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59화
대찬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주식시장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주가 변동에 따른 경영 판단은 제 몫입니다. 여러분은 일희일비하지 말고 하던 일만 계속해주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대표님.”
“여기 계신 분들 중 대부분은 우리 회사 주주이기도 합니다. 연일 가진 주식이 오르니 틈 날 때마다 확인하고 싶은 기분, 저도 잘 압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
직원들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는 주주의 신분보다는 직원의 신분이 우선입니다. 근무시간에 차트 들여다보는 건 지양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회사 바깥에선 얼마든지 주주의 역할을 해주셔도 좋습니다. 저한테 꽁한 분들은 주총 나오셔서 깽판 쳐도 양해해드릴게요.”
직원들은 웃음을 지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기가 막혀서 피식 웃었다.
“고개 끄덕이시는 분들은 진짜 깽판이라도 치실 요량이세요?”
“하하……. 아닙니다.”
“우리 목표는 코스닥 골목대장이 아닙니다. 저는 물론이고 여러분 모두도 더 높은 곳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호황은 마라톤 뛰면서 생수 한 병 들이킨 정도로만 여기세요. 갈 길 멉니다.”
“넵!”
대찬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튼 프룻츠는 계속 바쁘게 돌아갔다.
다만 대찬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대찬은 지금껏 누구보다 바쁘게 달려왔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로튼 프룻츠를 주식시장에 상장시켰다.
그 이후로는 완성된 시스템 속에서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면 되었다.
그러니 직원들은 여전히 바빠도 대찬에게는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껏 공적인 영역에서 뼈가 빠져라 움직였다.
사적인 영역은 잘 돌보지 못했다.
주말에도 흥읍 사옥으로 출근하는 까닭에 윤이영과 오붓한 시간도 거의 보내지 못했다.
‘이제는 내 사생활을 좀 돌볼 때지.’
대찬은 지금이 아니면 그럴 여유가 더 없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인생의 중대사를 치르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대찬은 주변 환경에 좌지우지되어 중대사를 결정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는 성수동 집에 윤이영을 초대했다.
대찬의 초대에 윤이영은 덤덤하게 응하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웬일이야? 한두 달쯤 지나야 이 집에 발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그러지 마.”
대찬의 난감한 목소리에도 윤이영은 툴툴거렸다.
“나도 천지분간은 해. 바쁜 건 알지. 하루에 네 시간도 못 자는 거 잘 알고 있어. 오빠처럼 예민하고 성질 더러운 사람은 걱정하느라 그마저도 잘 못 자겠지.”
“반박하고 싶은데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그래, 이해해, 이해한다고. 근데 머리랑 가슴은 원래 따로 노는 거거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지.”
“나 참, 우리 오빠 언제나 시간이 날까, 오늘은 나랑 놀아줄까, 하면서 기다리게 되더라니까. 초딩도 아니고.”
“…….”
“이런 거 보면 애인을 너무 사랑해도 문제야, 그렇지?”
“그렇지.”
대찬의 대답은 낙제였다.
“그렇지? 그렇지이? 그걸 지금 대답이라고 해?”
“미안해. 할 말이 없어서 그래.”
“에휴, 애인이 너무 잘나도 문제야. 적당히 필래에서 고속승진할 때가 좋았지.”
“나도 가끔 그때가 그립네.”
대찬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윤이영은 대찬을 바라보며 웃었다.
“근데 오늘 진짜 시간 괜찮아서 부른 거야? 바쁜데 내 등쌀 못 이겨서 무리한 거 아니야?”
대찬은 손사래를 쳤다.
“여유가 좀 났어. 한 이사님도 나더러 좀 쉬라고 하시더라고. 본인이 대타 뛰어주신대. 이틀 연차 얻었어.”
“다행이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밖에 막 쏘다니고 다닐 체력은 없고, 그리고 우리가 그럴 신세도 아니고.”
남들처럼 둘이 손 꼭 잡고 청계천이라도 걸으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대찬도, 윤이영도 훤히 잘 알고 있었다.
집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편이 좋았다.
