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466화 (466/556)

난 할 수 있어 466화

보도 다음날.

상림은 짧은 입장문만을 내놓았다.

그들은 사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추측성 보도에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전길재의 보도는 파괴력이 있었다.

주식시장은 소문에 흔들린다.

그것도 그냥 소문이 아니다.

거푸 홈런을 때려낸 거물급 기자 전길재의 손을 탄 기사가 아닌가.

상림의 주가가 한번 크게 휘청거렸다.

장중 주가가 5% 가까이 내리기도 했다.

장 막판 하락세를 제법 만회하기는 했지만, 전길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계속 상림의 투자자들에게 찝찝한 기분을 선사했다.

결국 참다못한 상림은 다시 입장문을 발표했다.

‘로튼 프룻츠의 핵심 인재들에게 영입 의사를 타진했던 건 맞다. 그러나 보도처럼 40억 원에 불과한 금액이 아니다. 총액 300억 원을 상회하는 수준을 제안했다.’

상림의 입장문은 안 내느니만 못한 결과를 냈다.

상림의 소액 투자자들이 모인 포털사이트의 종목토론방에서는 이를 성토하는 게시물들이 끊이지 않았다.

-장난하냐? 그걸 믿으라고?

-기술자들이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닌데 300억 들이밀면 삼보일배 하면서 상림으로 왔겠지.

-조대찬이 유비고 뭐 그 둘은 관우, 장비라도 되냐? 도원결의 맺었냐? 300억에 안 넘어오게.

-300억이면 콩팥도 빼다 팔겠다.

-진짜 300억 들이밀고도 못 빼 왔으면 그건 상림에 문제가 있는 거지.

-아니, 진짜 300억 쏟은 것도 문제 아니에요? 이 와중에 뭔 비도축육 개발하겠다고 사람 모셔오는 데만 300억 쓰고 있어.

상림은 그들의 아우성을 외면했다.

이런 소동으로 회사 자체가 휘청거리는 일은 물론 없었다.

그러나 벌집을 뒤지려다가 콧잔등에 단단히 침을 한 방 맞은 정도는 되었다.

그들의 표현으로 ‘조대찬 발 찌라시’에 호되게 당해버렸다.

상림 측은 로튼 프룻츠에 전화를 걸어 이를 항의했다.

전화를 받은 건 맹윤주였다.

“로튼 프룻츠 맹윤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상림그룹 기획실장 공 전무라고 합니다.”

“아, 상림이요. 네, 무슨 일이시죠?”

공 전무의 목소리는 불쾌감에 푹 젖어 있었다.

“좀 따질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그쪽 직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과장입니다만.”

“과장은 볼 일 없고, 임원 없어요?”

말은 존댓말인데 목소리는 하녀 대하듯 했다.

맹윤주는 화를 꾹 억누르고 웃으며 대꾸했다.

“일단 무슨 일이신지 말씀을 드려야 안내해드릴 수 있겠네요.”

“따질 게 있다고 했잖아요.”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대충 뭉갤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임원 아무나 좋으니까 책임 있는 사람하고 얘기 좀 하게 해주시죠.”

“하하…….”

맹윤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통유리로 된 대찬의 대표실 안에서 훤히 잘 보였다.

그는 맹윤주 쪽의 전화를 연결해 가만히 통화를 들었다.

“다 절차와 과정이 있는 거라서요. 덜컥 연결해드리기 어렵습니다.”

“거 참, 상사한테 혼날까봐 그래요?”

“아, 그래도 저희 절차가…….”

“내가 알아서 잘 말할 테니까 그건 걱정 마시고요.”

맹윤주는 성질 같아서는 허튼수작 말고 끊으라고 일갈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런 권한도, 감당할 만한 책임도 없다는 걸 알고 난처한 웃음으로 일관했다.

대찬은 바로 개입했다.

“맹윤주 씨, 전화 끊어보세요. 내가 응대할 테니까.”

“네? 아, 넵!”

대찬의 목소리에 맹윤주는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제3자가 개입하자 공 전무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불쾌해졌다.

“그쪽은 또 누굽니까?”

“로튼 프룻츠 대표 조대찬입니다. 누구시죠?”

“조, 조 대표님입니까?”

공 전무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네, 누구시죠?”

