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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70화 (470/556)

난 할 수 있어 470화

대찬은 끊긴 전화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다음 총선 때까지만 잘 넘기면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끈 떨어진 뒷방 늙은이니까.”

대찬은 어떤 방식으로든 석우룡 의원과 결별하고 싶었다.

당장 이번에 봉사 건만 해도 위험했다.

만일 순순히 석우룡 의원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김민재 후보의 현수막에 대문짝만하게 대찬의 얼굴이 내걸렸을 것이다.

그럼 김민재 후보는 적잖은 표를 챙길 수 있을지 몰라도 대찬에게는 최악이었다.

대찬이 정치와 깊이 결탁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광고하면 대찬의 가치는 뚝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로튼 프룻츠의 브랜드 가치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어떻게 잘 무마했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석우룡 의원이 곤란한 요구를 해올지 몰랐다.

사업이 순탄하게 궤도에 안착한 지금.

석우룡 의원은 어쩌면 득보다는 실이 큰 존재였다.

그를 도려낼 가장 좋은 기회는 다음 총선이었다.

총선에서 그에게 결정타를 먹이는 형태로 결별하면.

석우룡 의원은 힘 한번 제대로 못 쓰고 그대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총선 시즌이 됐을 때, 딱 타이밍을 맞춰 그를 날릴 수 있을까?

‘어렵다.’

맹자 왈, 천시, 하늘이 내려준 때는 지리, 지형의 이로움만 못하다 했으니.

대찬은 천시를 기다리지 않고, 일단 지형부터 이롭게 이루는 쪽을 선택했다.

국회의원은 개인 하나하나가 헌법기관이다.

더군다나 3선의 중진의원이면 중소기업 하나쯤 쌈 싸 먹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러나 대찬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저울의 반대편에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는 좋은 선택지.

그런 건 대찬의 인생에서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저울의 이쪽을 취하려면 반대의 대가를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신혜원의 일은 석우룡 의원에게 유효타를 먹이고 결별하기 위해 벌인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계산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우발적.

성유정은 대찬이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길 약간의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 힘의 교류는 쌍방이었다.

성유정의 말 역시, 대찬에게 방아쇠를 당길 약간의 힘을 전해주었다.

저런 연약한 사람도 대의명분에 밥벌이를 저버리려고 하는데.

김민재 후보가 출당되고 어부지리로 최종 후보로 낙점된 후보 역시 선거에서 떨어졌다.

50 대 50의 지형에 신혜원 이슈는 결정적이었다.

최소한 49 대 51로 만들어낸 건 전적으로 신혜원 이슈였다.

흥읍시 몫의 경기도의원이 반대당으로 넘어가고, 시의원들도 줄줄이 낙선했다.

어떤 선거구에서는 반대 당 의원 2명만 당선되기도 했다.

석우룡 의원의 기반이 송두리째는 아니더라도 반파 수준으로 타격을 입었다.

지상파 방송을 탄 시설을 보건복지부는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즉시 감사에 착수했다.

명시적으로는 이 사태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는 대찬은 유유자적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이슈도 잠잠해질 즈음.

대찬은 성유정을 만났다.

못 본 사이, 그녀는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자기 손으로 신혜원과 원장의 남편 김민재를 골로 보냈으니 당연히 해고되었다.

그 이후로도 예상대로 그녀는 재취업에 번번이 실패했다.

대찬은 안쓰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힘드시죠.”

“네, 조금.”

“많이 힘들잖아요.”

그러자 성유정은 이게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표정으로 대찬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네, 많이 힘드네요.”

“후회하세요?”

“조금. 이건 진짜 조금이에요.”

“그래요?”

성유정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방 먹였으니까.”

대찬은 성유정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요. 그냥 한 방도 아니죠. 핵폭탄 한 방.”

“제 주제에 그 정도면 됐어요. 그 뭐랄까, 무협지에 나오는 동귀어진, 그런 거.”

성유정은 그렇게 말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유정 씨, 흥읍 살아요?”

“네? 네…….”

“혹시 다음 일자리가 사회복지 쪽이 아니어도 괜찮겠어요?”

대찬의 질문에 성유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땐가요, 어디. 지금 일하는 편의점도 사회복지 쪽은 아니거든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민동에 있는 카페에서 일하는 건 어떠세요.”

