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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55화 (455/556)

난 할 수 있어 455화

가장자리는 5층 규모로 지어지고 가운데로 갈수록 낮아져 최중심부는 단층이었다.

어떻게 보면 콜로세움과도 비슷한 구조였다.

최중심부에는 대표실이 있었다.

수레바퀴의 축과 바큇살과 유사했다.

대찬의 대표실이 축의 역할을 했고, 방사형으로 뻗어있는 사무실들이 바큇살의 역할을 했다.

이는 대표로서의 중압감을 한눈에 드러내는 구조이기도 했다.

회사의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최중심부인 대표실로 모여드는 위계질서가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

대찬은 책상 한 귀퉁이에 볼펜으로 낙서를 끄적거렸다.

The buck stops here.

벅은 여기서 멈춘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즐겨 썼다는 말이었다.

포커게임에서 차례가 돼서 딜러가 된 사람을 표시하는 물건으로 벅 나이프란 것이 쓰였다.

그 벅 나이프를 옆 사람에게 넘기는 것으로 딜러로서의 차례가 끝났음을 알린다.

벅이 여기서 멈춘다는 건, 더 이상 떠넘길 곳도, 떠넘길 의지도 없다는 뜻이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대찬은 그 낙서로서 막중한 책무를 잊지 않고자 했다.

그는 한참 책상에 쓰인 글씨를 매만졌다.

그때 진위생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통유리로 둘러싸인 대표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라니?”

진위생은 살짝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잖아요.”

“그게 왜요.”

“게다가 과일바구니 특성상 직원들이 빙 둘러싼 형국이잖아요. 이러면 대표님 사생활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대찬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회사에서 사생활을 왜 찾습니까?”

사장의 질문에 진위생은 우물쭈물했다.

“아니… 뭐, 시간이 좀 남으면 인터넷 쇼핑하거나 지뢰찾기도 할 수 있고요…….”

“진위생 씨는 회사에서 인터넷 쇼핑이나 지뢰찾기 하시나 봅니다.”

“제, 제가 그런다는 건 아니고요…….”

“그럼 진위생 씨도 안 하는 짓을 대표인 제가 할 것 같다? 저를 그 정도로밖에 안 보는 겁니까?”

“아니이… 그게……. 그게 아니더라도 그… 애인이랑 오피스에서 스킨십하는 뭐 그런 로망이 있을 수도…….”

“진위생 씨는 잘도 그런 짓거리를 하나 봅니다. 아니면 하고 싶거나.”

대찬은 사무용 전화기로 고미수에게 직통으로 알렸다.

“고미수 씨, 가급적 사무실에서는 진위생 씨와 접촉하지 마세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진위생 씨가 좀 이상한 로망이 있는 것 같아서요.”

진위생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님다! 저는 그런 로망 없슴다!”

대찬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진위생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소릴 합니까, 하기는.”

“…….”

“설마 말장난이나 걸려고 들어온 건 아닐 테고, 용건이나 말하세요.”

진위생은 쩝, 입맛을 다시고 대찬에게 보고했다.

“그, 비도축육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감사하게도.”

“그래서 고객님들 중에 일부가 요구하는 사항이 있어서요. 생각보다 꽤 많은 분이 요구하셔서 대표님께 보고 드리려고 합니다.”

“뭐죠?”

“본사로 직접 연락해서, 오프라인 매장 말고, 로튼 프룻츠에서 직접 온라인으로 직거래하면 안 되냐고 하던데요.”

대찬은 딱 잘라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안 된다고 해주세요.”

“담당부서에서는 고려해볼 만한 사항이라고 하던데, 대표님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부분인가요?”

“일고는 하죠. 근데 재고할 가치까지는 없어요.”

판매할 독자적인 플랫폼이 구축하려면 품이 많이 든다.

미리 플랫폼을 갖췄다 해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희소한 물량으로 사치품 취급을 받는 현실에서야 온라인 직거래가 얼마든지 가능했다.

아마 필래팜을 거쳐 오프라인으로 판매하는 것보다 수익률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에 한정된 부분이었다.

지금의 비도축육은 대찬이 원하는 최종형태가 아니었다.

