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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65화 (465/556)

난 할 수 있어 465화

대찬은 잔잔한 시선으로 은오영 소장을 바라봤다.

“소장님은 뛰어난 기술자고 연구자지만, 싱 전무님이 없으면 아마 상림도 종전과 똑같은 제안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 아니, 제가 당장 떠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두 분을 동시에 모셔 가면 상림은 일약 비도축육 시장에서 1위를 석권합니다. 그런데 싱 전무님이 여기 남으면요?”

“…….”

“소장님을 모셔가도 상림은 2위입니다. 기존의 특허가 제 손에 있고, 소장님과 실력이 호각인 싱 전무님이 저한테 있으니까요.”

은오영 소장은 이제 거의 울 지경이었다.

눈망울에 물기가 차올랐다.

“상림은 소장님을 손쉽게 벗겨 먹고 팽할 겁니다. 아마 기술을 후배들에게 오롯이 전수하게 하고 코 푼 휴지 버리듯 내팽개치겠죠.”

“대, 대표님…….”

“그때, 소장님이 그 닳고 닳은 재벌을 상대로 제대로 교섭할 거라 자신할 수 있으십니까?”

이는 은오영 소장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지만, 다르샨 싱 전무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대찬은 탁자를 꽉 붙든 상태에서 둘에게 말했다.

“며칠을 고민하셨다고 하셨죠.”

“…….”

“저는 두 분이 상림으로부터 제안을 받자마자 저한테 털어놔 주시길 바랐습니다.”

“그게…….”

“그런데 제가 와이프를 움직여 옆구리를 쿡쿡 쑤실 때까지 일언반구 말씀이 없으셨어요.”

“대표님…….”

“인간의 도리는 논하지 않기로 했으니 차치하자면, 이게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계산적인 제안입니다. 싱 전무님이 이를 뿌리치시겠다면 마찬가지의 제안을 은 소장님께 하죠. 그래도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시장에 주식 전량 매각하고 런, 하겠습니다.”

“…….”

둘은 말을 잃었다.

애초에 이렇게 냉정하고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협상테이블에 앉아본 경험이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캠핑카에서 다르샨 싱의 망해가는 회사를 1달러에 인수하겠다던.

1달러가 아니라 100달러로 해서 99달러로 달밤 아래 맥주와 바비큐를 즐기던 낭만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의 대찬을 표현하자면 몸에도 차가운 피가 흐르는 음험한 파충류일 뿐이었다.

대찬은 둘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둘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찬을 만나러 들어오면서,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은 대체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대찬이 좀생이처럼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손 털고 상림으로 이적하자.

그래도 최대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자.

애매한 수준을 제시하면 일단 손 털고 일어나서 다음을 기약하자.

그러나 그건 둘의 입장이 같을 때의 얘기였다.

한 놈만 건지겠다는 대찬의 제안은 둘 사이에도 불신을 야기했다.

이건 대찬과 기술자 사이의 양자협상이 아니었다.

대찬과 다르샨 싱과 은오영 사이의 삼자협상이었다.

작은 회의실 안에 묵직한 긴장이 흘렀다.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째깍째깍.

회의실 안에 있는 아날로그시계의 침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소란스럽게 들렸다.

침묵을 깬 건 대찬이었다.

풉.

말이 아니라 웃음으로 깼다.

대찬의 표정은 냉혈 파충류에서 다시 온혈 포유류로 돌아왔다.

“너무들 하시네요. 이게 진짠 줄 아셨어요?”

“…네?”

“제가 정말 이렇게 싸가지 없는 제안을 할 거라고 생각하셨냐구요.”

“…….”

일거에 긴장이 탁 풀렸다.

긴장이 풀리니 힘이 풀렸다.

대찬은 자세를 편하게 하며 둘에게 말했다.

얼굴에는 시종 따뜻한 웃음기가 흘렀다.

“저는 두 분 중 어느 한 분도 놓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

“그렇다고 회사를 수렁에 빠뜨릴 결정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

“일단 두 분은 로튼 프룻츠의 지분을 1퍼센트씩 갖고 계십니다, 그렇죠?”

“…예.”

“현재 로튼 프룻츠의 시가총액은 4천억을 돌파했습니다. 그럼 현재의 가치만 따져도 40억이죠.”

