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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64화 (464/556)

난 할 수 있어 464화

진행자가 질문 하나를 툭 던지면 회장 혼자서 10분을 떠들었다.

인생의 금과옥조로 삼을 만한 조언들이었다.

양계장이 한순간에 불타버린 순간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뚝심.

어려운 상황에서 직원들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리더십.

일개 양계장에서 국내 최고의 육계공급업체로 거듭난 과감한 선택의 순간들.

하나하나 새겨들을 만했지만 대찬에게는 별로 유익하지 않았다.

대찬이 원하는 건 영상 말미에 등장했다.

“산업의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상림 역시 기존의 육가공업만으로는 변화하는 세태를 이겨내기 힘들 것 같은데요.”

“네, 물론입니다. 저희도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죠. 미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도 그러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하하, 그건 영업비밀인데요.”

“그래도 힌트라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럴까요.”

집중하는 자세를 취하는 진행자를 따라, 영상 밖의 대찬도 미간을 좁히며 상림 회장의 말에 집중했다.

회장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비도축육, 죽이지 않는 고기가 최근 화두더군요.”

“맞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왠지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말씀은, 상림도 비도축육 사업에 뛰어든다는 말씀이신가요?”

회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아꼈다.

“아아, 그저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상림은 파격적인 변화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것으로 영상은 끝이었다.

비도축육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그저 수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일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니 저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을 꺼내지.’

만일 상림이 비도축육 사업에 뛰어든다면.

로튼 프룻츠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해도 돈 폭탄을 뿌려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기술.

한참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이 한창인 시장에서 경쟁자에게 기술을 파는 멍청이는 없다.

아예 회사를 접을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데 여기에도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회사가 기술을 안 판다면.

기술을 만드는 사람을 사 오면 된다.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다.

기술과 달리 회사의 소유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김태준 사장의 전언은 사소하게 여기고 싶어도 사소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을 예의주시했다.

그렇다고 잘못도 없는 사람들에게 내놓고 감시의 눈초리를 쏠 수는 없었다.

대찬은 부득불 윤이영을 써먹었다.

한동안 푹 쉬기로 했던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쑤셔서 일어나게 했다.

그녀의 임무는 로튼 프룻츠 임원들의 부인들과 사교모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르샨 싱 전무의 부인인 청담재의 정무숙을 비롯해 오윤 전무, 민승기, 한태윤 이사의 부인들이 대상이었다.

웬만해서는 말 한 마디 섞어볼 일도 없을 윤이영이 먼저 모임을 제안하니 그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특히 사모님들과의 인맥 쌓기가 주된 업무라고 해도 좋은 정무숙이 크게 반겼다.

뭉친 부인들은 심심하면 모여서 식사를 같이 하고, 해 떨어질 때까지 티타임을 가지고, 가끔은 해 떨어지고 달 뜰 때까지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윤이영은 어느새 남편을 닮아 여우같은 수작에 능했다.

그녀는 정무숙과 술을 거하게 마신 날, 은근슬쩍 정무숙에게 물었다.

“언니.”

“응?”

“근데 가끔 좀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번다고, 사실 기술은 싱 전무님하고 은 소장님이 다 만들어냈잖아요?”

“근데 돈은 쥐똥만큼 준다?”

윤이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은 아니죠. 적은 월급은 아니지만 지분에서부터 차이가 심하니까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우리 그 이, 딱히 불만 없어. 조 대표 아니었음 여태 캘리포니아 캠핑카 안에서 쉰 타코나 먹고 있었을 거라면서.”

“그래도 불만이 있으실 거 같아서.”

정무숙은 취한 와중에도 촉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왜, 네 남편이 슬쩍 한번 떠보래?”

“아유, 떠보긴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네 남편한테 전해. 우리 인도 용병 충성심 이상 무라고.”

정무숙은 웃으며 건배를 권했다.

윤이영은 멋쩍게 웃으며 건배에 응했다.

그러면서도 윤이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은근히 물었다.

“남편은 어떻게든 싱 전무님, 은 소장님을 대우해드리고 싶은데 대우의 적절한 수준을 고민하더라고요.”

“적절한 수준?”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이란 게 수요, 공급으로 정해진다잖아요.”

“그렇지.”

“지금은 로튼 프룻츠 단독 수요니까. 그 기준을 잡는 데 애를 먹는 거 같아요.”

“기준?”

“네, 만약 다른 데서 오퍼가 들어온다면 조금 더 명확할 텐데.”

윤이영의 말에 정무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기, 어디서 무슨 말 듣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네? 무슨 말이요?”

“아니…….”

윤이영은 미소를 지었다.

뭐가 있긴 있구나.

윤이영은 정무숙의 목소리와 표정을 보고 바로 알아냈다.

“혹시라도요, 그런 일이 있으면 툭 터놓고 남편하고 얘기를 나누는 게 최선일 거예요.”

“…….”

“저희 남편이 좀 별나잖아요. 몰래 숨기고 뒤로 뭐 하는 거, 별로 좋게 안 보니깐. 혹여 그런 일이 있으면 시원하게 오픈하고 딱 터놓고 교섭하라고 하세요. 그게 상책이니까.”

“그래, 뭐,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그러지……. 안 그러면 큰일 나나?”

“큰일이야 나려고요. 근데 남편한테 원한 샀던 사람 중에 어디 병신 안 된 사람 없긴 해요.”

“…….”

윤이영은 웃으며 잔을 들었다.

“맥주 더 드실래요?”

“아냐, 시간 늦었는데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정무숙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이 대찬에게 면담을 청했다.

윤이영에게 저간의 사정을 들은 대찬은 올 게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작은 회의실로 이끌었다.