지금은 단지 과도기일 뿐이었다.

저가 대량생산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과도기의 목적은 분명했다.

비도축육을 미심쩍어하는 사람들의 불신을 불식시키고, 신뢰를 얻을 것.

대량생산체제로 넘어가기 위한 동력을 마련하는 데 충분한 이득을 취할 것.

과도기의 두 가지 목적은 충분히 성취되고 있었다.

이 이상으로 무언가를 더하는 건 사족에 불과했다.

이대로 비도축육을 사치품의 지위에 눌러 앉히면 구본진의 비난에 할 말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 뿐이었다.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기까지 길면 2년, 짧으면 1년이었다.

1, 2년 안에 재래육과 단가만으로도 경쟁이 될 정도로 끌어올릴 예정이었다.

그 이후로는 재래육의 효율을 아득히 따돌릴 작정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물량은 포화상태에 이를 것이다.

당연히 직거래는 꿈도 못 꿀 지경에 이를 터.

단기간에 몇 푼 더 벌자고 구태여 플랫폼을 만드는 건 그다지 이득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를 대비하여 타사의 플랫폼을 이용하되, 대량의 물량을 공급해도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쪽이 훨씬 나았다.

그러니 직거래 플랫폼을 설치하는 건 소탐대실이었다.

직거래 요구를 단칼에 일축한 대찬은 진위생에게 물었다.

“목장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예,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해서 일단 지시한 물량은 소화하곤 있지만…….”

진위생은 말끝을 흐렸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갑자기 늘어난 물량을 감당하긴 힘들죠?”

“설비야 미리 계획을 세워두고 진행해왔기 때문에 문제는 없습니다만.”

“문제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겠죠.”

진위생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인력이 태부족이라…….”

“연구인력이 생산에까지 동원되니 아무래도 연구에도 지장이 많을 테고요.”

“맞습니다.”

대찬은 눈을 살짝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됐네요.”

“때라뇨?”

“요즘 같은 불황에 강조되는 기업의 본분이 있잖아요.”

“네?”

“일자리 창출.”

“신규채용 하시게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산직 직원들을 뽑아야겠어요. 말이 생산직이지, 단순반복 업무가 아니니 교육에도 꽤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겁니다.”

“그래야겠죠. 복잡하고 생소한 기계를 다루려면…….”

“그러니 서둘러 진행해주세요. 특히 대량생산 체제로 돌입하면 숙련된 직원이 더 절실해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분부한 대찬은 더 이상 로튼 프룻츠가 소수인원으로 꾸려갈 구멍가게 같은 회사가 아니라는 걸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대찬은 사무용 의자에 몸을 묻고 팔짱을 꼈다.

지금까지 로튼 프룻츠의 경영은 투자금을 까먹으며 실력을 비축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비축한 실력을 시장에 선보일 때였다.

이제 그 실력이 어떻게 발휘되느냐에 따라 로튼 프룻츠의 가치와 미래는 정해질 것이었다.

지금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지금부터야말로 절대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되었다.

로튼 프룻츠는 생산직 직원을 공개채용 했다.

인원은 스무 명.

물론 모든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태부족인 인원이었다.

그러나 대찬은 스무 명으로 한정했다.

대찬은 은오영 소장을 불러 특별히 말했다.

“소장님, 이번 생산직 면접은 소장님이 직접 주관해주세요.”

“예? 그럴 것까지야 있나요. 연구 인력도 아니고 생산직 인력을…….”

“뭐든지 스타트가 중요하니까요.”

“왜 제가…. 아니,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고요.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궁금해서.”

“1기 생산직 직원들은 단순한 생산직이 아닙니다.”

“단순한 생산직이 아니면 복잡한 생산직일까요?”

“스무 명의 생산직 직원들 중에서 그런대로 유능한 분들을 선발해서 멘토로 삼을 겁니다.”

“멘토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생산직 직원들의 교육을 총괄할 겁니다. 그러니 소장님이 직접 선발하시고, 그 이후 멘토에 대한 교육도 전담해주셔야겠습니다.”

“아아……. 그럼 제가 멘토의 멘토가 되는 셈이네요.”

