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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69화 (469/556)

난 할 수 있어 469화

“그래서 여태 고민했어요. 확 질러버리고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마음먹은 게 수백, 수천 번이에요.”

“그런데요?”

“근데 이젠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밥 빌어먹고 살기 싫어졌어요.”

“지금이야 홧김에 그렇지만 몇 시간 지나면 다시 원래의 결론으로 되돌아올지도 몰라요. 그땐 너무 늦어요.”

신혜원 직원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홧김이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네, 지금까지 갈등은 제 마음이 50 대 50이라서 결정을 못했던 거예요. 방아쇠에 손가락은 얹었는데 살짝 당길 힘, 의지, 그게 없어서 여태 망설인 거예요.”

“음.”

“조 대표님이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이 저한테 방아쇠를 살짝 당길 약간의 힘을 보태줬을 뿐이에요.”

대찬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름이 뭐예요?”

“성유정이요.”

“좋아요, 유정 씨.”

대찬은 차에 비치된 메모지에 휴대폰 번호를 적어서 건넸다.

“댁으로 가서 이쪽으로 전화를 거세요.”

“조 대표님 번호인가요?”

“아뇨, ONB 최재한 기자. 제 이름 대고 말하면 도움을 줄 거예요. 그때 다시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먹게 되면 그건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차에 올라탔다.

그는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성유정에게 말했다.

“무슨 결정을 내리든 유정 씨의 그 마음은 존경해요. 자기 밥벌이까지 포기할 엄두를 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그래봤자 월 백삼십인데요, 뭐.”

“최저도 못 받고 있네요? 그것도 꼭 최 기자한테 말하세요.”

성유정은 멋쩍게 웃었다.

“조 대표님이 저쪽하고 척 지면 감당해야 할 손해가 월 백삼십보다 크다는 거, 알고 있어요.”

“저는 저 사탄들하고 척 져봤자 밥 굶고 다니진 않아요. 월 백삼십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백 퍼센트를 포기할 마음이라는 게 중요한 거죠. 고마워요.”

성유정은 대찬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찬은 창문을 닫았다.

마강국은 액셀을 밟고 신혜원에서 멀어졌다.

대찬은 좌석에 목을 반듯이 붙이며 마강국에게 물었다.

“저 사람, 사고를 칠까, 안칠까.”

“쳐. 백 프로 쳐.”

“어떻게 장담해?”

“저 사람 눈빛에 담긴 똘끼가 딱 조대찬이랑 비슷했거든. 아주 대형사고 칠 눈빛이야.”

대찬은 웃으면서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석우룡 의원에게서 여러 번 전화가 걸려왔다.

대찬은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최재한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받았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큰 건수는 전길재한테 던져주고, 나는 이런 건수만 받아먹으라는 거야?”

“최 기자, 언제부터 그렇게 싹수 노란 펜대가 돼버린 거야.”

“아니, 보도를 내긴 낼 건데…….”

“그럼 됐지, 뭐. 그거 건수도 작은 건수가 아니야.”

“작은 건수가 아니라고?”

“그 복지시설 신혜원 원장 남편이 흥읍시장 후보로 유력시 되는 인간이야. 엮으면 엮여.”

“…그래?”

“그래.”

“잠깐, 그러면 이 인간, 석우룡 라인 아니야?”

“맞아.”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최재한은 대수롭게 받아들였다.

“석우룡 건드려서 어쩌려고? 안고 가도 모자랄 판에 아예 코털을 잡아 뜯어?”

“그러게.”

“그러다 신세 망친다, 너.”

“내 신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최 기자님은 기자님 일이나 하세요.”

그 후로도 최재한은 몇 번이나 우려를 표했지만 대찬의 입장은 흔들리지 않는 강행이었다.

결국 최재한은 건수를 터트렸다.

이런 쪽으로는 전길재보다는 최재한이 잘 드는 칼이었다.

성유정은 용기를 내서 신혜원의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최재한에게 일러주었다.

오래 고민한 만큼 쌓인 자료도 방대했다.

몇 가지를 추려 화력을 집중해야 하는 입장의 최재한이 대체 뭘 선택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할 정도였다.

보도전문채널인 ONB에서도 최재한은 이제 중량감 있는 일원이었다.

