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63화
인수하자마자 사명을 요산테크닉스에서 RF시스템으로 변경했다.
RF는 로튼 프룻츠(Rotten Fruits)의 이니셜이었다.
RF시스템으로 사명을 변경한 후, 초대 대표로는 민승기를 선임했다.
“조 대표, 나 진성 문돌이야.”
“그래서요?”
“무슨 나더러 그런 복잡한 기계 다루는 회사 대표노릇을 하래?”
“대표는 어차피 지극히 문돌이적인 결정만 내리는 자리예요. 기술적인 문제야 연구소와 협력해서 실무진이 해결할 텐데요, 뭘.”
“그래도 그렇지…….”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요산테크닉스 사장을 지내던 사람을 계속 중용할 순 없어요. RF시스템은 로튼 프룻츠를 가동하는 엔진이에요. 가장 믿는 사람한테 맡기는 게 당연하잖아요.”
“믿어주니 고맙다만.”
“RF시스템 본사가 대구에 있어서 그래요? 지방으로 내려가기 싫으세요?”
민승기는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아니야.”
“커피에 애정이 있으시니까 낮밤한잔에 미련 가지실 만해요. 그래도 부탁 좀 드릴게요.”
대찬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거절할 수 없었다.
민승기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대구로 내려갈 짐 싸놓을게.”
“고마워요.”
“그럼 나 대신 낮밤한잔은 누가 맡나?”
“적절한 분과 이미 교감을 나눴어요.”
“누구?”
“오윤 전무라고 아세요?”
“네가 몇 번 얘기해서 이름은 알지. 조 대표랑 면세점 따낼 때 호흡 맞췄던 양반이잖아.”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필래호텔 전무로 계시다가 이번에 퇴직하셨거든요.”
“의외네. 서원웅이 더 붙들 줄 알았는데?”
“아내 분이 지병이 있어서 병구완하신다고 관두셨나 봐요. 다시 일자리 알아보시는데, 이미 필래호텔 대표 자리는 다른 사람이 꿰차고 있어서 돌아가기 어렵게 됐고요.”
“다른 계열사는?”
“서청수 회장님이 필래푸드 사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제 손을 들어주셨어요.”
민승기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필래푸드 사장이 낫지 않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인생 2막으로 적당한 둥지라시면서 이쪽 오퍼를 받아주셨어요.”
“서 회장님 또 네 욕 한바탕 하셨겠다.”
“안 그래도 어제 전화하셔서 쌍욕하고 끊으셨어요.”
대찬과 민승기는 마주보고 웃었다.
민승기는 입맛을 쩝, 다시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도 다행히 자신의 후임이 필래 출신의 오윤이라는 것에 수긍했다.
“호텔업계에서 오래 있으면 와인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지.”
“그건 그렇죠.”
“아마 나보다 훨씬 수완이 좋으실 거다. 조 대표 판단이 맞아.”
“오윤 전무님이 아무리 잘하셔도 맨땅에서 키워낸 선배만 할까요.”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괜히 부끄럽네.”
“고생 많으셨어요.”
“대구로 내려간다고 공치사는.”
대찬은 오윤에게 로튼 프룻츠 전무이사 자리를 내주고 낮밤한잔의 전권을 위임했다.
오윤 전무는 한달음에 흥읍으로 달려왔다.
“저를 잊지 않고 불러주시니, 고맙습니다.”
“아유, 무슨 말씀을요.”
“조 대표님과 함께 일하게 되어 제가 영광이지요.”
“오윤 전무님이 저희 회사에 온다고 해주셔서 며칠을 설렜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지금은 필래에 계실 때보다 좋은 대우는 아니지만, 낮밤한잔이 조금 더 커져서 독립된 법인으로 분리하면 더 좋은 조건으로 모시겠습니다.”
오윤 전무는 손사래를 쳤다.
“그건 됐습니다. 의식주는 이미 벌어둔 걸로도 충분히 해결됩니다. 회사 키우는 재미로 남은 세월 보내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찬은 오윤 전무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필래의 주요 계열사인 필래호텔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는 오윤 전무는 어느 모로 보나 민승기보다 당연히 중량감이 있었다.
대찬이 아예 낮밤한잔에는 신경을 끄고 오롯이 비도축육에만 열중할 환경이 갖춰졌다.
요산테크닉스를 RF시스템으로 간판을 바꿔 손아귀에 넣은 대찬은 광폭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는 흥읍 제1목장의 뒤를 이을 제2, 제3목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흥읍 제1목장에서는 국내 판매를 위한 비도축육을 생산하기로 했다.
