 조직해 마약사범을 총기로 사살하며 소탕했다.
그런 두테르테에게 시민들은 찬사를 보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그렇기에 휘두르는 칼이 공적인 권력인지 사적인 권력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농림부장관 석우룡의 대중인지도와 지지도는 쑥 올라갔다.
야당은 다른 여당 출신 장관들의 존재감을 그야말로 삭제해버리는 그의 행보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당 역시 대통령이 직접 뽑은 사람인 만큼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뭐라 제지를 하지 못했다.
청와대 역시, 온건파로 알려졌던 그가 투사처럼 나서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석우룡 장관의 행동에는 합당한 목적이 있었다.
때문에 당황하면서도 그의 폭주에 딴죽을 걸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일도 못하는 주제에 일 잘하는 장관을 왜 다그치냐는 비난에 직면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석우룡 장관은 청와대도, 여당도, 야당도 일절 비판하지 않는 존재였다.
부패한 농협 직원을 단두대에 올리는 것으로 등장하는 석우룡 장관.
그는 대중이 좋아할 일만 골라서 했다.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들의 품앗이를 해주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교감하고.
농민을 상징하는 배지를 제작해 옷깃에 부착하고.
관용차를 반납하고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기에 용이하다며 개인이 구입한 작은 경차를 이용하고.
부정하고 무능한 작태에 대해서는 물불 안 가리고 쓴 소리를 내뱉었다.
부패한 농협 직원을 규탄하면서 사용했던 ‘빌어먹을’이란 말이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의미로 석우룡 장관을 ‘빌어먹을 장관’이라고 불렀다.
이례적으로 장관의 직무에 대한 여론조사까지 이뤄졌다.
귀하는 석우룡 농림부장관의 직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긍정적 77%
-부정적 12%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면 그저 성씨 특이한 국회의원 정도로 여기거나 아예 존재 자체를 몰랐을 그였다.
그런 그가 일약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석우룡 이름표만 떼고 보면 나도 긍정적이라고 했을 거야.”
대찬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 거대한 지지세를 안고 석우룡 장관이 로튼 프룻츠를 덮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즉각적인 대응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심상치 않은 기미가 보였다.
시작은 극동일보의 기사였다.
-쵸 후쿠히로, 로튼프룻츠 지분 ‘10%’까지 늘렸다…2대주주 등극·경영권 노리나?
한태윤 이사는 대찬을 찾아와 직접 이 사실을 알렸다.
“극동일보에서 갑자기 쵸 회장을 들먹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영권을 노리나? 장난하나 이것들이…….”
대찬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곤두섰다.
역시 기사의 주인은 구본진이었다.
그러나 대찬은 여느 때처럼 가볍게 웃어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넘기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구본진의 기사를 시작으로, 주요 일간지에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쵸 후쿠히로, 로튼 프룻츠 ‘꿀꺽’할까.
-조대찬 21%, 쵸 10%…‘RF’ 지분 차이 급격히 줄어
-비도축육 첨단기술, 일본으로 넘어가나…쵸 회장 공격적 투자의 의미는?
“뭐야, 이거.”
지금까지 대찬을 겨누는 언론은 극동일보 하나뿐이었다.
다른 언론사들은 대찬과 로튼 프룻츠를 딱히 공격하지 않았다.
극동일보야 홍승연, 구본진이 얽혀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구태여 대중의 호감을 얻는 대찬을 두들겨 패봤자 나올 게 없었다.
그런데 구본진의 기사를 신호탄으로, 일제히 로튼 프룻츠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한태윤 이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심상치 않네요.”
“한 사람이 말한 걸 그대로 받아 적은 것처럼 논조가 일관되잖아.”
“쵸 회장 지분이 10프로인 건 맞지만 경영권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닌데요.”
“우리는 그걸 알죠, 내부자니까.”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쵸 회장은 대찬과 근소한 차이로 2대주주였다.
그러나 대찬의 우호지분을 계산하면 쵸 회장이 로튼 프룻츠를 먹어 치울 계제가 아니었다.
대찬의 지분만으로도 쵸 후쿠히로의 두 배가 넘는다.
동업자인 민승기의 지분까지 합하면 세 배 가까이 되었다.