보도본부장의 1번 타자라고 불리면서 각별한 신임까지 얻고 있었다.

최재한은 실력과 인망을 무기로 이 사건을 시리즈로 엮어 방송에 내보냈다.

-신의 은혜라던 복지시설, 민낯은 신의 저주였다.

그 표제로 여러 건의 보도를 내보냈다.

신혜원은 그야말로 악행의 종합선물세트였다.

입소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직원에 대한 억압.

운영자금의 수상한 흐름.

대찬은 그 보도가 나가기 바로 전날, 전혜정 원장의 개인 메시지 계정을 훑어보았다.

프로필 사진은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탄탄한 복근을 드러내며 마라톤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상태 메시지.

‘하루하루 과분하게 행복한 삶^^ 흥읍시장은 김민재!’

대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슥슥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지난 사진들도 보았다.

방콕 황금사원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마라톤.

흥읍시 유지들과의 만찬.

에펠탑 앞에서 한 컷.

몽마르뜨 언덕 위에서 한 컷.

다시 마라톤.

인도 타지마할 앞에서 한 컷.

또 마라톤.

‘참, 인생 재밌게 사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황금사원과 에펠탑의 사이는 석 달.

몽마르뜨 언덕과 타지마할 사이는 넉 달.

대찬은 얕은 숨을 내쉬며 액정을 껐다.

ONB는 신혜원을 정조준했다.

최재한은 보도가 나가기 전,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가진 신혜원 관련 보도의 소스는 두 군데야.”

“하나는 나고, 나머지 하나는 성유정 씨겠지.”

“맞아. 나는 이 두 군데 소스에서 나온 정보 중에 한 가지를 골라야 돼. 어떤 걸 첫 타자로 내보낼지.”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둘 다 내보낼 거 아니야? 그게 중요한가?”

“중요해. 실탄은 여러 발 채워놓긴 했는데 사람 죽이는 데는 한 발이면 충분하거든.”

“첫 번째 보도만으로도 신혜원, 그리고 김민재가 고꾸라질 것이다?”

“만약 내가 가진 게 한 발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하겠지. 그런데 쏘고 나서 그다음 총알을 장전하는 시늉만 해도, 더 못 버틸 거야.”

“당에서 먼저 조치를 취하겠지. 고작 시장 후보 하나 때문에 선거를 망칠 순 없으니.”

“그래, 그래서 첫 번째 보도가 마지막 보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봐. 그래서 의미가 있지.”

“선택은 네 몫이잖아. 굳이 나한테 전화해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고민돼서. 일단 성유정 씨가 준 정보를 먼저 내보낼까 하는데.”

“음,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네 친구니까.”

대찬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거, 네가 준 정보로 먼저 때리면 너는 석우룡하고 완전 게임 끝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그것보다는 차라리 성유정 씨가 준 정보로 때리면, 네가 피해갈 구멍이 있어.”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곤란해지기는 성유정 씨도 마찬가질 텐데.”

“뭐…….”

최재한은 말끝을 흐렸다.

그 사람이 스스로 결단을 내린 거다.

책임도 당연히 그 사람의 몫이다.

까놓고 말해서, 내 알 바 아니다.

그런 가혹한 말을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도 쉽게 주워섬길 성격이 아니었다.

“내부고발자로 찍혀서 완전히 그 업계에서는 아웃되겠지.”

대찬도 이미 성유정에게 일어날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다.

“가명 처리 해봤자 알 사람은 다 알 거야.”

“모를 리가 없겠지.”

“듣자 하니 지역 시설 운영자끼리 단체 대화방도 활성화 돼 있다더라고.”

“안 돼 있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대찬은 펜촉으로 탁자를 톡톡 건드렸다.

최재한은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람이야.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어. 친구, 그냥 친구도 아닌 둘도 없는 친구에게 리스크를 감수시키고 싶지 않아.”

“눈물 나게 고맙네.”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그래도 네 취미가 정의의 사도 코스프레니까 너한테 굳이 이렇게 전화로 일러주는 거야.”

“정의의 사도도 누울 자릴 보고 다리를 뻗는답니다. 피할 수 있는 리스크는 피해야지.”