“예.”

“바보가 아닌 이상 로튼 프룻츠의 주가가 여기서 멈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순항한다면 100억까지는 우습고, 한계는 가늠하기 힘듭니다.”

“……맞습니다.”

“현금 150억과 로튼 프룻츠 지분 1퍼센트, 저더러 선택하라면 후자입니다. 하지만 두 분 생각은 다르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연봉과 성과급이 남았으니까요.”

“…예.”

둘은 대찬이 말하는 대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틀린 말을 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협상의 칼자루는 대찬이 쥐었다.

“연봉은 두 분 모두 상림의 제안과 같은 수준으로 인상하겠습니다. 이 정도는 제가 감당하고도 남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마땅한 도리이고, 합리적인 대우니까요.”

“감사합니다.”

협상장에서 ‘감사합니다’ 소리까지 나왔다.

“그럼 남은 건 성과급. 이것만 해결되면 두 분이 로튼에 남지 않을 이유가 없게 되는 거겠죠.”

“예…….”

대찬은 회의실에 비치된 전화기를 들어 내선번호를 누르고 바로 말했다.

“진위생 씨, 그거 갖고 오세요.”

대찬이 말하자마자 진위생이 문서 두 장을 들고 왔다.

대찬은 그걸 한 장씩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에게 건네주었다.

은오영 소장은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각서예요.”

“각서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5년 후, 두 분께 각각 현금 200억 원을 드리겠다는 각서입니다.”

“200억이요…….”

“5년 후라는 전제가 불분명하게 들리시겠지만, 상림에서 말하는 성과급도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상림도 이미 지불한 대가 이상으로 대우하기는 어려워요. 몇 년 치 성과급을 모아도 200억 미만이라고 확신합니다.”

“…….”

“5년 후면 제 사비를 털더라도 무리 없이 두 분께 이 정도 대우를 해드릴 수 있다는 게 제 계산입니다. 제 계산을 신뢰해주십시오.”

은오영 소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봐온 게 있는데 어떻게 대표님 계산을 불신하겠습니까.”

“그럼 제 제안은 액수만 따져도 상림의 제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데,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다르샨 싱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됐군요.”

대찬은 웃으며 일어나며 은오영 소장에게 먼저 손을 건넸다.

은오영 소장도 덩달아 일어나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아이고, 조심하세요.”

“지, 진짜 너무하십니다, 대표님…….”

은오영 소장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대찬은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왜 또 울고 그래요.”

“나 진짜 무서웠다고요. 진짜 나 혼자 상림 가야 되나, 이 인간은 피도 눈물도 없나, 언론 동원해서 날 천하의 배신자로 만드는 건 아닌가 막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럴 리가요. 저 은 소장님 없으면 죽어요.”

“장난이라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요…….”

대찬은 은오영 소장의 손을 꽉 붙들고 그를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진짜 상림으로 튈 거 같이 군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죄송해요…….”

“나는 뭐 천하태평한 줄 아셨어요? 진짜 쪽박 차는 줄 알고 오줌 지릴 뻔했다니까.”

대찬은 남은 한 손으로는 다르샨 싱 전무의 손을 붙들었다.

“우리 오래오래 행복하게 쭉 가자고요. 오늘 퇴근하고 삼겹살에 소주로 달릴까요?”

“…한우요.”

“그 와중에 소 돼지 따지시긴.”

대찬은 피식 웃었다.

대찬은 성공적으로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을 로튼 프룻츠에 묶어두었다.

다르샨 싱 전무는 대찬에게 보고를 올리고, 상림그룹의 관계자와 만났다.

관계자는 웃으며 말했다.

“고민이 너무 길었어요, 전무님.”

“예, 길었죠. 너무.”

“저희 측에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제안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사인하실 거죠? 이왕 오시는 거 은 소장님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한 번에 해버리게.”

다르샨 싱 전무는 관계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제안은 고사하겠습니다.”

“예? 고사요?”

“예, 고사하겠습니다.”

관계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싱 전무님은 아직 한국어가 서투신 모양입니다. 고사는 고상하게 감사한다는 것의 줄임말이 아닙니다.”

“서툴지 않습니다. 정확한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영어로 할까요. reject 하겠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군요.”