“어흠, 상림그룹 기획실장 공 전무라고 합니다.”

“공 무슨 전무시죠?”

“…공태섭 전무입니다.”

“용건이 뭡니까.”

대찬의 목소리는 스타카토로 딱, 딱, 끊어졌다.

공 전무는 적당히 이사급에게 항의표시를 하고 전화를 끊을 요량이었다.

중소기업 이사를 상대로는 떳떳하게 으르렁댈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대뜸 대찬이 개입하니, 그의 기백이 살짝 흔들렸다.

“항의 차 연락 드렸습니다.”

“항의요.”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기가 막힌다는 의중이 짙게 깔렸다.

“예, 항의.”

“뭘 항의하시려고 기획실장님이 다 전화를 주셨을까요.”

“대표님이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하나 짚이는 게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 상림이 옹졸한 회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오, 옹졸이요? 찌라시 돌려서 남의 회사 주가를 휘저어놓고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끼셨습니까!”

“기둥뿌리 빼가려던 도둑놈 엉덩이 좀 걷어 차 줬다고 내가 죄책감까지 느껴야 합니까?”

“대표님, 그건 우리 회사를 모독하는 언사입니다. 도둑놈이라니요.”

“기술이 고프면 우리 회사에서 특허 사가겠다고 정식으로 오퍼를 넣으세요. 사람 도둑질하지 마시고. 물론 그래도 팔 생각은 없지만.”

“대표님, 우리는 적법한 수단으로 우리 회사의 이익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그럼 뭐 나는 적법하지 않은 수단을 구사했습니까? 불법이라도 저질렀어요?”

“…예?”

“고소하세요, 그럼.”

“저희 투자자들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귀사에 어떤 이익도 되지 않습니다!”

대찬은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왜요? 상림 덕분에 우리 직원들 속 쓰려서 위장병 걸렸었거든요. 근데 이번에 그게 싹 씻은 듯이 나았거든요? 회사 입장에서 산재처리 안 해도 되니 얼마나 큰 이익입니까?”

“조 대표님!”

“다시 한 번 이따위로 허튼수작 부리면 그때는 죽더라도 상림 불알 한 짝은 물어뜯고 죽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부, 불… 뭐요?”

“알. 끊습니다.”

대찬은 쾅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모처럼의 시도가 흐지부지되자, 상림은 우선 비도축육 시장에 대한 진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상림그룹 회장은 공태섭 전무의 보고를 받고 난감한 듯 이마를 긁적였다.

“이거, 된통 당해버렸구만.”

“면목이 없습니다, 회장님.”

대찬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기획실장 공 전무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 면이 안 서는 일이지. 300억 안겨주고 사람 빼 오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말이야.”

“죄송합니다.”

“조대찬이가 무슨 조화를 부려 그 인간들 발목을 붙들었는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 정도 금액이면…….”

“설마 조대찬이 그 인도인 여권이라도 갖고 있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공 전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구만. 사업은 전면 백지화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백년대계를 생각한다면 실험실에서 찍어내는 고기에 우리도 한 발 걸치고는 있어야 해. 언제까지 이런 전통적인 방식이 통할지 누구도 자신 못해.”

“그렇긴 합니다만…….”

“로튼에 있는 그 두 사람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 전문가들이야. 그 인간들 없이는 뭘 해볼 수도 없지.”

회장의 거듭되는 말에 공 전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회장은 팔걸이를 톡톡 건드리다가 공 전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튼 프룻츠 주식. 꾸준히 매입하도록 하지.”

“…예?”

“우리가 파도를 만들어내지 못할 거면 최소한 그 파도에 올라타긴 해야지.”

“아무리 그렇지만 로튼 때문에 저희가…….”

“그런 사적인 감정으로 사업을 하면 3년도 못 가는 거야. 대적하면 기분이 나쁘지만, 그런 맹랑한 놈이 선장이라면 믿고 올라탈 수 있지 않겠어?”

“…….”

“나중에 로튼 프룻츠 경영에 우리가 목소리 낼 수 있도록, 꾸준히 장기적으로 매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회장이 맨손으로 이룬 회사였으니, 그의 지시는 절대적이었다.

상림은 로튼 프룻츠의 주식 1.5%를 사들였다.