제2목장은 평택에, 제3목장은 부산에 짓기로 결정되었다.
수출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비도축육 생산의 주요재료는 동물의 조직세포와 전기, 두 가지뿐이었다.
비도축육은 생산되면서 딱히 공해를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재료를 수급하는 산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물류비를 가장 절감하기 좋은 곳에 목장을 짓는 것이 당연했다.
평택과 부산에 목장이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대규모 물류창고도 짓기 시작했다.
다만, 수출에 있어 문제가 되는 건 아직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비도축육을 식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제2, 제3의 목장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상대적으로 그 규모는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제법 넓은 부지를 확보했으면서 정작 들여놓는 건물은 작게 설계되었다.
평택과 부산의 목장은 비도축육이 전 세계 어딜 가나 식품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국내 소비를 염두에 둔 흥읍의 물량을 나눠서 소화하는 쪽으로 활용될 계획이었다.
평택 제2목장은 수도권 남부 일부 물량과 충청지역의 물량을 맡기로 했다.
부산 제3목장은 당연히 영남권의 물량을 소화하고, 강원 남부와 호남권의 물량까지 도맡게 되었다.
비도축육의 생산단가를 결정하는 건 비단 흥읍 연구소에서 개발되는 기술뿐만이 아니었다.
규모의 경제 또한 단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비도축육에 대한 수요는 여전한 증가세에 있었다.
이를 감당할 대량생산 설비가 전국적으로 면모를 갖추자 단가는 획기적으로 낮아졌다.
여전히 비도축육을 일반 소비자에게 선보이지 못하고 있는 그린블러드 이하 경쟁업체들에 비해 로튼 프룻츠는 아득히 보폭을 넓혀 앞서나갔다.
로튼 프룻츠의 급성장은 한국 경제를 주물럭거리는 재벌 사이에서도 주목할 만했다.
사업 분야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비도축육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으니 저마다 말 한마디씩 보탰다.
경영자총연맹 정기회의.
참석한 회장님들은 서청수 회장을 향해 로튼 프룻츠에 관한 말을 한 마디씩 던졌다.
그건 회장님들을 모시는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경총 회의에 서청수 회장을 수행한 건 김태준 사장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재계의 중요한 사람들끼리 교류하는 자리에는 장백주 실장보다는 김태준 사장을 자주 대동했다.
회장을 수행하는 김태준 사장 같은 사람들은 따로 모여 환담을 나눴다.
그들 사이에서도 여러 화제 중 하나로 떠오른 게 바로 대찬이었다.
대찬이 필래에 재직했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더군다나 김태준 사장은 그의 보스였으니 관심이 그에게로 쏠렸다.
여러 회사가 관심을 보였지만, 특히 축산업계의 공룡으로 불리는 상림그룹의 관심이 컸다.
상림그룹은 일개 양계장으로 시작해 재계 30위 안에 안착한 입지전적인 회사였다.
상림그룹의 전무는 은근슬쩍 김태준 사장의 옆자리를 꿰차더니 은연중에 대찬의 얘기를 꺼냈다.
“필래는 오랜만에 재미 좀 봤겠습니다. 로튼 프룻츠 말이에요.”
“재미야 봤지만 아쉽죠.”
“아쉽다뇨.”
“초창기에 확 인수를 해버렸더라면 더 좋았을 테니 말입니다. 욕심에는 끝이 없죠.”
김태준 사장의 말에 상림 전무는 웃음을 지었다.
“욕심은 우리가 돈을 벌도록 하는 원동력이죠. 하지만 조대찬 대표의 특성을 봐서는 얼마를 줘도 회사를 넘기지 않았지 싶은데.”
“하기야 그렇겠죠. 내 밑에 있었지만 도저히 밑에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거든, 그놈.”
“우리로서는 참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그를 흘끔 보며 말했다.
“상림은 어차피 닭고기 위주 아닙니까? 조대찬 그놈은 쇠고기를 취급하는데요.”
“아무리 저희 재계순위가 낮다고 해도 너무 무심하신 거 아닙니까? 소, 돼지 취급한 지도 이미 오랩니다.”
“그래요?”
“예, 그게 아니더라도 소고기 만드는데 닭고기를 못 만들까요. 확실히 눈엣가시예요, 어쩔 수 없이.”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림 입장에서는 그렇겠네요. 별수 있나. 택시 나오면 인력거꾼은 난처해지는 건 당연하지.”
그러자 상림 전무는 쯧, 가볍게 혀를 걷어찼다.
“말씀이 듣기 좀 그러네요.”
“아, 거북했다면 미안해요.”
“김 사장님은 조대찬 대표랑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시니 이런저런 얘기 나누시겠죠.”