그래서 성수동 집도 당시 구입할 때, 일부러 대찬의 재력에 알맞은 수준보다 조금 더 넓은 곳으로 구해놓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윤이영에게 말했다.
“와인 한 잔 할래?”
“와인, 좋지. 웬일이야? 조지아에서 와인 들여온 이후로는 잘 쳐다도 안 보더니.”
“이번에 발주를 두 배로 늘렸더니 와이너리에서 가장 비싼 걸 선물로 주셨거든.”
윤이영은 장난으로 대찬을 꾸짖었다.
“제일 비싼 게 선물로 들어왔으면 직원들하고 나눠 마셔야지, 아니면 민 전무님한테 드렸어야지. 와인에서 손 뗀 지 한참이면서 그걸 또 받아왔어?”
“나 먹으라고 딱 쪽지까지 붙여서 갖다 줬는데 이걸 왜 남들하고 나눠 마셔?”
“그래? 그럼 어디 맛이나 한번 보자. 이리 가져와.”
윤이영은 익숙하게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을 치웠다.
둘이 끼니를 때우거나 가볍게 술을 한 잔 할 때에는 대개 그 테이블을 이용했다.
그런데 대찬은 부엌에 있는 식탁에 병을 올려놓았다.
“오늘은 여기서 마시자고.”
“웬일로?”
“명색이 제일 비싼 와인인데 궁색하게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 먹기는 좀 그렇잖아?”
“그건 그래.”
윤이영은 금세 수긍하며 쪼르르 식탁으로 달려갔다.
대찬은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놓고 은은한 무드등을 켰다.
둘은 평소 와인도 맥주와 다름없이 취급했다.
그냥 머그컵에 가득 부어 마셨다.
그런데 대찬은 와인 잔까지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윤이영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은 낌새를 눈치 챘다.
“뭐야? 웬 와인 잔?”
“와인 먹으려고 와인 잔 꺼내는 건데, 왜. 이상해? 비싼 와인이라니까.”
“아니 뭐, 이상한 건 아니고.”
윤이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찬을 한 번 더 흘끔 봤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간단한 안주를 뚝딱 만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윤이영이 좋아하는 카프레제였다.
썬 토마토, 모차렐라 치즈, 바질 위에 올리브유를 뿌린 간단한 요리였다.
윤이영이 유독 좋아해서, 대찬의 성수동 집 냉장고에는 카프레제를 만들기 위한 좋은 품질의 토마토와 치즈, 바질이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
대찬이 카프레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잔을 살짝 들자, 윤이영이 웃으며 물었다.
“오빠,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잘못? 아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내 비위를 잘 맞춰줄까? 말 한 마디 없이 뚝딱뚝딱.”
“이젠 비위 맞춰줘도 뭐라고 하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뭐, 잘못한 거 없으면 됐어.”
윤이영은 웃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대찬은 윤이영에게 카프레제를 먹여주었다.
윤이영은 아기 새처럼 음식을 받아먹고 오물오물 씹어 넘긴 뒤, 대찬을 바라봤다.
“진짜, 이 조대찬이 왜 이럴까?”
“자, 한 번 더.”
대찬은 침을 꼴깍 삼키며 윤이영에게 카프레제를 한 번 더 먹여주었다.
윤이영은 그걸 또 맛있다고 받아먹었다.
윤이영이 음식을 씹는 동안, 대찬도 속으로 무언가를 곰곰이 곱씹었다.
아무래도 뭐가 있는 게 분명해.
윤이영은 확신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는데 대찬은 연신 아니라고만 했다.
그렇다면 그가 아직 말할 준비가 안 되어있다는 뜻이었다.
‘알아서 어련히 잘 할까.’
윤이영은 대찬이 말하고 싶을 때 말하도록 배려했다.
덕분에 대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카프레제만 먹어치웠다.
그러다 대찬은 결심한 듯, 남은 와인을 한 번에 죽 들이켜고 탁 내려놨다.
그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윤이영을 응시했다.
윤이영의 눈에 비친 대찬의 표정은 그녀에게 낯선 것이었다.
이미 여러 해를 만나 사랑을 나눴지만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고백을 할 때도 어땠나.