대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최재한은 그가 자기가 짊어질 수 있는 짐을 약자한테 떠넘길 순 없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대찬은 성유정의 가녀린 두 어깨에 짐을 지우겠다고 말했다.

너무나도 손쉽게.

“…괜찮겠어?”

“성유정 씨는 안 괜찮겠지. 하지만 본인이 감수하겠다고 했어. 거기에 내가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이유는 없어.”

“많이 변했네, 조대찬이.”

“요즘 같은 세상에 변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나?”

대찬은 가볍게 반문하고 전화를 끊었다.

최재한은 대찬의 말대로 했다.

대찬이 제공했던 녹취록은 사용하지 않았다.

순전히 성유정의 손으로 건네진 정보들만 내보냈다.

최재한은 필드에서 오래 뛴 프로였다.

전길재만큼 독하진 못해도 그만큼 날카롭기는 했다.

상대방의 관절을 어떻게 꺾어야 가장 아플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혜원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신혜원의 수상한 자금흐름을, 후속보도 해드리겠습니다. ONB 뉴스, 최재한입니다.”

최재한이 떨어뜨린 폭탄은 그야말로 메가톤급.

흥읍시의 선거판을 발칵 뒤집어 버렸다.

대찬은 생방송 보도를 보고 휴대폰을 들었다.

전혜정 원장의 메신저 프로필을 흘끗 확인했다.

프로필 사진과 상태 메시지는 완전히 삭제되어 있었다.

사진 대신 옅은 푸른색 배경에 눈사람처럼 그려진 기본 프로필 사진이 유령처럼 보였다.

늑대인간은 보름달이 뜨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정치인은 선거가 가까워질 때만 진정한 정치인이 된다.

석우룡 의원, 김민재 후보가 소속된 당에서는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보도 다음날.

당대표가 직접 나서서 소견을 밝혔다.

“신혜원의 부도덕한 일련의 행위들을 강하게 규탄합니다.”

간밤에 잔뜩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당대표의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아울러, 신혜원 원장의 남편인 우리 당의 김민재 예비후보를 출당조치 하겠습니다.”

이 결정은 석우룡 의원의 개인기로 어찌해볼 수준이 아니었다.

졸지에 오른팔이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이 사건으로 흥읍시의 민심이 반대편으로 훅 쏠려버렸다.

그 말인즉슨, 흥읍시장 선거는 물론이요 거기에 딸려오는 도의원, 시의원 역시 상대에게 다수 뺏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중요했다.

그들이 차기 총선에서 석우룡 의원 자신의 재선을 위한 조직이 되어주는 까닭이었다.

전국에서 정치 풍향계라고 꼽히는 흥읍시였다.

그럴 정도로 흥읍시의 정치지형은 50 대 50.

이렇게 돼버리면 석우룡 의원도 4선 의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고꾸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석우룡 의원은 바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그 보도에서 대찬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갑자기 신혜원이 메이저 언론, 그것도 최재한의 입을 타고 보도되었다.

앞뒤 따질 것도 없었다.

“조 대표,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원님.”

대찬은 석우룡 의원의 의중을 알았지만 일단 잡아떼고 봤다.

“날 바보천치 취급 하는 건가? 내 등을 찌르는 이유가 뭐야!”

“신혜원 관련 보도 때문이십니까?”

“그래!”

“거기에 제가 얽혀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의원님.”

“가증스럽게 잡아떼지 마.”

석우룡 의원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 선거에서 금배지를 반납하게 생겼으니 그 분노가 대찬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보도를 한 ONB 최재한, 이놈이 조 대표 불알친구라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의원님, 보도된 내용은 제가 캐내고 싶어도 캘 수 없는 정보들입니다. 제가 신이라도 됩니까.”

“조대찬 대표!”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보도 때문에 의원님 개인 신상에 불이익이 간 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한테 화풀이하시는 건 아니죠.”

“나는 받은 대로 되돌려주는 사람이야.”

“무섭네요. 2001년에 9·11 터지니까 그 또라이 같던 북한이 침묵했죠. 저도 그럴 수밖에요. 전 아닙니다.”

“나는 자네가 계속 내 든든한 우군이기를 바랐네.”

“저도 그러기를 희망합니다.”

석우룡 의원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밀월은 끝났네.”

뚝.

석우룡 의원은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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