“아무리 그래도 짝꿍처럼 재잘대는 그런 관계는 아니지요.”
상림 전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쪽 내부사정을 좀 들어서 알고는 계시죠?”
“아, 왜 이렇게 남의 회사에 관심이 많아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어서 그럽니다, 위기의식.”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었다.
“상림 같은 대기업이 벌벌 떨 정도는 아니에요, 아직.”
그는 ‘아직’에 힘을 주어 말했다.
상림 전무는 콧잔등을 씰룩였다.
“그래도 대비를 해놔야 나중에 일이 닥쳐도 싸게 막죠.”
“그래, 무슨 대비책이 있으세요?”
“그거야 영업비밀이니 말씀드릴 수 없죠. 조대찬 대표랑 사적으로 친한 분한테는 더더욱.”
김태준 사장은 허허 웃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로튼 프룻츠는 참 신기하죠. 시작할 때는 자본도 그냥저냥인데 삽시에 몸집을 불리니까.”
“그렇긴 하죠.”
“실리콘밸리에서 난다 긴다 하는 회사들을 씹어 먹지 않습니까.”
“조 대표 수완이 어지간하니까.”
“그건 경영자 수완만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감독이 좋으면 뭐 합니까. 결국 테크 산업은 선수가 좋아야 되는데.”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대외적으로 알려진 선수가 그 다르샨 뭐시기 하는 전무랑 은 씨 성 가진 교수던데, 맞아요?”
김태준 사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내가 어찌 알아요? 나도 딱 대외적으로 알려진 만큼만 압니다. 이제 보니 전무님이 나보다 많이 아시네요. 난 그 교수 성이 은씨인지도 몰랐어요.”
“거 참 비협조적이시네.”
상림 전무는 그렇게 말하고는 은근슬쩍 왔던 것처럼 은근슬쩍 김태준 사장의 곁을 떠났다.
더 캐낼 정보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와 더 말을 섞을 이유가 없어진 터였다.
김태준 사장도 그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자리가 파하고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림 쪽에서 로튼을 예의주시하더라고. 특히 연구소 쌍두마차에 관심을 가지더라. 그쪽 모니터해두는 게 좋을 거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그래도 좀 크긴 했나 봅니다. 상림 같은 데서 견제를 다 하고.”
“그러게 말이다.”
대찬은 김태준 사장이 건네준 정보를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다.
그는 탁자를 톡톡 건드리며 김태준 사장이 일러준 말을 되뇌었다.
“우리 쪽 선수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있더란 말이지.”
대찬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쉽게도 비장의 카드는 없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선수가 로튼 프룻츠의 주력이었다.
다르샨 싱 전무, 은오영 소장.
두 명은 그야말로 로튼 프룻츠의 심장.
각기 좌심방, 우심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림은 축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회사다.
가축을 키워서 잡고, 가공해서 내다 판다.
그런 회사에서 왜 로튼 프룻츠의 기술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김태준 사장의 말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걸까.
상림의 전무는 그저 말이나 붙여보려고 가볍게 던진 말인데 김태준 사장이 너무 과민반응을 보인 게 아닌가.
그리고 나도, 정보를 흘려준 사람이 김태준 사장이라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는 게 아닐까.
만약 허운이 같은 정보를 알려줬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썼을까.
‘일이 잘못되려면 꼭 이런 생각부터 들기 마련이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태준 사장의 전언이 사소한 리스크에 불과할지라도, 그 사소한 리스크가 거대한 재앙으로 도래하는 걸 막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대찬의 소임이었다.
만리장성도 개미구멍에 무너지는 법이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로 바깥을 바라봤다.
통유리로 된 벽의 바깥에는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분주하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다르샨 싱 전무의 모습에 대찬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김태준 사장의 전언대로, 대찬은 상림그룹의 동향을 꼼꼼히 체크했다.
대중에 공개된 보고서.
홈페이지에 게시된 모든 자료.
언론에 노출된 대표의 말 한 마디까지 놓치지 않고 파악했다.
그러다 상림그룹 홈페이지에 올라온 CEO 동향에 대찬의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한 지방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분량이 통째로 올라와 있었다.
상림그룹의 회장은 양계장 하나에서 시작해 재계 30위 안쪽의 대기업을 일궈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극도의 자수성가형 인물은 여러 가지 특징을 보이기 마련이다.
개중 하나가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만큼 잘났으니 가능했다.
자기가 잘한 일만 주저리주저리 읊어도 한두 시간은 뚝딱 지나니까.
이 대담 프로그램도 꼬박 40분을 투자해야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