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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71화 (471/556)

난 할 수 있어 471화

대찬은 속으로 하나하나 시시콜콜 되짚으며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을 비교했다.

그건 자기만 아는, 몸서리 쳐지도록 짜릿한 경험이었다.

대기업 계열사 늦깎이 대리에서 시총 5천억을 돌파한 촉망 받는 기업가가 되었다.

몇 년째 시리던 옆구리를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따뜻하게 덥혔다.

오래된 베스트프렌드마저 나가떨어질 듯 보잘것없는 인간관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찬은 마누라도 모르는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서, 혼자 서재에서 미친놈처럼 웃었다.

2월.

대찬은 거동이 불편한 고수혁의 할머니 대신에 고수혁의 졸업식에 참석해주었다.

“아, 오랜만이네, 학교.”

대찬은 인생을 한 꺼풀 벗어던지는 기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교차하는 학사모들을 보고 빙긋 웃었다.

덩달아 오랜만에 모교에 방문하게 된 마강국도 웃었다.

“학교는 그대로구나.”

“그대로지.”

대찬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2월의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안 오셔도 된다니까. 바쁘실 텐데.”

“오늘만 쓰일 꽃다발을 왜 3, 4만 원씩 줘가면서 사는 줄 알아? 이게 있고 없고에 따라서 기분이 완전 다르거든.”

대찬은 고수혁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고수혁은 뭐 하러 왔냐고 툴툴대면서도 꽃다발을 받아들면서는 뺨에 옅은 홍조가 감돌았다.

“고마워요.”

“이제 갓 사회로 나오는 인재 하이재킹하는 목적도 있어.”

“네? 아휴, 진짜.”

“고수혁이는 로튼이 침 발라놨으니까 건들지 말라는 거지.”

“로튼 프룻츠 간다니까요. 그렇게 제 말을 못 믿으세요?”

“사람의 의지는 약해. 너도 누가 통장에 200억 꽂아준다고 하면 거기로 갈 거잖아?”

“저는 은 소장님처럼 쪼잔한 인간이 아니에요.”

대찬은 흐흐 웃었다.

그런 대찬을 알아본 학사모들은 수군거렸다.

“어, 저기 조대찬 아니야?”

“맞네. 오늘 왜 왔데?”

“야, 조대찬도 우리 학교 나왔잖아.”

“아, 그러네.”

고원대는 고수혁의 모교이기도 했지만 대찬의 모교, 홈그라운드이기도 했다.

그 학번에서 가장 잘나가는 선배의 등장에 후배들은 술렁였다.

대찬은 고수혁에게 꽃다발만 하나 안기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소식 빠른 총장의 손에 이끌려 즉석 축사까지 해야만 했다.

대찬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제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잘난 후배님들 앞에서 떠들어댈 자격이 있겠습니까. 단지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시면 기가 막히게 훌륭한 여배우랑 결혼할 기회가 올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 치열하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앞날에 기울인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길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후배들은 의미 없는 축사로 시간을 길게 때우지 않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박수.

그리고 윤이영을 낚아챈 대찬을 부러워하는 의미로 박수를 쳐주었다.

고수혁은 졸업하자마자 로튼 프룻츠 단 한 곳에만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연구원 채용을 맡게 된 은오영 소장이 대찬에게 은근히 물었다.

“얘 꼭 뽑아야겠죠?”

“저 신경 쓰지 말고 소장님의 잣대에 맞게 판단하세요.”

“제 잣대로라면 얜 탈락인데요.”

“뭐라고요?”

“…얘랑 저랑 불편한 관계라서.”

하긴, 우수한 성적으로 고원대 입학할 인재를 중림대에 처박으려고 했으니.

입시 사기의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이니.

대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잇… 그런 잣대 말고요!”

“네…….”

은오영 소장은 어깨를 움찔하면서 쩝, 입맛을 다셨다.

상림그룹의 영입 시도 이후 은오영 소장은 완전히 대찬의 한 입 거리였다.

고수혁은 2019년 상반기 로튼 프룻츠 연구원 공채에 당당히 합격했다.

대찬은 고수혁을 따로 불러 축하하지 않았다.

그건 고수혁에게도, 그리고 그와 함께 채용된 동기들에게도 별로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고수혁 역시 대찬의 기대에 부응했다.

어떤 특혜도 요구하지 않고, 대찬에게 어떤 사적인 부탁도 하지 않았다.

단, 대찬이 한 가지 배려한 게 있다면 중증 치매 환자인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그를 위해 다른 기숙사보다 조금 좋은 조건의 사택을 내주었다는 것이었다.

로튼 프룻츠는 점점 기술을 고도화하고 몸집을 불렸다.