“귀하의 이해를 바라지 않습니다.”

관계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안한 금액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

“부족합니다.”

“허, 경력이라고는 달랑 망한 회사 창립자에 중소기업 CTO 두 줄뿐인 분에게는 과분한 제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상림이 자선단체도 아니고 과분한 제안을 할 리가 없죠. 그게 제 값어치라고 생각하셨으니 제안했겠죠.”

“좋습니다. 150억에 20억 정도는 더 얹어드릴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은 소장님은 말고 싱 전무님한테만 비밀스럽게 제안 드립니다.”

처음 제시했을 때는 솔깃한 척 하더니.

갑자기 돌부처로 변한 다르샨 싱 전무가, 관계자는 답답했다.

“…….”

“우리 예산의 맥스입니다. 그럼 사인하시겠습니까?”

“금액이 적습니다.”

“싱 전무님!”

다르샨 싱 전무는 관계자를 흘끗 바라보곤 바로 시선을 거뒀다.

“천 억 주시면 고려해 보죠. 그 이하는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처, 천 억이요?”

“천 억 생기면 전화 주세요. 그럼 이만.”

다르샨 싱 전무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관계자는 어이가 없는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미친놈…….”

상림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건 불법이지만, 돈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합법인 게 자본주의의 생리다.

상림의 기습공격은 그야말로 돈으로 만든 칼이었다.

찔렸다면 로튼 프룻츠는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대찬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미친놈들이, 그래도 상도덕이 있지.’

아무리 합법이고 아무리 문제가 없다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대찬은 응수를 준비했다.

합법의 탈을 쓴 자본주의적 기습을 받았으니, 대찬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응수를 준비했다.

그 다음날 일요한국은 전길재 기자의 이름으로 단독 기사를 내보냈다.

[단독] 상림, 중소기업과 ‘돈 싸움’에서 졌다…재무상태 양호한가?

-비도축육 전문가 영입전에서 敗

-신사업 개척 좌절·부실재정의 증거?

재계 28위의 대기업 상림이 중소기업 로튼 프룻츠(이하 로튼)와의 돈 싸움에서 패배했다.

로튼 측은 상림이 자사의 핵심 기술인력 2인을 영입하고자 시도했다고 본지 기자에게 밝혔다.

로튼은 이런 시도를 성공적으로 저지해냈다.

영입전의 본질은 결국 돈이다.

즉, 로튼이 상림과의 돈 싸움에서 이겼다는 뜻이다.

아무리 로튼이 각광받는 기업이라지만, 재벌이 중소기업에 무릎을 꿇는 건 보기 드문 장면이다.

체면을 구겼다.

상림이 비도축육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이와 같은 시도를 했다는 게 로튼의 분석이다.

영입 대상이었던 2명의 기술 인력도 이와 같은 분석에 동의했다.

로튼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핵심 기술 인력에 대한 처우개선에 나섰으며, 상림은 결국 영입에 실패했다.

상림 측 제안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튼이 수비에 얼마를 지출했는지를 역산해보면 대략적인 추측은 가능하다.

로튼은 자사 핵심인력인 CTO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연구소장의 연봉을 100%, 약 10억 원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상림의 지출은 이보다 적었다는 것이 된다.

상림이 이들의 영입에 소극적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재계 20위권의 대기업이 총액 40억 원에 뜻을 거둬버렸다는 건 석연치 않다.

이들의 영입이 무산되면서 상림의 비도축육 분야 진출도 좌절될 것이 확실시된다.

40억 원이 아까워 회사의 미래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상림의 재정이 현금 40억 원을 투입하기조차 어렵다는 상황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만일 이 같은 해석이 사실이라면, 상림은 현재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대찬은 상림이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에게 제시한 금액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언급하지 않았을 뿐, 거짓으로 무언가를 꾸며낸 건 아니니 허위사실은 아니었다.

이 기사는 로튼 프룻츠가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에 대한 연봉인상을 단행한 당위성을 투자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의 목표는 방어보다는 공격에 있었다.

상림에서 한 차례 공격을 받았으니 돌려주자는 것.

대찬과 전길재는 기사의 포인트를 상림의 재정상태가 부실한 것 아니냐는 점에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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