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58화
“앞으로 얼마나 걸리겠어.”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 10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조건 그래야 해. 늦으면 이게 무슨 개망신이냔 말이야.”
“예, 회장님.”
그리고 바로 옆 차선.
거기 멈춰 선 또 다른 검은색 벤츠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답답하네, 답답해. 차라리 내려서 걸어가는 게 빠르겠구만.”
훤한 이마를 지닌 그는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타북행사 뒤에는 기업 홍보 동영상이 상영되었다.
그 동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중년 남성들이 시간차를 두고 검은색 벤츠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허겁지겁 여의도 한국거래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어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다.
“뭐야, 쵸 후쿠히로 아니야? 맞지.”
“어……. 오늘 저 양반 온다는 말 있었나?”
“아까는 서청수 지나갔잖아. 뭔데, 진짜.”
“아, 알았다. 지금 조대찬네 회사…….”
눈이 휘둥그레 떠져서는 허겁지겁 뛰어가는 걸음을 따라 시선이 옮겨졌다.
대찬과 로튼 프룻츠의 요인들, 그리고 한국거래소의 임원들은 나란히 매매개시 벨 앞에 섰다.
이제 로튼 프룻츠의 역사적인 첫 거래가 이뤄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급히 거래소 직원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대찬과 함께 선 코스닥본부장을 불렀다.
“본부장님!”
그러자 본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리에 참석한 기자들을 잠깐 의식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직원을 꾸짖었다.
“야, 네가 끼어들 타이밍이냐, 지금?”
“필래 서청수 회장이 왔습니다.”
“뭐, 뭣!”
그 말에 본부장의 바로 옆에 있던 대찬의 귀도 쫑긋 섰다.
“서 회장님이 오셨다고요?”
미처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또 다른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본부장님!”
“또 뭐야!”
“장복광, 쵸 후쿠히로 회장이 왔습니다.”
본부장과 더불어 대찬도 어안이 벙벙했다.
서청수 회장과 쵸 후쿠히로 회장.
1분도 쪼개 쓰는 그들이 이 이른 아침에 거래소를 방문할 이유는 대찬 하나뿐이었다.
‘사전에 전혀 언질도 없이……. 두 분 사이에 교감은 이뤄진 건지 모르겠네.’
서청수 회장과 쵸 후쿠히로 회장은 거래소 로비에서 딱 마주쳤다.
둘은 모두 서로의 방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때문에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저 멍했다.
“어… 쵸 회장님.”
“서 회장님.”
둘은 어색하게 묵례했다.
서청수 회장은 여전히 갈피가 잡히지 않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길 어떻게…….”
“오후에 경영자총연맹과 자리 있는데 오전에 시간이 잠깐 나서요.”
“아…, 그러셨군요.”
“조 대표 상장한다기에 잠깐 들렀습니다만. 그러는 서 회장님은…….”
서청수 회장은 얕은 한숨을 쉬며 속내를 털어놨다.
“저랑 일정이 같으시군요.”
“…….”
서청수 회장은 이 자리에 깜짝 등장할 예정이었다.
로튼 프룻츠가 상장하는 자리에 자신이 갑자기 등장해 대찬과 나란히 선다면, 그림이 괜찮을 것이다.
유망한 청년 기업인을 키워낸 사부님처럼 보여서 이미지메이킹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서청수 회장의 복심인 장백주 실장은 그렇게 조언했다.
장백주 실장은 사전에 조율하면 대찬이 분명 관심이 분산되는 게 싫어서 퇴짜를 놓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깜짝 등장으로 하시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웬걸.
뜻하지 않게 쵸 후쿠히로와 더불어 대찬의 들러리만 서게 생겼다.
서청수 회장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장백주 이 새끼, 회사 들어가면 조인트다.’
쵸 후쿠히로 회장 역시 서청수 회장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자신이 로튼 프룻츠의 떡잎을 맨 처음 알아본 장본인이자, 대찬의 든든한 후견인이라는 걸 대외적으로 알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대뜸 필래에서 끼어들어서 그림을 다 망쳐버렸다.
둘은 입 안에서 몰칵 오르는 쓴맛을 참으며 서로에게 살짝 목례했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시죠.”
“…예.”
