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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67화 (467/556)

난 할 수 있어 467화

석우룡 의원의 말로는 김민재 사장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흥읍시장에 당선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했다.

마지막 경선만 남겨두고 있는데, 낙점이 거의 확정적이라고 했다.

본선이 문제이긴 하지만 예선 통과는 무리 없다는 게 석우룡 의원의 말이었다.

하기야, 흥읍시 정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보유한 석우룡 의원이 밀어주고 있으니.

두 살 먹은 푸들이 나와도 예선통과는 쉬울 것이었다.

음식이 나오고 한바탕 잔이 돌았다.

대찬이 슬슬 일어날 시간을 재고 있던 그때, 석우룡 의원이 대찬에게 슬쩍 물었다.

“조 대표, 우리 김민재 사장, 우리 당 경선은 쉽게 통과할 거 같은데 본선이 문제야. 아직 우리 흥읍시민들이 김민재 사람 진국인 걸 아직 잘 모르더라고.”

“아직 선거까지는 제법 남지 않았습니까. 인지도 올리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석우룡 의원은 어흠, 헛기침을 하고 대찬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정공법으로는 마냥 쉬운 것도 아니야 상대도 만만하진 않으니까.”

“저쪽에서는 아마 지역에서 유명한 개원의가 나온다는 거 같더군요.”

“그래, 얌체 같은 놈이라 표밭을 잘 갈아놔서 장담할 수가 없다고.”

대찬은 김민재 사장을 보며 웃었다.

“열심히 노력하시면 되실 겁니다. 응원하겠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근데 말로만 응원해주실 겁니까?”

“예?”

김민재 사장은 입맛을 다시며 대찬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는 대찬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고 말했다.

“조 대표님 인지도, 좋은 이미지를 저한테도 좀 튀겨주시면 판이 조금 쉽게 돌아갈 거 같은데 말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대찬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부러 못 알아들은 체 했다.

“조 대표님이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도와달라고 하시는 건진 모르겠는데요.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것 이상으로는 어렵겠습니다.”

대찬이 딱 잘라 거절하자 김민재 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 물론 마음속으로 응원해주시는 것도 감사하긴 합니다만…….”

김민재 사장이 더 넉살 좋게 부탁하지 못하자, 석우룡 의원이 나섰다.

“이봐, 조 대표. 여러모로 민재 이 친구 도와주는 게 당신한테도 좋지 않겠어?”

“여러모로 상부상조할 일이 있겠지요.”

“그래, 알 만한 사람이 그러나.”

“하지만 제가 나서는 게 도리어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악영향이라니?”

“저는 극동일보가 눈에 불을 켜고 노리는 타깃입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제 안티도 많고요. 마냥 좋은 효과만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석우룡 의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찬의 등을 두드렸다.

“하하, 별걱정을 다하는구만. 지역구민들이 그런 거 일일이 하나하나 신경 쓰진 않아.”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의원님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생각은 없지만 선거운동에 뛰어들 생각도 없습니다.”

대찬이 거듭 고사하자 석우룡 의원의 눈빛이 다소 날카로워졌다.

“우리 부탁을 계속 거절하면 나도 악화시키기 싫어도 저절로 악화될 수밖에 없어.”

관계의 무서움이란.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하.”

대찬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자넬 여러 번 도왔는데 이거 하나 날 못 도와준단 말인가.”

“법으로 정해진 만큼의 후원금을 쾌척할 의사는 있습니다만.”

“우리가 돈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우리가 빌리고 싶은 건 돈이 아니라 조 대표, 자네의 명성이야.”

“선거트럭 위에 올라가서 손을 맞잡고 일일이 시민들하고 악수하고, 현수막에 제 사진을 걸고 그런 방법은 결단코 김민재 후보에게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것만큼은 고사하겠습니다.”

“우리도 그런 촌스러운 방식으로 자네를 시달리게 할 생각은 없어.”

“그럼 뭘 원하십니까.”

“조 대표가 부담을 느낀다면 가장 스무스한 방식을 제안하지. 흥읍에서도 저쪽 당이 가장 강한 지역이 동흥동이야.”

“예, 그런데요?”

“그런데 민재 마누라가, 그니까 제수씨가 거기서 장애인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거든? 신혜원이라고. 신의 은혜다, 이런 뜻이야.”

