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52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이사회에 잘 참석하지 않았던 대찬이 갑자기 나타났다.
이어 독대까지 청하는 걸 보고 김풍호 대표는 독사와 마주친 아기 새처럼 얼어버렸다.
잔뜩 얼어붙은 그의 얼굴이 대찬은 우습기만 했다.
김풍호 대표는 침을 꼴깍 넘기며 대찬에게 물었다.
“저… 무슨 일로 저를…….”
“별 건 아닙니다. 이번에 로튼 프룻츠에서 비도축육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거든요.”
“아… 드디어……. 축하드립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아직 생산단가가 높아서 고소득 소비층을 겨냥할 생각입니다.”
“네, 적절한 전략입니다.”
“그래서 필래팜 매장 몇 군데에 납품을 하려고 하는데…….”
“아…, 예.”
“검토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검토는요, 무슨. 세간의 주목을 받는 로튼 프룻츠 제품을 저희가 모셔 와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대찬은 용건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한바탕 폭탄이 떨어질까 긴장하던 김풍호 대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말씀 끝나셨습니까?”
“예, 대표님은 저한테 하실 말씀 남으셨어요?”
“아,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김풍호 대표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필래 비바체와 얘기를 마친 대찬은 바로 해뜰녘의 백민하 사장과도 협의를 마쳤다.
그의 말을 전해들은 백민하 사장은 손뼉을 치며 공감했다.
“이유식 괜찮네요. 충분히 어필이 되겠어요.”
“가공되지 않은 비도축육도 공급할 예정이지만, 아무래도 HMR 형태로 제작해서 판매하는 편이 조금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게 저희 내부적인 판단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우리한테 맡겨줬음 해요.”
“해뜰녘이 나서준다면야 저희야 감사할 뿐이죠.”
백민하 사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협의를 바로 시작하시죠.”
“감사합니다.”
“저희 해뜰녘에서도 적극적으로 이번 기획에 발 벗고 뛰겠습니다.”
대찬과 백민하 사장은 손을 맞잡았다.
밑그림을 다 그린 대찬은 이제 청담재의 요리선생을 만나러 갔다.
필래와 해뜰녘은 어차피 대찬과 깊이 교감하는 기업이었기에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담재와는 초면이었다.
때문에 비도축육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 전문가를 대동할 필요가 있었다.
전문가는 다르샨 싱 전무였다.
“이야, 대궐 같네요.”
다르샨 싱 전무는 청담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말 그대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대찬 역시 다르샨 싱 전무만큼 감탄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놀랐다.
대찬이 문을 두드리자 직원 하나가 나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조대찬 대표님이시죠? 안으로 들어오세요.”
“고맙습니다.”
대찬은 얼굴이 무기였다.
여기저기 잘 알려진 얼굴은 사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초면의 상대에게 가질 법한 의심과 경계, 더한 경우 적개심을 얼마간 상쇄시켜주었다.
청담재는 대찬을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다만 재벌가의 요리선생님으로 소문난 곽준정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다.
워낙 귀하신 몸이라 대통령이 와도 나갈까 말까 한단다.
대신 후계자 수업을 받는 그녀의 딸이 대찬을 맞이한다고 했다.
그녀를 만나러 들어가려는 찰나, 다르샨 싱 전무가 아랫배를 잡았다.
“어우, 저 잠깐 화장실 좀.”
“거 참, 미리 좀 다녀오시지.”
대찬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다르샨 싱 전무를 화장실로 보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조대찬입니다.”
“어서 오세요, 조대찬 대표님. 이렇게 다 뵙네요. 정무숙이라고 합니다. 청담재 대표이사입니다.”
“곽준정 선생님은…….”
정무숙은 미소를 띠었다.
“저희 어머니는 이제 연세가 많이 드셔서 명예회장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내외적으로는 그냥 선생님이라고 하죠.”
“아, 그렇군요.”
“실무적인 부분은 저와 논의하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하시는 일마다 세간의 이목을 끌어오시는 분이 저희에게 연락을 주셔서 설레고, 기대하고 그렇습니다.”
정무숙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사십은 넘고 오십은 안 돼 보였다.
“하하, 기대까지야……. 면식도 없는 저를 친절히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오신 겁니까?”
대찬은 난감한 듯 웃었다.
“아뇨, 실은 저희 기술이사랑 같이 왔는데 잠깐…….”
대찬이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찰나, 다르샨 싱 전무가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배탈이 나서…….”
대찬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정무숙을 바라봤다.
그런데 정무숙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대찬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다르샨 싱 전무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오신 분이 외국 분인 줄은 몰랐네요…….”
“아, 여기는 다르샨 싱…….”
대찬이 다르샨 싱 전무를 소개하려고 하는데도 정무숙은 전혀 듣지 않았다.
그녀는 공손히 일어나 다르샨 싱 전무에게 손을 뻗었다.
“청담재 대표이사 정무숙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아, 로튼 프룻츠 다르샨 싱 전무라고 합니다.”
“다르샨… 이름이 예뻐요.”
“고, 고맙습니다.”
정무숙은 명함을 꺼내 대찬이 아닌 다르샨 싱 전무에게 건넸다.
