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56화
“그냥 좀 봐줘라. 나 없어도 비바체 잘만 돌아가더만. 내가 또 예전처럼 간섭하면 우리 김풍호 대표님 숨 못 쉬어서 돌아가세요.”
“그래, 김 대표님 취임하고 나서 대단한 변화는 없어도 현상 유지는 잘 되더라고. 다행이지.”
“지금처럼만 굴러가면 한국 유통업은 그냥 비바체가 씹어 먹는 거야.”
대찬은 부러 과장된 표현으로 김풍호 대표의 역성을 들었다.
“그렇게 바쁘신 분이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보자 한 건 아닐 테고?”
“부탁 좀 하려고.”
“웬일로 뜸을 들여. 조대찬답지 않게.”
“내가 생각해도 염치가 좀 없거든.”
“염치없기로 따지면 내가 네 열 배는 될 걸? 너한테 받은 도움이 얼만데 웬만한 부탁은 내가 거절할 입장이 안 되지. 그건 진짜 염치없는 거거든.”
서원웅이 너그럽게 나오자, 대찬도 속에 있는 얘기를 꺼냈다.
“사람 좀 훔쳐 쓰자.”
“훔쳐 써?”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산호, 오다혜, 홍은주. 가능하면 한태윤 부장님도.”
“허, 아예 기둥뿌리를 뽑아 가시겠다?”
“기둥뿌리 뽑을 작정이었으면 옥문영 전무님부터 말했을 걸.”
“그분은 네가 뽑고 말고 할 위인이 아니지 않아?”
속내를 들킨 대찬은 웃기만 했다.
서원웅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나한테 허락 맡고 말고 할 것도 없지.”
“그렇긴 하지.”
“그 사람들이 로튼 프룻츠 행을 택하면 내가 무슨 도리로 막겠어.”
“서울 소재 대기업에서 수도권 소재 중소기업으로 옮기는 일이니 사실 내 제안에 응할 확률도 적은 편이지. 한 사람이라도 와준다면 다행일까.”
“그래, 말대로야. 그런 조건인데도 네 얼굴만 보고 이직하겠다면 말릴 도리가 없지. 다만.”
“다만?”
서원웅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면 비바체 내부의 네 영향력이 축소될까봐 걱정이야.”
“그 말은 뜻밖인데. 요즘 이사회에도 뜸한 게으른 사외이사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
서원웅은 오묘하게 웃었다.
“그게 아니야.”
“그럼?”
“내 위상이 흔들릴까봐 불안한 거지.”
“아, 괜히 잠깐 감동했네.”
“우린 운명공동체니까 그 말이 그 말이지.”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거, 알면서 그래.”
서원웅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비볐다.
“내가 후계로 낙점되긴 했지만, 그룹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는 상당한 힘과 시간이 필요해. 비바체는 네 덕에 힘 안 들이고 컨트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들이 빠지면 타격은 불가피해.”
“과연 그럴까?”
“어?”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이미 옥문영 전무님이 마트사업부문장 자리에서 버티고 있잖아.”
“옥문영 전무님?”
“그 자리, 너도 잘 알다시피 대기타석이야. 대표로 가는 대기타석.”
“옥 전무님만으로도 충분하다?”
“충분하고도 남지.”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사전 동의를 받은 대찬은 옛 동료들과 만났다.
그들과 같은 사무실에서 아웅다웅하던 것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찬은 그때를 ‘그 시절’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아득히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 몇 년을 너무 빡빡하게 살아온 탓이겠지.’
대찬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감상에 젖은 대찬과는 달리 다른 직원들은 재잘재잘 추억을 반추하며 떠들었다.
저들끼리 떠들던 와중, 주변을 잘 살피는 한태윤 부장이 대찬을 흘끔 바라봤다.
“조 이사님.”
“네? 아, 네.”
“오랜만에 한가로운 자리에서 봬서 좋긴 한데…….”
한태윤 부장은 말끝을 흐렸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 흐린 말끝에 담겨 있었다.
대찬은 그 뜻을 충분히 짐작했다.
“빨리 용건을 말하라는 뜻이시죠?”
“하하, 저희와 달리 이렇게 오랫동안 여유 부리실 일정이 아닌 걸 아니까요.”
“바쁘기야 한 부장님 이하 모이신 분들도 마찬가지니까 에두르지 않고 바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시죠.”
“저는 오늘 헤드헌터 자격으로 왔습니다.”
“헤드헌터라뇨?”
대찬은 공언한 대로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비바체 관두고 로튼 프룻츠로 오시라고 말씀드리려고요.”