서청수 회장과 쵸 후쿠히로 회장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고, 본부장은 잔뜩 얼어붙었다.
코스닥본부장으로서 대개 보는 인물들이란 중소기업 사장들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재벌.
한 사람은 세계 경제의 트렌드를 주무르는 대부호였다.
본부장의 어깨가 얼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어안이 벙벙한 시선으로 둘을 맞이했다.
“회장님들께서 어떻게…….”
그러자 서청수 회장이 작위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쵸 회장님과 모처럼 의기투합했어. 자넬 깜짝 놀래켜주자고 말이지. 그렇지요, 회장님?”
“예? 아, 하하… 맞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둘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찾아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같이 벨 누르시죠.”
“어흠, 그럴까…….”
두 회장이 대열에 합류하자, 코스닥본부장은 그들에게 가운데 자리를 양보했다.
대찬은 좌청수 우복광으로 걸물을 거느리고 활짝 웃었다.
5, 4, 3, 2, 1.
장내 아나운서의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동시에 벨을 눌렀다.
삐이이 하는 부저와 동시에 거대한 전광판에 로튼 프룻츠의 최초 가격이 전시되었다.
최초(기준) 가격
종목명 : 로튼프룻츠
최초가격 : 8,300원
거 래 량 : 36,200주
공 모 가 : 3,100원
“축하드립니다! 로튼프룻츠의 첫 번째 거래, 공모가를 크게 웃도는 8,300원으로 시작합니다!”
순조로운 출발에, 상장식에 참여한 모두는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날 로튼 프룻츠는 1주 당 약 7천 원에 장을 마쳤다.
로튼 프룻츠가 발행한 총 주식은 약 2,800만 주였다.
상장 첫 날, 로튼 프룻츠는 시가총액 약 2천억 원의 기업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코스닥 상장사들 중에 200위권 대에 안착했다.
당장의 성과보다는 비도축육 분야의 선두에 서 있다는 미래의 가치에 비중을 둔 평가였다.
쾌조의 스타트였다.
첫날 7천 원으로 평가된 로튼 프룻츠의 주식은 대찬을 순식간에 갑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물론 대찬이 그 주식을 팔아서 현금으로 챙길 일은 없을 터였다.
대찬이 보유한 로튼 프룻츠의 지분은 약 20%.
그러니까 대찬의 재산은 주식만 해도 400억 원 규모에 달했다.
대찬은 구름 위에 붕 뜬 듯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게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처지이니 사이버머니를 보는 듯 더욱 실감이 나질 않았다.
대부분 로튼 프룻츠의 주주이기도 한 직원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자본주의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까지 오는 데 최일선에서 수고했던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 역시, 각각 1%의 지분을 보유한 덕택에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을 받았다.
대찬의 휴대폰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울렸다.
대찬을 믿고 큰돈, 작은 돈 저마다 로튼 프룻츠에 밀어 넣었던 사람들로부터의 전화였다.
첫날의 호가만으로도 재미를 톡톡히 본 터였다.
그런데 그들 중에 재미 봤으니 이제 손 털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 * *
대찬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눈 상대는 민승기였다.
그런 민승기가 서울 사무실에 남고 난 뒤, 그의 역할을 대신하는 건 한태윤 이사였다.
한태윤 이사는 민승기의 좋은 대체재였다.
그는 항상 정론만을 얘기했다.
삐딱선 타기를 좋아하는 대찬은 그의 정론이 좋았다.
삐딱선도 올곧게 그어진 직선이 있어야 제대로 탈 수 있는 법이다.
때로는 과하게 치사하고 괴팍한 술수로 빠지려는 대찬을 한태윤 이사의 정론이 붙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점심식사도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한태윤 이사와 함께했다.
한태윤 이사가 부재중일 때만 마강국과 단둘이 식사를 했다.
대찬은 고충도 들을 겸 여러 직원들하고 돌아가면서 식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건 윗사람의 속편한 생각이란 걸 잘 알았다.
회사에 있으면서 유일하게 업무에서 해방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다.
그런데 눈치 없는 사장이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면.
분위기야 안 봐도 훤했다.
그래서 대찬의 점심 메이트는 항상 한태윤 이사였다.
대찬은 식사를 마치고 그와 티타임을 가지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회사 다닐 때 주식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차트에 자꾸 눈이 가시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요.”