“맞습니다. 바쁘신 건 압니다만 꼭 필요한 일이라.”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은오영 소장은 차마 그 웃음에 퇴짜를 놓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단, 제가 엄청나게 수고할 거란 사실만은 알아주세요. 안 그래도 요즘 다르샨 싱 이놈, 허파에 바람 들어가서 칠렐레 팔렐레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그놈 집 나간 정신만큼 제가 더 수고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때 청담재에 싱 전무님 대동하고 간 게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헷갈립니다.”

“저는 대표님이 내린 역대 결정 중에 최악이었다고 봅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말씀으로 때우시게요?”

“아유, 알았어요. 연구소 가족들 한우 회식이라도 시켜드리겠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제가 결제한 걸로, 대내적으로는 법카가 결제한 걸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말 안 해도 압니다.”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로튼 프룻츠의 생산직 공개채용에 이력서가 폭주했다.

조건 자체가 괜찮았다.

연봉이 비슷한 위상의 회사들보다 적게는 30퍼센트, 많게는 50퍼센트 더 많았다.

돈이 남아도는 까닭이 아니었다.

그런 웃돈을 얹어주고서라도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욕심의 발로였다.

게다가 원하는 이들은 시설이 잘 갖춰진 신축 기숙사에서 무료로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로튼 프룻츠의 미래도 중규모의 기업치고는 아주 밝았다.

사내문화 역시 젊은 대표의 선도 하에 진취적이라고 하니.

다른 기업에 원서를 내면서 여기에 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은오영 소장이 면접위원장을 맡은 첫 번째 생산직 공개채용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는 눈이 맑은 스무 명의 직원들을 선발했다.

개중에는 경력직도 있고 신입도 있었다.

은오영 소장은 직접 뽑은 정예를 멘토로 선임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전수했다.

선발된 멘토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하나.

기숙사 혹은 사택에서 거주할 것.

많은 정보를 전수받는 만큼 보안에 철저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남들보다 우대받는 만큼 회사생활에 더 충실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생산직 직원의 기본 교육이 완수되자마자 현장에 투입하자.

사무실의 직원들은 대찬에게 그렇게 건의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찬은 그들의 건의를 반려했다.

“실력이 완전히 농익기 전에는 현장에 투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은 새롭게 영입된 생산직 직원들이 현장에 투입되어야 하는 101가지 이유를 대찬에게 아뢰려다가 관뒀다.

그들이 아는 걸 대찬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요?”

“네…….”

“걱정 마세요. 이제 썰물은 없습니다.”

대찬은 그 어떤 때보다 분명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인력이 급한 건 생산설비뿐만이 아니었다.

생산직보다는 아니지만, 사무직 역시 일손이 심하게 달리는 상황이었다.

만만찮은 업무강도 때문에 곡소리를 내는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세로 발전하는 회사인 까닭에 차마 그만두겠다는 말을 목구멍 밖으로도 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죽을 맛.

대찬은 그들에게도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열 명 몫의 일을 해냈습니다.”

“하하…….”

그들의 힘 빠진 웃음의 이유를 대찬도 아주 잘 알았다.

알긴 아네.

“연봉을 열 배로 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뿐입니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무직에 대해서도 추가 채용을 실시하겠습니다!”

직원들은 일제히 양 팔을 위로 뻗으며 환호했다.

“만세!”

그들의 환호가 큰 만큼 그들의 업무가 과중했다는 뜻.

대찬은 불편한 웃음을 머금었다.

대찬은 쓰던 사람을 쓰고 싶었다.

사회로 나온 이후, 대찬의 둥지는 딱 두 군데였다.

하나는 로튼 프룻츠, 다른 하나는 필래 비바체.

결국 로튼 프룻츠 소속이 아니면서 쓰던 사람은 모두 필래 비바체에 있었다.

대찬은 서원웅과 약속을 잡고 따로 만났다.

서원웅은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요즘 이사회에도 통 안 나오고. 바쁜 건 알겠는데 너무 관심 뚝 끊어버린 거 아냐?”

“멀티태스킹이라는 게 쉽지가 않네, 생각보다.”

“그런 사람이 컬링은 또 은근슬쩍 챙기고?”

대찬은 할 말이 없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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