거기에 기타 우호지분을 지닌 사람들까지 합하면 40%가량이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이 경영권을 얻으려면 그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주주에게서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 주주에는 지분 6%가량을 보유한 필래그룹의 것까지 포함되었다.
그러니 쵸 후쿠히로 회장에게 먹힐 가능성은 제로였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러나 단순히 쵸 회장의 지분을 들먹이는 것으로 시작한 언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기사 읽겠습니다.”
“네, 이사님. 들어보죠.”
한태윤 이사는 대찬에게 갈무리된 언론 보도 내용을 일일이 읊어주었다.
그건 말하는 입장에서도, 듣는 입장에서도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기에 말하고, 대답했다.
-“기업의 잠재가치를 예견하는 매의 눈으로 유명한 쵸 회장은 알고 보면 소름 끼치는 기업사냥꾼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기업사냥꾼? 부실경영으로 무너질 뻔한 회사 인수해서 소생시킨 건 들어봤는데……. 저기 나오는 쵸 회장이 내가 아는 쵸 회장 맞아요? 쵸파 회장이나 뭐 그런 거 아닌가.”
-“비도축육은 미래 고부가가치 산업인 동시에, 국민의 식생활을 책임질 미래 기간산업이다. 이런 비도축육이 외국인,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는 건 우려할 만하다.”
“언제부터 우릴 그렇게 알아줬다고.”
-“기술개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다르샨 싱 전무는 인도계 미국인이다. 향후 이 기술이 인도 혹은 미국으로 유출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반박할 가치도 없네요.”
대찬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로튼 프룻츠는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조대찬 대표, 민승기 대표가 만나 설립한 벤처기업이다. 일반 회사원 출신인 젊은 남성 두 명이서 창업한 회사가 갑자기 수천 배로 커졌다. 경영이 서툴고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지적된다. 그런 두 대표가 노회한 쵸 후쿠히로 회장의 노림수를 간파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젊은이 둘이서 이만큼 큰 회사를 만들었으면 칭찬은 못해줄망정 아예 저주를 들이붓네, 들이부어.”
-“로튼 프룻츠의 조대찬 대표는 경영학과 출신이다. 결국 로튼 프룻츠의 근간인 기술을 보유한 건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 두 명이다. 조대찬 대표는 이들을 단순한 개인적 친밀감으로 붙들어두고 있다. 상림그룹이 제시한 거액을 뿌리친 것도 이 단순한 인간관계에 기인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사적 관계의 문제가 기술의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
한 글자, 한 글자 귀에 박힐수록 대찬은 극심한 체력소모를 느꼈다.
한태윤 이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더 읽어드릴까요?”
“새로운 내용이 있습니까?”
“새로운 내용이라기보다는 지금껏 일러드린 말을 새롭게 조합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대찬은 손사래를 쳤다.
“그럼 됐습니다. 그만 읽어주세요.”
“이렇게 보도가 그야말로 폭탄처럼 쏟아지는 건, 아무래도 누군가의 사주가 있다고밖에는…….”
“석 장관일 가능성이 크겠죠.”
“예, 제 생각도…….”
석우룡 장관의 총부리가 이번에는 자신을 겨눌 거라는 생각에 대찬은 한숨을 뿜었다.
“지금까지 나온 보도를 종합하면… 조대찬이가 쵸 후쿠히로 회장의 공세에 버틸지 의문이다. 또, 기술자들을 잘 붙들어놓을지 의문이다. 이 두 가지인데요.”
“맞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조대찬만으로는 회사를 지키기 어렵다, 겠죠.”
“네, 그렇겠죠. 그럼 회사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방법은 동시에 석우룡 장관에게 이익이 돼야겠죠.”
한태윤 이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부의 관리 하에… 그럼 국유화를 의미하는 걸까요.”
“국유화는 지나치게 사회주의적이고 과격해요. 아마 그 단어를 쓰진 않을 겁니다.”
“그럼 공기업화나 준공기업화 같은 말을 쓸까요.”
“그것도 노골적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시점에서는. 저 같으면 이렇게 하겠네요.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지원.”
“그리고 석우룡 장관은 이 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고 들겠죠.”
“석 장관이 정계와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상황이니…….”
대찬과 한태윤 이사는 서로를 바라보며 난감한 웃음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