“저도 재테크에는 초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군요. 외면하기에는 그래프가 너무 예뻐서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로튼 프룻츠가 상장된 이후.
주가는 단기수익 실현을 위한 조정 몇 번을 제외하고는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뭐든 커가는 것은 귀엽다.
토실토실 살 오르는 강아지만 해도 귀여워 죽겠는데.
점점 살 오르는 것이 돈이라면.
말이 필요 없었다.
시총 2천억으로 시작한 로튼 프룻츠는 그 한계를 모르고 가파르게 상승가도를 탔다.
비도축육을 다루는 회사 중에서 가장 먼저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다.
박람회 전에는 확고한 업계 선두로 여겨지던 그린블러드도 여전히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쪽도 투자자들이 던져주는 돈만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코테츠 키친은 말할 것도 없었다.
네덜란드, 이스라엘, 일찍이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 나라들에서도 로튼 프룻츠 같은 회사는 등장하지 않았다.
아직 법제화의 벽도 못 넘은 회사들이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충분한 자금을 갖춘 데다가 생산단가를 재래육 이하로 낮추기 전부터 수익을 내고 있었다.
완수된 법제화.
충분한 자금력.
분명한 수익모델.
안정적인 인프라.
거기에 확실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경영자까지.
강점에 반해 로튼 프룻츠의 발목을 잡을 약점은 없었다.
로튼 프룻츠의 브랜드가 신뢰를 얻으면서 커피와 와인도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마케팅 전략은 파푸아뉴기니와 조지아, 우수하지만 생소한 나라들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을 어필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로튼 프룻츠 브랜드를 내세우는 것으로 전면 수정되었다.
커피에 관한 품목은 그 품목별로 성장세가 판이했다.
인스턴트커피와 커피조제품의 수입은 크게 줄거나 답보상태.
반면 생두나 원두의 수입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듯 급등세를 보였다.
로튼 프룻츠가 취급하는 품목은 생두나 원두.
커피시장이 커지는 동시에 로튼 프룻츠의 브랜드 가치가 커지는 상황이었다.
커피시장이 커지는 것보다 카페 점포 수가 늘어나는 것이 더 빨랐다.
그래서 카페 사업은 개별 사업자로 봤을 때, 영 재미가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카페에 원두를 공급하는 사업 자체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다.
민승기는 때에 맞춰 파푸아뉴기니 원두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대량으로 유통되는 베트남, 브라질, 콜롬비아의 원두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낮한잔, 밤한잔’ 브랜드 역시 비도축육에 뒤처지지 않고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비도축육의 들러리로만 여겨졌던 커피와 와인까지 덩달아 왕성한 성장세를 보였다.
로튼 프룻츠의 지붕을 뚫을 기세에 힘이 더해졌다.
로튼 프룻츠는 코스닥 상장 한 달 만에 코스닥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어냈다.
상장 이후 한 달 만에 수익률은 마이너스로 전환된다.
그건 그 바닥의 생리였다.
상장 이후 한 달이 지나면 수익률이 –8퍼센트를 기록했다.
석 달이면 –10퍼센트 밑으로 주저앉았다.
통계적으로 그랬다.
그런데 로튼 프룻츠는 한 달, 석 달이 지나도록 급류를 거스르는 연어처럼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상장 첫날 7천 원으로 시작했던 주가는 한 달 만에 만 원을 돌파했다.
이어 상장 두 달 후에 단가를 다시 낮췄다는 발표가 있자, 폭등.
만 삼천 원.
상장 세 달 후에, 다시 단가 하락, 주가 폭등.
만 육천 원.
대찬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건 평정이었다.
대표라는 작자가 하늘로 올라가는 주가를 따라 정신머리도 같이 올려 보내서는 곤란했다.
로튼 프룻츠의 주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하자 거품론을 제기하는 언론들이 더러 생겨났다.
코스닥의 주요 투자자는 개인이었다.
기관과 외국인의 비중은 코스피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나름 분석적이고 정석적인 투자를 하는 기관과 외국인에 반해, 개인의 투자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한정된 정보로 부정확한 배팅을 하기 마련이었다.
루머에 휩쓸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아수라장에서 지금의 고공행진은 한바탕의 단꿈에 불과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