혹자는 5천억을 상회하는 기업가치가 거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찬은 로튼 프룻츠가 아직도 저평가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그 확신에 힘을 보태주는 건 쵸 후쿠히로 회장의 행보였다.

상림그룹이 시장에서 로튼 프룻츠 주식의 매집에 나섰다.

쵸 후쿠히로 회장 역시 이에 질세라 로튼 프룻츠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개미가 아니라 큰손이 움직이니 로튼 프룻츠의 주가는 가파른 우상향에서 꺾일 줄을 몰랐다.

“쵸 회장님, 너무 달리시는데.”

대찬은 쵸 후쿠히로 회장의 매수가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쵸 후쿠히로 회장이 지휘하는 아시아·태평양 펀드의 지분은 신주발행 이후 세가 꺾였다가, 다시 10%까지 높아지게 되었다.

한 자리 수와 두 자리 수는 체감이 확 달랐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들이기 전에 미리 언질이라도 줄 걸 그랬나? 근데 이 정도 규모는 내가 일일이 챙기는 금액은 아니라서. 나도 뒤늦게 알았어.”

“하하……. 이렇게 사후에 전화 주시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렇지? 좀 부담되나?”

“되긴 합니다. 지금이야 회장님이 절 예뻐하시지만, 훗날 경영권 보장에 위협이 안 된다고 장담할 순 없으니까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네.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우리가 제일 먼저 알아보고 돈을 밀어 넣은 회사 아닌가. 재미를 볼 수 있는 최대한으로 보긴 해야지.”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인데요.”

“무슨. 추세로 보면 연내에 대량생산이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야. 지금 바짝 땡길 때야.”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물류비 지출이 저번 분기에 비해 눈에 띄게 늘었어.”

“…….”

“평택 공장, 아, 당신 회사는 목장이라고 부르지? 평택 목장하고 부산 목장 완공을 서두르는 게 보인다더구만. 왜 서두를까.”

“도사시네요.”

“내가 도사가 아니라 내가 비싼 돈 주고 데려온 직원들이 도사지. 정보는 돈 쓴 만큼 들어오게 돼 있어.”

“도사를 부하로 두고 부리는 사람은 더 대단한 분이시죠.”

“들어온 정보가 이러니 지금 돈을 안 밀어 넣고 배기겠나? 그나마 조 대표 덜 걱정하라고 이쯤 해둔 거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오는군요.”

“비꼬기는. 하하.”

둘은 웃으면서 통화를 종료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전화를 끊고도 웃었다.

그러나 대찬은 마냥 그러지만은 못했다.

국회의원 석우룡.

창문에 한 글자씩 큼지막하게 박아놓은 지역구 사무실 안에서, 석우룡 의원은 참모들과 둘러앉았다.

자기 목이 반쯤 잘려 달랑달랑하게 만들어놓은 김민재는 축출되고 없었다.

석우룡 의원과 참모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있었다.

무엇을 의논하는가.

“환경부든 농림축산부든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단 제의를 받을지 말지, 그것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저는 반댑니다.”

참모 중에 가장 고참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적은 신참이 멋쩍게 웃으면서 조심스레 반론을 폈다.

“그래도 이건 의원님의 존재감을 한 차원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횝니다.”

“야, 저쪽 패를 받아들이면 당에서 좋아하겠어?”

정부는 석우룡 의원에게 장관직을 제안했다.

국회의원이 장관으로 가는 일이야 흔했다.

그런데 석우룡은 야당 소속이었다.

야당 소속 국회의원이 장관으로 가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협치내각이라는 이름하에 야당 의원들에게 제안이 갔지만, 그들은 번번이 고사했다.

야당 소속으로 내각에 참여하는 건 동지들에게는 일종의 배신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는 상황.

그렇기에 고참 참모는 이를 완강히 반대했다.

경제부총리나 사회부총리, 하다못해 외교부, 행안부, 법무부 같은 알짜 장관이라면 또 몰랐다.

석우룡 의원에게 제안이 온 자리는 저런 알짜가 아니었다.

환경부장관과 농림축산부장관 두 곳뿐이었다.

정치인으로서 이름을 알리기에는 그다지 끌리는 자리는 아니었다.

고참과 달리 신참은 석우룡 의원에게 이 제안을 수락하라고 진언했다.

“3선이면 중진으로 분류됩니다. 그간 원내수석부대표도 하셨고, 당 사무총장도 하셨으니 당대표, 원내대표 빼고는 당에서의 소임은 다 하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차라리 원내대표를 하시라고 해.”