“카페요? 글쎄요……. 제민동은 저희 집에서는 좀 거리가 있거든요. 아르바이트이긴 매한가지고.”

“고용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급료도 원래 일하던 곳보다는 훨씬 괜찮게 드릴게요.”

하긴, 최저임금 밑도는 신혜원보다 안 괜찮을 순 없지.

대찬은 ‘훨씬’이라는 말을 한 번 더 덧붙였다.

그러자 성유정은 눈을 깜빡였다.

“그런 좋은 자리가 있어요?”

“지금은 없는데 곧 생길 거예요. 저희 회사 복지동에 카페 만들 예정이라.”

“아……. 근데 전 카페에서 일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괜찮을까요.”

그냥 좋은 기회가 왔으면 넙죽 받으면 될 걸.

성유정은 제 코가 석 자면서도 시시콜콜 남의 사정을 따져주었다.

“직원들 맛없단 소리는 못할 거예요. 저희, 원래 원두 수입하던 회사거든요. 카페에서도 우리 원두 쓸 거예요. 그래서 커피 맛없다고 불평도 못해요.”

“하하……. 네, 그럼 기회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오픈까지는 한두 달 남았어요. 편의점 관두시고, 그동안 바리스타 자격증은 아니라도 간단한 커피 제조법 같은 건 배워두세요.”

“그럴게요.”

대찬은 웃으면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학원비하고, 카페 오픈 전까지 일 쉬시는 동안 쓰시라고 넣었어요.”

“…네?”

“얼마 안 넣었어요. 부담 갖지 마시고.”

대찬은 성유정이 또 손사래를 치며 거부할까봐, 봉투를 쑥 그녀의 앞에 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유정은 안에 든 돈을 흘끗 보고 놀라서 일어나 대찬을 찾았지만, 대찬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 * *

고원대 후배, 그리고 동아리 후배가 되었던 고수혁은 어느덧 졸업반이 되었다.

남자 동기들은 군복무 때문에 아직 졸업까지는 꽤 시간이 있었지만, 고수혁은 군복무가 면제되었다.

조손가정에 생계곤란.

고수혁은 주말에 여유를 얻어 로튼 프룻츠 흥읍캠퍼스를 둘러보았다.

대찬이 그의 일일 가이드를 자처했다.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부지에 올라선 현대적인 건물들을 보고 고수혁은 놀라움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잘해놓으셨네요.”

“당연하지, 누구 작품인데.”

콧대가 높아진 대찬을 보고 고수혁은 흘끔 눈을 흘겼다.

“누가 보면 꼭 선배님이 만들어놓은 줄 알겠네요.”

“어?”

“일류 건축가가 설계하고 인부들이 지으신 거지, 선배님은 뭐 한 게 있으세요?”

“너무 그러지 마라. 건물배치 같은 건 그래도 내가 주도적으로 개입했거든. 저기 중심부에 본사 사옥 보이지?”

“크리스탈 재떨이같이 생긴 저거요?”

“아, 거, 말을 해도.”

“저거 왜요?”

“저건 거의 디자인 자체도 내가 한 거나 다름없어. 과일바구니랑 로마 콜로세움을 모티브로 해서…….”

대찬의 말이 길어지려고 하자 고수혁은 단호한 감상평으로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구려요.”

“어, 그래…….”

대찬은 심통 난 표정으로 걸었다.

“갑자기 걸음이 왜 이렇게 빨라지세요? 혹시 삐쳤어요?”

“삐치긴 누가 삐쳐. 모함하지 마.”

“와, 목소리에 심술 낀 것 봐. 삐친 거 맞네.”

“아니라고!”

대찬은 어째 고수혁과 있으면 자신의 정신연령을 고수혁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로튼 프룻츠 캠퍼스를 걸으며 고수혁을 곁눈질했다.

“이제 뭐 할 거야?”

“뭐 하냐뇨?”

“졸업하고 뭐 할 거냐고.”

그러자 고수혁은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대찬을 쏘아봤다.

“옛날부터 말했잖아요. 나, 로튼 프룻츠에 취직할 거라고.”

“졸업하자마자?”

“네, 돈 급해요. 이제 장학금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대찬과 고수혁이 회사 부지를 걷고 있으니 지나가는 직원들이 그를 알아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숙사에 지내며 근무하는 직원들이었다.