제가 윤이영 씨를 좋아하는 거 같네요.
끝.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시큼털털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고백하는 동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찬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찬의 목울대는 끊임없이 울렁였다.
열심히 침을 목구멍 뒤로 넘기고 있었다.
눈빛도 다분히 흔들렸다.
계속 윤이영을 빤히 바라보던 대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응.”
윤이영은 대찬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래 사귀었고.”
“응.”
“우리 나이도 언제 이렇게 많이 먹어버렸나 싶고.”
대찬의 말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윤이영은 거기까지 듣더니 대찬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말을 막았다.
“잠깐.”
“응?”
“더 말하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윤이영은 예리한 눈빛을 더 예리하게 벼리며 말했다.
“지금 딱 보니까 결혼 얘기 꺼내려는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
대찬은 당황해서 눈이 커졌다.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죽을 줄 알아.”
“어?”
“더 말하지 마.”
대찬은 울먹이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나랑 결혼하기 싫어……?”
“결혼 얘기 꺼내지 말랬지!”
“너무해.”
“잠깐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대찬은 주문대로 따랐다.
윤이영은 이마를 탁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너무한 건 오빠 아니야?”
“내가 뭘.”
“아무리 털털하고 편한 게 좋다지만 나도 로망이 있다구.”
“알아.”
“알면서 그래? 프러포즈 나도 한 번 받아보자. 구렁이 담 넘어가는 그런 거 말고. 좀 특별하게 안 될까?”
“특별하게?”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남자가 하란 법은 없지. 그래도 여태 연애하면서 내가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결혼은 오빠가 먼저 하자고 해줘.”
대찬은 피식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오늘 프러포즈 할 마음은 없었어. 그래도 나도 최소한의 확신은 있어야 용기를 내지.”
“확신이 있으면 용기가 왜 필요해? 용기는 불확실할 때 나오는 거야.”
“아이고, 알겠습니다. 내가 잘못했어.”
“흥, 이미 확신 얻은 표정인데, 뭐. 그러니까 제대로 해줘.”
“알았어.”
대찬은 웃으면서 윤이영에게 항복했다.
첫 번째 삶에서 배운 걸 두 번째 삶에서 가장 못 써먹는 분야를 꼽자면 바로 연애사업이었다.
대찬은 결혼 얘기는 최대한 담백하게 꺼내자고 마음먹었다.
첫 번째 삶.
그때의 대찬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만큼 요란하게 프러포즈를 했다.
그랬다가 처참하게 거절당했다.
그때의 기억은 산전수전 다 겪은 두 번째 삶의 대찬임에도 뼈가 시렸다.
그땐 어중이떠중이 같은 친구들을 동원해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계획은 더 어중이떠중이였던 대찬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 아이디어란 이랬다.
1. 지인의 지인인 프로야구단 마케팅팀 직원에게 뇌물 아닌 뇌물을 먹인다.
2. 키스타임 시간에 대찬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3. 대찬은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반지를 꺼내 프러포즈한다.
4. 관객들은 환호하고, 여자는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수줍게 손을 내민다.
5. 대찬은 여자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프러포즈를 승낙 받는다.
대찬은 성공을 확신했다.
하지만 요란하고 갑작스러운 프러포즈는 역효과를 냈다.
겨우 서로를 탐색하는 단계라고 생각하던 여자는 감격하기보다는 수치심을 느꼈다.
대찬이 여자에게 무릎을 꿇는 순간.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야구장을 빠져나갔다.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찬은 멍하니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관객들은 어색함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느라 진땀을 뺐다.
그게 대찬이 갖고 있는 유일한 프러포즈의 역사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유독 덤덤하고 담백한 프러포즈를 하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차.
그런데 그게 도리어 이번에도 씁쓸한 성적표를 안기고 말았다.
그러니 사태의 원흉은 열탕이 싫어 냉탕에 빠져버린 대찬의 극단주의라고 해야 옳았다.
대찬은 그새 자신의 팔을 베고 곤히 잠든 윤이영을 한참 바라보다가 웃었다.
대찬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윤이영은 대찬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