대찬은 탁자 위에 손을 모으고 둘을 바라봤다.

“무슨 일로 그렇게 굳은 얼굴로 오셨어요?”

“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게 아니면 싫습니다.”

대찬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둘은 헛기침을 하고 시선 처리가 어색해졌다.

대찬이 기다리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다르샨 싱 전무가 입술을 뗐다.

“상림그룹이라고 아시죠.”

“예.”

“그쪽에서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무슨 제안이요.”

“자리를 만들어줄 테니 와라.”

대찬은 놀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당장에는 두 분이 맡을 마땅한 업무가 없을 텐데요. 상림이 뭐 하는 회사인지는 이미 다 아실 텐데.”

“예, 그런데 이번에 비도축육을 전담하는 자회사를 출범시킨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제안하던가요.”

“자리는 전무급입니다. 우리 회사랑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페이겠죠.”

다르샨 싱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를 준다고 하던가요.”

그렇게 물을 때에는 대찬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상림에서 저 둘에게 손을 뻗친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큰 대가를 제안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액수에 관해서는 은오영 소장이 입을 열었다.

“저희한테 각각 150억씩 일시불로, 그리고 연봉도 십억 대에 맞춰주고요. 또, 성과급에 따라서 2배, 3배가 될 수 있다고…….”

“확실히 대기업답네요.”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150억이라.

특급 프로야구 선수도 FA 대박을 쳐야 꼬박 4년에 100억 수준이다.

그런데 기본 150억을 깔고, 연봉 십 몇 억에 성과급까지.

확실히 대기업치고도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한 셈이었다.

하기야, 이 정도는 돼야 둘을 빼 갈만 했다.

로튼 프룻츠와 유사한 수준으로 제안했다가는 단칼에 거절당할 테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은오영 소장을 바라봤다.

“혹하시죠?”

“…….”

은오영 소장은 즉답을 내놓지 못했다.

혹하지 않았다면 아니라고 단칼에 끊어 말했을 그였다.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말이 없는 은오영 소장 대신 다르샨 싱 전무에게 다시 물었다.

“싱 전무님도 딱 잘라 아니라고 하실 순 없을 겁니다.”

“솔직히 금액 면에서는 끌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시겠죠.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다르샨 싱 전무는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이 수렁에서 건져주셨는데 뒤통수치고 나가는 거, 천벌 받을 일이죠.”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희 둘이 나가면 로튼 프룻츠는 폐업 직전까지 내몰릴 거고요. 허세가 아니라 담백한 사실이니까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수 없죠.”

“못 할 짓이죠. 하지만 제시받은 금액이 눈 딱 감고 나쁜 놈 되고 말자, 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우는 소리 내면서 정에 호소할 생각 없습니다. 그런 말 듣는 순간 정이 뚝 떨어지니까.”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은 묘한 웃음만 지었다.

다르샨 싱 전무가 상림 측에서 제시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모두 털어놓은 건, 붙잡아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만일 상림으로 적을 옮길 생각을 했다면 세세히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찬에게서 이참에 있는 대로 돈을 뜯어낼 요량이었다면 말끝을 흐리며 패를 모두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르샨 싱 전무는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제안이 안 오는 게 낫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제안 받고 며칠간 인간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래도 우리가 걸어온 길이 적어도 틀리지 않다는 걸 상림에서 확인시켜준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야 합니다만…….”

대찬은 냉수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아시겠지만, 현재 로튼 프룻츠에는 두 분이 상림의 오퍼가 아쉽지 않을 정도로 턱턱 안겨드릴 정도로 여유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대찬의 목소리에는 단호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다르샨 싱 전무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은오영 소장의 눈은 심히 흔들렸다.

그는 내심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받고 싶었다.

“그 정도의 지출을 결정하는 순간, 로튼 프룻츠의 가치는 우스워집니다.”

“우스워… 진다고요?”

은오영 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르샨 싱, 그리고 은오영.

두 기술자는 로튼 프룻츠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 우리한테 어울리는 대가를 지불하는데 어째서 회사가 우스워진다는 건가.

지금 우리가 우습다는 건가?

그런 사춘기적인 반발심이 그의 속에서 불쑥 솟았다.

그를 모르지 않는 대찬은 묘한 미소를 띠었다.

“지금 우리 회사 자금력에 두 분께 백억 단위로 안겨드리면, 두 분이 없으면 이 회사는 당장 뇌사상태에 빠진다는 걸 자인하는 꼴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은오영 소장은 솔직한 말을 툭 내뱉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 지극히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대외적으로 알려져 보세요. 심각한 리스크입니다. 당장 주가부터 고개를 뚝 떨어뜨릴 겁니다. 기세가 꺾여요.”

“…….”

그게 우리가 알 바는 아니잖아.

그걸 무마하고 수습하라고 네가 사장노릇 하고 있는 거잖아.

은오영 소장의 툭 튀어나온 아래턱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찬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저도 상림에 꿀리지 않는 제안을 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은오영 소장을 바라봤다.

“은 소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

“다르샨 싱 전무님을 연구 총책임자로 삼고 상림의 제안 이상 가는 대우를 해드리죠.”

“대, 대표님!”

“두 분에게 과한 페이를 지급하면 회사 이미지에 악영향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분이라면 제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습니다.”

“대표님…….”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싱 전무님을 불세출의 과학자로 꾸며 그만 한 가치가 있다는 걸 대외적으로 철저히 광고할 겁니다.”

은오영 소장은 펄쩍 뛰었다.

한 놈만 잡는다니.

이건 그의 시나리오에 전혀 없던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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