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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60화 (460/556)

난 할 수 있어 460화

다음날 점심시간.

대찬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한태윤 이사, 마강국과 식사를 함께했다.

그는 슬쩍슬쩍 눈치를 보다가 밥을 다 먹고 나서야 용건을 꺼냈다.

“저기, 우리 유부남 분들.”

“네?”

대찬이 한태윤 이사와 마강국을 한 데 묶어 유부남 분들이라고 부른 것은 한 차례도 없었다.

마강국은 에피니키온 동기, 가까운 선후배를 통틀어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생소한 호칭에 둘은 동시에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프러포즈 어떻게 했습니까.”

그 말에 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마강국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야, 아… 아니, 대표님, 지금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프러포즈를 표절하시겠다는 거예요?”

“아, 표절이 아니고… 참고하겠다는 거죠, 참고.”

“이게 윤이영 씨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허튼수작 부렸다가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표 받아낼 거예요.”

“…….”

마강국의 짓궂은 표정은 5초도 되지 않아 온순해졌다.

그는 한결 협조적인 톤으로 말했다.

“제가 프러포즈 한 거라도 알려드릴까요?”

저 고릴라가 해서 먹혔을 정도면 내가 하면 필승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대찬은 잔뜩 기대하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했어요? 프러포즈?”

“그게 있잖습니까.”

“응응.”

대찬은 마강국에게 전례 없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마강국은 입맛을 한번 다시고 입을 열었다.

“그게 말입니다. 제 친구가 프로축구단 마케팅 직원이거든요? 저기 상암구장 쓰는.”

“…응?”

“그래서 그 친구한테 슬쩍 돈을 찔러주고 말입니다.”

“…….”

“키스타임 시간에 카메라가 저를 딱! 비추는 겁니다.”

“하.”

대찬은 단전에서부터 한숨을 끌어올려 푹 내쉬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마강국은 당황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그다음에 그 앞에서 무릎 꿇으면서 반지 짠 보여주면서 프러포즈 했다고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됐습니다. 일하러 갑시다.”

“아니, 이거 진짜 기가 막힌 방법입니다, 대표님!”

“아, 알았다니까요.”

대찬은 한태윤 이사의 프러포즈 방법을 기대해봤지만 그는 한술 더 떴다.

바닥에 촛불을 좍 깔아놓고 거대한 곰인형을 주며 결혼해달라고 했단다.

대찬은 짙은 한숨을 내뿜으며 대표실로 돌아왔다.

결국 대찬은 무난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다음날, 대찬은 휴가를 내고 종로에서 반지를 맞췄다.

‘좋아하려나.’

대찬은 프러포즈 반지를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나름대로는 거금을 들여 맞췄는데도 윤이영의 취향에 맞을까 계속 걱정했다.

제대로 못 하면 결혼생활 내내 시달릴 것이 분명할 터.

대찬은 이런저런 큰일을 벌일 때보다 더 긴장했다.

대찬은 잠깐 사이에도 반지가 들어있는 상자를 계속 열었다 닫았다.

프러포즈는 성공했다.

대찬은 그다지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의 프러포즈는 딱 남들 하는 정도였다.

호텔방을 빌려 음악을 틀고 무릎을 꿇고 반지를 건넸다.

상투적인 레퍼토리에도 윤이영은 기꺼이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 눈물을 보고 대찬 역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대찬은 윤이영의 반지 낀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울음에 살짝 잠긴 목소리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영아, 나랑 결혼해줄래?”

“응…….”

윤이영은 눈물을 훔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프러포즈는 결혼으로 가는 길고 긴 여정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지루하고 현실적인 과정들이 떡하니 앞길에 버티고 있었다.

다행히도 대찬의 부모님은 둘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대찬과 윤이영은 대찬의 남해 본가로 부모님을 뵈러 갔다.

대찬의 부모님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드디어 저게 장가를 가긴 가는구나!”

“얼른 데려가, 얼른!”

부모님의 격한 반응을 보고 되레 대찬이 민망해졌다.

“엄마, 아빠, 너무 재고 떨이하는 장사꾼 같지 않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 혼기가 찰대로 찼는데 언제까지 버틸 작정이었어?”