대찬은 그들과 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잠깐 고민하던 고수혁은 대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좀 망설여지긴 해요.”

“왜, 네 스펙이면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으니까?”

고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목표는 일관돼요. 근데 학사로 취직할지, 석·박사를 따고 취직할지 고민이에요. 욕심 같아서는 후자인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으니까.”

“나는 학부 졸업하자마자 이쪽으로 와줬으면 좋겠는데.”

고수혁은 난색을 표했다.

“저는 로튼 프룻츠에 정말 크게 기여하고 싶어요.”

“나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

고수혁은 대찬에게도 탐나는 인재였다.

기업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재는 우선 준비가 탄탄해야 했다.

일찍이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결정하고, 그걸 위해 꾸준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사람.

뭘 하고 싶은가에 대한 결론은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좋았다.

자세하고 구체적 이기로는 또래 중에 고수혁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로튼 프룻츠를 목표로 성실하게 노력했으니.

대찬은 고수혁이 입사만 하면 다르샨 싱 전무, 은오영 소장의 1세대 연구진의 뒤를 이어 2세대를 책임져줄 재목이라고 여겼다.

대찬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학부 졸업하자마자 들어와.”

“조금 더 역량을 쌓고 나서 입사해야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찬은 피식 웃으며 고수혁의 어깨를 붙들었다.

“야, 어깨에 힘 좀 빼. 너 이제 스물셋이야. 네가 해봤자 얼마나 큰 역할을 하겠어.”

“…그러니까 석·박사 딴다는 거잖아요…….”

“석·박사 따고 들어와도 마찬가지야. 이제 이 회사, 누구 한 사람 힘으로만 돌아가는 그 정도 규모 아니게 됐어.”

“비도축육의 조물주 격인 싱 전무님하고 은 소장님 빼고요.”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입사원은 어쩔 수 없이 일개 부품에 불과해. 대우는 인격적으로 하지만 기능은 부품일 뿐이야.”

“부품도 부품 나름이죠.”

“학부 졸업하고 연구원으로 바로 들어와. 일하면서도 학위 딸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어차피 세계 어느 대학원을 가도 비도축육 관련된 걸 가르쳐주는 곳은 없어. 은 소장님이 최고권위자니까 옆에 착 달라붙어서 배우라고.”

“알았어요.”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채용은 공정하게 이뤄질 거야.”

“알아요. 저는 딱 선배님처럼 할 거예요.”

“나처럼?”

“필래 서청수 회장이 그냥 들어오라고 했는데 기어코 시험 보고 들어가셨잖아요.”

“넌 그걸 어떻게 알았냐.”

“조금만 파보면 알 수 있는 건데요.”

대찬은 흐흐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틱틱대면서 너 나 은근히 좋아하나 보다?”

“아, 그런 말씀 할 때마다 정떨어지는 거 알죠.”

“근데 너 그건 모르지.”

“네?”

“난 면접 때 결국 회장님 들먹였거든.”

“…그래요? 좀 실망이네요.”

대찬은 부랴부랴 변명에 나섰다.

“면접관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야코 좀 죽이려고. 그거 아니었으면 나 진즉 떨어졌지. 넌 그러지 마.”

“로튼 프룻츠가 그런 몰상식한 사람을 면접관으로 안 내세우면 저도 선배님 들먹일 이유가 없거든요.”

“그건 그래. 배고프지. 밥이나 먹으러 갈까.”

“사모님도 같이 식사하면 안 돼요? 저 팬인데.”

“안 돼.”

구내식당을 이용할까 하다가 식사하는 직원들이 체할까 봐, 대찬은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해가 바뀌었다.

2019년.

대찬에게는 의미가 있는 해였다.

그가 첫 번째 삶을 마감한 해.

그의 처지는 그때와는 사뭇, 아니 천지 차이로 달라져 있었다.

첫 번째 삶.

상사 하나를 어쩌지 못해 꽉 쥐여살던 대찬.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군인은 전장에서 죽는 게 명예라지만.

회사원이 회사에서 죽는 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개죽음이었다.

연봉은 몸 하나 건사하고 가끔 부모님께 용돈 드릴 정도.

안정적인 미래를 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도.

결혼은 의지는 있으나 능력 부족으로 꿈도 꾸지 못함.

교우관계 불량.

사내평판 중하.

그런 첫 번째 삶은 두 번째 삶에서 완전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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