“좋은 일 하시는군요.”

“좋은 일이지. 거길 한번 방문해주면 좋겠는데.”

“김민재 후보님하고 동행할 순 없습니다.”

“아아, 그건 바라지 않아. 로튼 프룻츠 직원 한 열댓 명만 데리고 가서 봉사활동을 해주면, 진짜 봉사할 것도 없어 그냥 사진만, 사진만 찍어주면 돼.”

“직원들도 동원할 수 없습니다. 가더라도 개인 자격으로 가겠습니다.”

석우룡 의원은 쩝, 입맛을 다셨다.

“거 참 까다롭긴. 좋아, 개인 자격으로. 가서 사진 몇 장만 찍어주면 돼.”

“정말 그거면 됩니까?”

“그래, 자네 정도 되는 인물이 거기 가서 봉사활동 하면 지역 언론이 취재할 만하고, 그럼 김 후보 마누라가 지역에서 좋은 일 한다는 사실도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어.”

“…….”

“그럼 철옹성 같은 그쪽 민심도 조금은 이쪽으로 넘어오겠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조금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우릴 도왔으면 자네한테도, 우리한테도 더 좋았을 텐데.”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화이부동(和而不同), 어울리되 같아지진 말라. 기업인과 정치인의 관계는 그래야죠.”

그러자 김민재 사장은 허허, 쓴웃음을 지었다.

“꼭 저 들으라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회사나 멀쩡히 경영할 것이지 왜 정계에 뛰어드느냐고.”

“그럴 의중은 없었습니다. 하하, 괜히 김 후보님이 찔리시는 거 아닙니까?”

“조 대표님.”

“농담입니다, 농담. 자, 그럼 말씀 다 나누셨으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늦게 들어가면 마누라한테 혼나거든요.”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조 대표님, 윤이영 씨랑 같이 봉사 가시는 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그럼 날짜를 최대한 가까운 시일 내에 꼭 좀 잡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급해서요.

-네.

김민재 사장은 그날 이후로 대찬을 아주 못살게 굴었다.

대찬은 신경질적으로 타자를 두드리고는 혼자 대표실에 앉아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이. 확 떨어져 버려라.”

가뜩이나 할 일이 몇 트럭씩 쌓여 있는데.

봉사.

말이야 좋은 말이다.

하지만 대찬에게는 자신의 직원들을 건사하고 자기를 믿고 거금을 쾌척한 투자자를 위해 복무하는 것이 먼저였다.

여유가 없어 인연이 있는 함평의 한마음 학교에도 못 내려간 게 벌써 여러 해였다.

그는 직접 자기 손발을 움직여 봉사하는 것보다 자기 인건비의 몇 배, 몇십 배를 기관에 기부하는 쪽이 더 좋았다.

그럼에도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건, 석우룡 의원의 신세를 여러 차례 진 탓이었다.

‘그래, 석우룡 정도면 양반이지.’

받은 신세를 봉사활동 가서 사진 몇 번 찍어주는 거로 퉁 칠 수 있다면.

까짓것 못해줄 것도 없었다.

주말.

마강국의 그 강철 같은 체력도 완전히 방전되었다.

평일 내내 대찬의 시중을 드는 일은 생각보다도 고됐다.

그는 침대에 늘어져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안 감고 온종일 빈둥거릴 생각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마강국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들어맞았다.

-주말 일정 있어. 흥읍 동흥동으로.

“이게 미쳤나.”

마강국은 손으로 얼굴을 쓸면서 고릴라처럼 울었다.

못 나가겠다고 배짱을 부릴 수도 없었다.

대표의 외근 비서는 주말에도 평일과 마찬가지로 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주말에는 혼자 일정을 소화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강국을 불러냈다.

마강국은 결국 침대의 유혹을 떨치고 일어나 대표님을 모시러 나갔다.

‘조대찬이 부른 게 아니라 내 발로 찾아간 거니 누굴 탓할 수도 없고…….’

마강국은 차를 몰고 가 회사 근처 집이 다 지어지기 전까지 임시로 거주하는 대찬의 아파트에 닿았다.

마강국의 죽을상을 보고 대찬은 싱글벙글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왜 그렇게 울상이야?”