그러자 오다혜는 저도 모르게 솔직한 반응을 내놨다.
“로튼 프룻츠가 유망하긴 하지만 편한 대기업 직장 버리고 가기는 좀…….”
툭 흘러나온 본심에 오다혜 본인도 놀랐다.
“죄송해요. 말이 필터링도 안 돼서 나와 버렸네…….”
대찬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에요. 차라리 솔직한 게 좋지. 괜히 마음도 없으면서 생각해볼게요, 고민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런 말들이 다 관계 어색해지는 말들이라니까.”
그러자 김산호는 오다혜를 흘끗 보더니 대찬에게 말했다.
“그럼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당연히.”
“솔직히 저는 가고 싶어요, 로튼 프룻츠로.”
뜻밖의 말에 놀란 건 대찬이 아니라 오다혜였다.
오랫동안 사내연애를 해온 둘은 얼마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대찬도 식에 참석해 축의금을 넉넉히 줬었다.
그렇게 살림을 합친 마당에 자기는 흥읍의 로튼 프룻츠로 가고 싶다니.
안방이었으면 등짝을 후려도 골백번은 후릴 일이었다.
대찬도 자연히 그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다혜는 싫다는데 김산호가 좋을 수가 있나? 후환이 두렵지 않아?”
“이사님 앞이 아니었으면 벌써 전 죽은 목숨이에요. 이사님 앞이니까 용기 내서 말하는 거예요.”
대찬은 오다혜를 바라보며 김산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사형수도 마지막 남길 말은 들어준다는데, 그래도 남편 말을 들어보기라도 해주자고요.”
오다혜는 김산호에게 찌릿 눈빛을 쏘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나 볼게요.”
김산호는 어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다혜 말이 맞긴 맞아요. 대기업에서 중소, 잘 쳐줘야 미래의 중견기업으로 가는 사람, 드물죠.”
“그렇지.”
“하지만 로튼 프룻츠는 분명히 하루가 다르게 거듭날 거예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덕담이 아니에요. 제가 뭘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로튼 프룻츠는 상승세잖아요. 그냥 상승세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인.”
대찬은 김산호의 객관적인 공치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물론 회사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다고 해서 제 연봉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건 아니에요. 단, 지분이 있다면 다르겠죠.”
대찬은 김산호의 말뜻을 이해했다.
“스톡옵션을 달라?”
“네.”
“하지만 나는 내 경영권 방어하기도 벅찬 입장이야. 꿍쳐놓은 곶감 꺼내주듯 그렇게 쉽게 내줄 입장이 안 돼.”
“저도 턱턱 지분 크게 받아먹을 생각은 없어요. 대신 0.02퍼센트 주세요. 다혜까지 0.04퍼센트.”
그러자 오다혜는 경악했다.
“난 간단 소리 안 했어.”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0.02퍼센트면 전체 지분의 만분의 2 정도야. 눈곱만큼이라고.”
“알아요. 지금은 그렇겠죠. 근데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흠.”
“지금 로튼 프룻츠 지분을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잖아요. 안파니까 못 사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는 비매품이지.”
“저는 로튼 프룻츠, 그 이전에 조 이사님의 실력을 믿어요. 눈곱도 눈곱 나름이죠. 행성만큼 큰 거인의 눈곱은 나라 하나 크기 정돈 되겠죠.”
“나를 너무 올려 쳐주는 거 아니야?”
“제 예상이 맞을지 틀릴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비바체에 재직하면 먹고는 살아도 신세 바꿀 정도는 못 벌어요.”
“0.02퍼센트로도 신세 바꿀 정도는 안 될 거 같은데.”
“왜요? 로튼이 시총 10조 정도로 커지면 제 주식 가치는 20억인데. 그 정도면 로또 1등 정도는 맞은 거예요. 다혜까지 합하면 두 번. 그 정도면 소시민의 신세는 충분히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시총 10조면 코스피 기준으로 30위 안에는 들어가야 돼.”
“못 될 건 뭔가요?”
낙천적인 건지, 아니면 맹목적인 건지.
김산호는 로튼 프룻츠의 미래에 대해 대찬보다 더 큰 확신을 갖고 있었다.
김산호는 목소리에 더 힘을 실었다.
“대표님이 직접 모셔간다고 저희를 부르셨으니 박봉을 제시하진 않으실 테고, 어느 정도 대우는 해주실 거잖아요.”
“그건 그래.”
“그럼 선택 못 할 건 뭐예요. 제가 짊어질 페널티는 단 하나예요.”
“뭘까.”