기업으로는 쵸 후쿠히로 회장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펀드, 필래그룹의 뒤를 이은 규모였다.

이 소식은 대찬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소식을 전달한 진위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목적은 당연히 단순 투자겠죠.”

“네, 맞습니다.”

“지금은 1.5퍼센트지만 언제 지분을 넓혀서 경영 참여로 목적을 바꿀지 모르겠네요.”

진위생은 웃으며 말했다.

“돈 많이 버셔야겠네요.”

“네, 그래야겠네요. 공룡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 * *

“천녀언 이 가도오 난 너를 잊을 수 없어어어— 사랑했기 때문에에에에 사랑했기 때문에엑!”

대찬은 객석의 맨 앞에 앉아 고막을 갈가리 찢어버릴 것 같은 쇳소리를 정면으로 들었다.

‘아, 짜증나….’

더 짜증나는 일은 그 노래를 듣고도 웃으며 박수를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흥읍 대광장 축제.

흥읍시에서 랜드마크로 만들어놓은 흥읍 대광장에서 매년 개최하는 축제였다.

대찬은 이 축제에 귀빈으로 참석했다.

지역구 국회의원인 석우룡 의원의 권유 때문이었다.

참석해서 흥읍시를 기반으로 둔 기업으로서 흥읍시민에게 잘 보이면 좋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대찬도 그 논리에 동의했다.

주민들에게도 잘 보여야 하고, 특히 흥읍시의 행정을 주무르는 고위공무원과 유지들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다.

그 대가가 흥읍 박완규 다음으로 무대에 올라온 주부 걸그룹의 군무를 감상하는 정도라면 참아줄 만했다.

더불어 대광장 축제의 후원사로 얼마간의 성의 표시 정도라면.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던 석우룡 의원은 대찬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이쯤 했으니 그만 일어날까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우리, 바쁜 사람이잖아요.”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어나시죠.”

“저녁에 딱히 일정이 없으시면 간단히 식사라도, 어때요?”

대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의원님.”

“지역구 샅샅이 뒤지며 돌아다니면 모르고 싶어도 음식 잘하는 곳을 알게 되죠. 내가 알아 모실게요. 내 차로 가시죠.”

“예, 알겠습니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응답했다.

석우룡 의원은 간단히 식사를 하자고 했다.

대찬은 당연히 단둘이 반주나 곁들여 한 끼 때우고 일어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동한 식당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석우룡 의원은 그들을 대찬에게 소개해주었다.

“자, 여기는 우리 김덕호 도의원, 여기는 이춘숙 시의원, 여기는 유준교 부시장…….”

“아… 안녕하십니까.”

대찬은 석우룡 의원이 소개해주는 순서대로 악수를 나눴다.

대찬이 흥읍시의 권력자들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대찬과의 친분을 원했다.

흥읍시의 규모에 로튼 프룻츠 정도의 회사라면 상당히 중량감 있는 존재였다.

잘 구슬려둬서 나쁠 게 없었다.

그들은 한참 연하인 대찬과 악수하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반갑습니다, 조 대표님.”

“나중에 제가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대찬은 의례적인 미소로 화답했다.

석우룡 의원은 마지막으로 한 중년 남성을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이번에 시장 선거 준비하는 김민재 사장.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조 대표님.”

김민재 사장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대찬은 별 감흥 없이 악수에 응했다.

석우룡 의원은 김민재 사장의 어깨를 감싸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 친구,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후배라 나랑 사적으로도 잘 아는 사이에요. 참 여러모로 괜찮은 친구니까 가깝게 지내서 나쁠 거 없을 거예요.”

“아, 네. 그러죠.”

“조 대표도 이 친구 못지않게 훌륭한 사람이니까. 나중에 나이 좀 먹으면 정계에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이 친구 행보를 잘 보고 배워두라고요.”

대찬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나중에 석 의원님 지역구로 출마하면 되려나요?”

“뭐? 이, 이 사람,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자기 명줄을 끊어도 되냐는 물음에 석우룡 의원은 잠깐 당황했다.

대찬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저는 성질이 더러워서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요.”

“허, 농담 한번 고약하네.”

“그러게 제가 성질이 더럽다니까요. 하하.”

대찬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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