“우리 당 원내대표는 거의 대여 강경노선을 견지하는 중진들이 도맡다하지 않습니까. 우리 의원님은 온건 성향으로 분류돼서 원내대표는 어렵습니다.”

석우룡 의원의 지역구는 흥읍.

50 대 50의 균형을 유지하는 지역구이니만큼, 석우룡 의원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중도·온건 노선을 유지해야만 했다.

한쪽으로 확 쏠린 모습을 보여주면 자리가 날아간다.

그 정도로 지역구의 민심은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저울처럼 평형이었다.

“환경부장관, 농림부장관, 저건 쥐덫이야, 쥐덫. 쥐덫에 빵이라도 큰 덩어리로 올려놓으면 몰라. 눈곱만한 빵 쪼가리를 올려놓고 와서 먹으라니, 양심이 있어야지!”

“내각에서 정부를 견제하고 존재감을 발휘하시면 대선주자로 급부상할 수도 있습니다.”

신참의 진언이 고참에게는 치기 어린 남가일몽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저는 반댑니다.”

석우룡 의원은 팔짱을 낀 채로 고참과 신참의 갑론을박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 논의가 계속 쳇바퀴만 돌자, 그가 무거운 입술을 뗐다.

“어제 대표님하고는 통화했어.”

“뭐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안 된다 하시겠죠?”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하시더구만.”

“예? 그럴 리가……. 반어법이겠죠.”

석우룡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장관들을 압도할 정도로 존재감을 보여주면 정부의 무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환경부나 농림부에서는…….”

“퍼포먼스가 불량한 데 따른 책임은 온전히 나한테 있다더군. 도와주지 않겠다고 했어.”

“그렇다면 꼼짝없이 외통수에 걸리고 맙니다.”

“하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어. 장관직을 독보적으로 해내면 나는 차기 대선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다.”

“의원님!”

“이번에 민재 그 새끼, 아니 정확히는 조대찬 그 새끼 때문에 지역구 민심이 안 좋아.”

“그건 그렇지만…….”

“조직도 절반은 날아갔어. 이대로라면 내년 총선, 장담할 수 없다. 아니, 도리어 불리해.”

“…….”

“빵 쪼가리가 쥐덫에 올라와 있다고? 빵 쪼가리도 물에 불리면 커진다. 그거 먹고 쑥쑥 자라서 쥐덫을 덤벨처럼 으쌰으쌰 들게 되면 되잖은가.”

“하지만…….”

“내가 장관으로 빠지면 네가 나 대신 흥읍에 출마해라. 자, 그러니 갑자기 반대하기 싫어지지?”

“그, 그게…….”

석우룡 의원의 말에 고참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정부의 이 제안이 자기 목을 조르는 자충수라는 걸 증명해주지.”

“바, 받으신다면 어떤 자리를…….”

“농림부 장관.”

“그, 그래도 환경부가 낫지 않을까요? 태클 거는 자리인데. 그럼 눈에도 더 잘 띄고…….”

“태클 걸어서 고꾸라뜨리는 상대가 재벌이야, 재벌. 재벌하고 붙어서 나더러 어쩌란 건가?”

“…그건 그렇군요.”

“농림부장관 풀네임이 뭔가. 농림, 축산, 식품부 장관이야. 건드릴 게 많다는 건 약점인 동시에 하기 나름으로 강점이기도 하지.”

석우룡 의원은 농림부 장관직을 수락했다.

전대미문의 사건에 제법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청문회는 역대 그 어떤 청문회보다도 훈훈하고 화기애애했다.

여당에서는 어쨌든 자기 내각이니 공격하지 않았고, 야당에서는 어쨌든 자기 동료이니 공격하지 않았다.

털면 훈련소 모포처럼 먼지가 풀풀 날릴 석우룡 의원이었지만, 모두 불문에 부쳐졌다.

“빌어먹을.”

대찬은 석우룡 의원이 농림부장관에 임명되었다는 뉴스를 접하자마자 들고 있던 볼펜을 집어 던졌다.

예상했다는 듯, 함께 있던 진위생이 떨어질 볼펜을 받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 같으면 진위생에게 미안하다고 했을 대찬이었다.

그는 그럴 겨를도 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이 소식은 대찬에게는 대형악재였다.

로튼 프룻츠에서 터진 이슈를 정부 부처에서 처리할 일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이슈에 대한 유관부처는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농림수산식품부 정도이다.

이 중에 로튼 프룻츠에 가장 깊은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부처가 바로 농림수산식품부였다.

그 수장이 다름 아닌 석우룡이라니.

대찬은 지끈지끈 오르는 두통에 이마를 매만졌다.

“하필 국내 최초 야당 현역 의원 출신 장관이 석우룡이라니…….”

감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는 대찬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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