“진짜 너무하네!”

윤이영은 무릎을 꿇은 채 살짝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았다.

대찬은 찌릿 그쪽을 향해 눈빛을 쐈다.

“웃지 마.”

“풉… 웃긴 누가 웃었다고 그래.”

대찬의 어머니, 그러니까 윤이영의 예비 시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꼭 붙들며 당부했다.

“이영이도 오래 사귀었으니까 알지? 저거 속 좁고 성질 드러운 거.”

“그래도 자꾸 보면 귀여워요.”

“어머, 저게 귀여워? 비위도 좋아라. 모쪼록 참고 잘 살아줘.”

“네, 잘 데리고 살겠습니다.”

“부디 그 콩깍지 관뚜껑에 못 박을 때까지 안 벗겨지길 바랄게.”

둘의 쿵짝에 대찬은 넌덜머리를 냈다.

“진짜 나중에 부부싸움해도 본가는 안 와야겠다.”

“제발 오지 마. 둘이 해결 봐야지 본가로 피난은 왜 오니? 마인드부터가 글렀구나.”

“…말을 말아야지.”

“말렴.”

시댁에 인사를 드렸으니 이제 처가에 인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둘은 그러지 못했다.

윤이영은 부모와 거의 의절한 상태였다.

연기대상까지 타고 능력과 외모를 겸비한 여배우다.

이제는 딴따라니 뭐니 하는 말은 가당치도 않았다.

그녀를 내내 부정하던 그녀의 부모도 점점 태도를 바꿨다.

2년 전부터는 슬금슬금 연락을 시도해왔다고 했다.

윤이영은 이런 사실을 대찬에게 일언반구 전하지 않았다.

윤이영은 단호하게, 제3자가 볼 때는 매몰차게 부모의 연락을 차단했다.

그래도 결혼식인데 부모님 모시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런 말이 대찬의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쉽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윤이영은 자신의 부모 얘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할 말 안 할 말 시원시원하게 하는 그녀가 말을 피하는 모습.

상처가 깊어도 너무 깊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차마 그녀에게 부모님을 모시자고 말하지 못했다.

대찬은 윤이영의 등을 쓸면서 말했다.

“괜찮겠어?”

“응, 이편이 좋아.”

“그래, 당사자가 그렇다면 그래야지.”

윤이영은 웃음을 지으며 대찬을 올려다봤다.

“솔직히 쪽팔리지.”

“응?”

“신부 부모석에 아무도 없으면, 오빠 쪽팔릴 거 아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뭐라고. 쪽팔릴 것도 없지만 쪽이 팔려도 팔리는 게 나아.”

“왜?”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이야. 뭐 여러 번 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넌 아닐 테니까, 그지?”

대찬의 말에 윤이영이 웃기만 하자 대찬의 눈이 커졌다.

“왜 대답이 바로 안 나올까?”

“그래, 한 번만 할 거야.”

“한 번만 할 건데 기분이 엉망진창이면 어떡해. 차라리 쪽팔리고 말지. 아, 참고로 안 쪽팔린다.”

“알았어, 고마워.”

윤이영은 대찬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때 윤이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찬은 액정을 흘끔 건너보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야?”

“어… 태영주 선생님.”

“그, 시상식 때 뵈었던 선생님?”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결혼한다고 연락주셨나 보다. 은근히 이런저런 대소사 잘 챙겨주시거든.”

“고마운 분이네.”

“고마운 분이지……. 힘들 때마다 큰 도움 주셨던 분이야. 오빠 다음으로. 나 전화 좀.”

대찬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윤이영은 배우답게 방금 전의 우울한 목소리를 싹 지우고 쾌활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대찬과 윤이영이 마음을 모으고 대찬 부모님의 적극적인 동의까지 얻었다.

둘의 결혼은 거칠 것이 없었다.

식장도 생각보다 빨리 구해졌다.

필래 측에서 협조해주었다.

필래호텔에서 가장 넓고 사치스러운 홀이 둘의 결혼식장으로 제공되었다.

다른 홀은 예약이 꽉 차있었지만 그 홀은 차는 날보다 비는 날이 더 많았다.

아무리 결혼식이라도 덜컥 지불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 덕분이었다.