“아, 그럼 울상 안 짓게 생겼어?”

“내가 그래도 주말에 많이 배려해줬잖아. 평일에도 일찍일찍 들여보내주고.”

맞는 소리에 마강국도 더 투정 부리지 못했다.

“그래서, 동흥동에는 뭔 볼일이 있으십니까요.”

“봉사활동 해야 돼.”

“엥? 웬 봉사.”

“말하자면 깁니다. 가기 전에 뼈해장국이나 든든히 먹고 갑시다. 힘 많이 써야 되니까.”

“이왕 먹는 거 감자탕 시켜서 밥까지 볶아먹자.”

대찬은 마강국을 흘끗 봤다.

“둘이서 무슨 감자탕.”

“중 자 시키려고 했는데?”

“그게 다 들어가?”

“라면 사리까지 들어가는데?”

대찬은 의자를 뒤로 눕히면서 눈을 감았다.

“그래, 먹자, 먹어.”

둘은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김민재 사장의 부인이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시설 신혜원으로 향했다.

둘이 시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이런저런 지역 언론사에서 기자들이 도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나 참, 웃기는 상황이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기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원장은 버선발로 나와 대찬을 맞이했다.

“아유, 귀하신 분이 오셨네요. 신혜원 원장 전혜정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조대찬입니다.”

“주말에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쉬고 싶으실 텐데.”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 알면서 너스레는.

“아닙니다. 아, 이건 여기 계신 분들 드시라고 사 왔습니다. 도넛이에요.”

“아… 여기 있는 장애자들 욕구 컨트롤 안 돼서 이런 살찌는 음식은 별로 안 좋은데. 그래도 성의를 봐서, 네, 감사합니다.”

“장애자…….”

“네? 왜요?”

“아, 아닙니다.”

“장애인이나 장애자나 다른 의미가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대찬이 원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기자들도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대찬은 그들을 흘끗 보고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정면에는 시설에 입소한 장애인들이 도열해있었다.

대찬이 알기로 이들은 중증장애인들이었다.

인지능력이 심하게 부족한, 대개 어린아이들의 마음에 머무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대찬을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조대찬 대표님, 어서 오세요!”

다소 목소리가 튀기는 했지만, 그들은 똑같은 박자로 대찬을 향해 외쳤다.

대찬은 얼결에 고개를 숙이며 그들의 표정을 직시했다.

“…….”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활짝, 인체에 한계가 없다면 귓불까지 벌릴 기세로 벌렸다.

눈은 입보다 더 솔직했다.

억지로 반달을 만들려는 노력은 처절했다.

도열한 입소자들 중 몇몇의 눈두덩은 심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공손히 모은 손, 그리고 무릎과 무릎 사이에 공간이 없도록 딱 붙인 다리는 파들파들 떨렸다.

대찬은 차마 오래 보지 못하고 전혜정 원장을 바라봤다.

“이분들, 많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죄송해요. 장애자들이라 정상인보다는 참을성이 약해서.”

“아니, 몸이나 정신이 좀 불편하시면 되레 당연한 일이죠.”

“…….”

“저한테 이런 강박적인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하시면 안 됩니다.”

전혜정 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분들은 보통 정성이 갸륵하다고 하시던데. 조 대표님은 좀 깐깐하시네요.”

대찬은 전혜정 원장을 쏘아보고 그녀의 품에 안겼던 도넛을 다시 빼앗았다.

손길이 거칠었다.

그리고는 훈련병보다도 더 긴장한 입소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입소자들을 상대로는 싸늘한 얼굴에 최대한 온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대찬은 그들의 키에 맞춰 무릎을 살짝 굽히고, 도넛 상자를 개봉했다.

“그렇게 뻣뻣하게들 서 있지 마시고요. 얼른 와서 이거 드세요. 이거 엄청 맛있거든요?”

도넛 한 방에 간신히 지켜오던 그들의 인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들은 대열을 이탈해 도넛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였다.

“맛있게 드세요.”

대찬은 멀뚱히 서 있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우유도 사 왔거든요. 이분들한테 좀 따라주세요.”

대찬 때문에 주말에도 불려 나와 원장의 시중을 드는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전혜정 원장은 갑자기 대찬이 진두지휘하는 풍경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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