“서울에서 흥읍으로 출근하는 것뿐이에요. 그 페널티만 감수하면 믿음직하고 존경하는 대표 밑에서 보람차게 회사를 키워가고, 확률 높은 로또도 긁어보는 일인데.”
대찬은 김산호의 말이 고마웠다.
“아, 페널티 하나 더 있다.”
대찬은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하나 더? 뭔데.”
“원래 매형으로 모실 뻔하던 대표님이 누나의 전 남친이라는 불편한 관계가 됐다는 거요.”
“…….”
김산호의 말에 분위기가 일순 숙연해졌다.
대찬은 커흑, 사레가 들려 여러 번 헛기침을 하고 김산호에게 물었다.
“잘 지내지, 산하 누나.”
“알면서 뭘 물어보세요. 회사 동료 미국인 남친이랑 결혼해서 잘 살고 있잖아요.”
“난 알아도 몰라야 되는 신분이거든.”
김산호는 얕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무튼 0.02퍼센트, 이적료라고 치고 주신다면 저는 바로 이 자리에서 사인할 용의가 있어요.”
“부부는 일심동체야.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아칸 같은 거라고. 오다혜 씨가 허락 안 하면 나도 별 수 없어.”
그 말에 한참 고심하던 오다혜는 결단을 내렸다.
“저도 김산호랑 같은 조건이면 수락할게요. 마찬가지로 시누이의 전 남친이 대표님이라 좀 걸리긴 하지만요?”
“…그래, 고맙네.”
김산호, 오다혜는 로튼 프룻츠에 승선하기로 했다.
그러자 홍은주 역시 그들과 뜻을 함께했다.
“저, 조 이사님 아니었으면 필래랑 계약만료 되고 다른 직장 알아보러 떠돌아다녔을 거예요. 조 이사님 덕에 여태 과장 직함 달고 잘 살고 있어요. 저는 스톡옵션 없어도 돼요. 불러만 주시면 가겠습니다.”
“그건 곤란하지. 그렇게 되면 김하고 오가 좀 민망해지니까.”
김산호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홍은주에게 말했다.
“그래요, 홍 과장님. 그리고 나중에 대박 나면 배 아픈 거 어떻게 참으려고 그러세요?”
“…그럼 주시면 받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한태윤 부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부장님께서는…….”
“부인과 의논해보겠습니다. 완곡한 거절이 아니라 진짭니다.”
“하긴, 이런 걸 덜컥 결정하셨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니까요. 집이랑 애들 교육 문제도 있고.”
“그렇습니다.”
“한 부장님이 오시겠다면 이사 자리 하나 만들어놓겠습니다. 그럼 좀 면이 살겠지요.”
한태윤 부장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 와이프는 이사님 깊게 신뢰하고 있어서 동의해줄 가능성이 커요. 그래도 주시면 받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잠정적으로 여기 계신 전원, 로튼 프룻츠로 오시는 걸로 생각해도 괜찮겠지요.”
대찬의 확인에 자리에 앉은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깔끔하게 결론을 내고 일어서려는데,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렸다.
“와, 진짜 너무들 하네! 이거 보이지, 눈물 나는 거 보이지!”
떠들썩한 소리의 주인공을, 대찬은 뒤돌아보지 않고도 알았다.
“허운은 나이 40이 다 돼 가는데도 저래.”
허운은 씩씩거리며 대찬의 앞에 육박했다.
“조 이사님, 아니 조대찬! 너 진짜 뭐 하자는 플레이야.”
“허운 과장님.”
“야, 진짜 서럽게 이럴 거야?”
“일단 진정하고 좀 앉아보세요. 산호야, 미안한데 커피 한 잔만. 우리 허 과장 뭐 좋아하는지 알지?”
“알죠. 카라멜 마끼아또에 휘핑 빼고 샷 추가.”
“그렇지.”
허운은 김산호가 일어난 자리를 꿰찼다.
그는 대찬을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조대찬!”
“진정 좀 해. 무슨 말 할지 알고 있어. 일단 내 말 먼저 들어.”
“무슨 말을 해도 이거 오백 년짜리야.”
“오백 년 살지도 못할 거면서 오백 년짜리래.”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어도 이건 안 까먹는다.”
대찬은 히유, 한숨을 쉬고 허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형은 특별대우 받은 거야.”
“특별대우 맞지. 왕따도 특별대우지, 암.”
“그만 칭얼거려.”
“칭얼거리는 게 아니라 섭섭해 하는 거거든요.”
대찬은 김산호가 사 온 커피부터 허운의 입에 물려주었다.
커피가 들어가니 허운의 들불 같던 기세가 좀 가라앉았다.
애한테 젖병 물리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대찬은 자기 말을 들려줄 여유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