기실 대찬이나 윤이영이나 한국에서 유명하기로는 이제 남부럽지 않은 정도였다.

때문에 협찬을 제의해오는 웨딩홀이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필래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대찬과 윤이영은 지인들과 만나며 열심히 청첩장을 돌렸다.

오랜만에 필래 사옥에도 들러 옛 동료 직원들에게 청첩장을 돌렸다.

그러다 지나가던 김태준 사장에게 포착되었다.

“어이, 설마 비바체 사람들 거만 챙긴 건 아니지? 내 것도 있지?”

“아… 네, 물론입니다. 뵙고 드려야 하는데 사소한 일로 따로 말씀드리기 어려워서 전전긍긍하던 차였습니다.”

“사소한 일은 무슨. 남들은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하는데. 겸손도 그 정도면 병이에요, 병. 그럼 싸가지 없게 문자만 띡 보내려고 했어?”

“그건 아니지만요, 하하…….”

“지금까지 나한테 얻어먹은 밥 많으니까 오늘은 거하게 쏴라.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어야지.”

“옙,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청첩장을 받은 김태준 사장은 서청수 회장과 만났을 때 얘기를 꺼냈다.

“조대찬이 결혼식에 가실 겁니까?”

“가야지. 내 조카며느리의 남동생 결혼식이잖아.”

“엄청 멀어 보이는데요.”

서청수 회장은 눈빛을 쐈다.

“조카며느리의 남동생이자, 아들의 절친한 친구 결혼식이야. 이럼 됐나?”

“예, 뭐… 코딱지 긁어모아 왕건이 만든 느낌이긴 하지만.”

“꼭 그렇게 더러운 비유까지 동원해가면서 비꽈야겠나?”

“허허.”

서청수 회장은 쩝,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주례는 나한테 맡기겠지?”

“어, 글쎄요. 아무래도 어려워하지 않을까요?”

“아냐.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조대찬이 주례를 서겠어?”

서청수 회장은 자신했다.

결혼식 당일.

대찬과 윤이영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하객이 붐볐다.

과장 좀 보태 세기의 결혼이라고 했다.

하객들도 그 수식어에 어울릴 정도로 화려했다.

윤이영의 연예계 인맥, 대찬의 정재계와 언론계 인맥이 총망라되었다.

누구는 결혼식장에 모인 사람만으로도 한국 현대인물 사전을 편찬해도 좋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물론 얼굴만 봐도 이름을 아는 사람들만 하객이 아니었다.

그들하고의 관계는 비교적 최근에 맺어진 것이었다.

대찬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지나, 필래유통, 마트, 비바체의 직원으로 지내던 짧지 않은 세월.

그동안 인연을 맺어온 소중한 사람들도 대찬을 축하해주기 위해 식장을 찾았다.

대찬은 일일이 그들에게 깍듯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특히 음으로 양으로 대찬을 도와주었던 만몽거사에게 대찬은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크게 표현했다.

만몽거사는 못 본 사이 훨씬 더 늙어 있었다.

“거사님, 잘 지내셨죠.”

“이 나이에 안 죽고 두 발로 걸어 다니기만 해도 잘 지내는 거지.”

“바쁘다는 핑계로 잘 못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됐어. 큰일 하는 사람이 다 그렇지, 뭐.”

만몽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젓고는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에게 만몽거사가 유독 감사한 사람이라면, 윤이영에게는 태영주가 유독 그랬다.

태영주는 화사한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녀가 이 행사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복스럽게 웃으며 대찬에게 꾸벅 목례를 하고는 바로 윤이영의 손을 꽉 붙들었다.

“이영아, 축하한다. 꾸며놓으니까 이렇게 예쁠 수가 없다. 네 신랑도 멀쑥하고.”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마음 써주셔서……. 절 아끼지 않으셨으면 그런 생각 못하셨을 텐데.”

“널 아끼니까 그런 생각 했지.”

태영주는 윤이영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신부 측 부모석에 앉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평소답지 않게 조심하고 신중했다.

태영주가 그 자리에 앉으면 분명히 세간의 관심을 받을 것이다.

그럼 윤이영을 돕자고 나선 일이 도리어 해가 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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