다르샨 싱 전무도 자연스레 자기 명함을 그쪽에 건넸다.
대찬은 명함을 꺼내려다가 손이 민망해져 도로 집어넣었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정무숙에게 말했다.
“외국 분이지만 한국어에 능통하십니다. 소통에 불편한 점은 없으실 겁니다.”
“그러게요. 어쩜 한국말도 그렇게 잘하실까. 다른 가족 분들은 타지에서 지낼 만하다고 하시던가요……?”
“아, 저는 한국에 혼자 왔습니다.”
“그럼 가족 분들은 고국에?”
“아뇨, 가족이 없어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정무숙의 목소리가 어딘가 야릇했다.
대찬은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비도축육을 이용한 음식을 클래스에 도입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음, 글쎄요. 그 비도축육이라는 게 저 같은 일반인 입장에서는 생소할 뿐이라.”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싱 전무님을 모시고 온 겁니다.”
“아, 그런가요?”
“국내외 통틀어 비도축육에 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이니 잘 설명해주실 겁니다.”
“그럼 싱 전무님과 단둘이 오래 얘기를 나눠봐야겠어요.”
“예? 그럼 저는…….”
정무숙은 너 같은 애송이한테는 1그램의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 대표님은 사업가잖아요. 사업가는 어떻게든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결론을 내려고 말솜씨로 상대를 설득시키는 직업 아니겠어요?”
“예, 그렇기야 합니다.”
“저는 사업가의 유려한 말주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교란당하는 느낌이거든요.”
“교란은 사기꾼의 영역입니다. 사업가는 교란하지 않습니다. 사기꾼은 상대를 한탕 털어먹을 먹잇감으로 생각하지만 사업가는 오래갈 파트너로 생각하니까요.”
“봐 봐요. 벌써부터 그럴듯한 말로 저를 회유하려고 하잖아요.”
“회유가 아니라…….”
정무숙은 대찬의 말을 싹둑 잘랐다.
“저는 음식 하는 사람이에요. 중요한 건 맛과 영양, 두 가지거든요.”
“…그렇죠.”
“최소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조 대표님보다는 싱 전무님한테 설명을 듣는 게 맞지 않겠어요?”
“아…, 네.”
“그러니 일단 싱 전무님에게서 먼저 얘기를 듣고, 되겠다 싶으면 그 다음에 조 대표님과 비즈니스를 의논해 볼게요.”
말이야 틀리진 않았다.
그런데 어째 말하는 품이 마음에 쏙 드는 소개팅 남을 만나서 주선자 보고는 빨리 들어가라고 은근히 재촉하는 듯했다.
대찬은 그녀의 뜻대로 해주기로 했다.
자기가 더 엉덩이 붙이고 있어봤자 좋을 건 없을 듯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요. 기회가 닿으면 또 봬요.”
정무숙은 아무 미련 없이 대찬을 보내주었다.
비즈니스 하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대찬은 어정쩡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갈 때까지 정무숙은 다르샨 싱 전무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대찬에게는 시선 한번 던져주지 않았다.
대찬은 밖으로 나오면서 청담재 직원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저기요.”
“예?”
“갑자기 이런 질문 죄송한데, 혹시 정무숙 대표님 결혼하셨나요?”
“아… 하셨었죠.”
“…그렇군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청담재를 나섰다.
그는 다르샨 싱 전무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차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기다렸다.
다르샨 싱 전무는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나서야 청담재를 빠져나왔다.
그가 조수석에 타는 걸 보고 대찬은 책을 탁 덮었다.
“뭐예요, 그 여자.”
“예?”
“전무님한테 한 방에 꽂힌 거 같던데.”
“아… 하하.”
다르샨 싱 전무는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분이 뭐라시던가요?”
“…자기는 가슴에 털 난 남자가 좋대요.”
“…….”
대찬은 다르샨 싱 전무가 입은 셔츠의 첫 번째 단추가 풀어진 곳으로 시선이 갔다.
보기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보게 됐다.
그곳의 아기 새 궁둥이 같은 털 뭉치를 보고 어정쩡한 웃음을 지었다.
그 이후, 청담재와의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다르샨 싱 전무는 연구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청담재에 불려갔다.
명분은 사업 간담횐데 자리에서 오가는 말은 선 자리가 따로 없었다.
어느 날은 대뜸 자기가 인도 커리를 만들어봤다면서, 식사부터 하자면서 거하게 상을 차렸다고.
대찬은 다르샨 싱 전무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뭘요?”
“우리 전략은 미남계예요.”
“미남계요? 오랜만에 모르는 한국어 단어네요.”
“굳이 아실 거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제가 뭘 하면 되죠?”
대찬은 다르샨 싱 전무를 흘끗 보며 말했다.
“하나만 여쭤볼게요.”
“네.”
“정무숙 씨가 사적으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
“괜찮으십니까?”
대찬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르샨 싱 전무가 말했다.
“귀찮게 하는 거 아닙니다.”
“오호라.”
“무숙이랑 만나는 거, 나름 재미도 있어요.”
“무숙이?”
“…제가 한국어에 서툴러서.”
“아, 예. 참 서투르시네요.”
대찬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주말을 연구소에서 보내기 일쑤였던 다르샨 싱 전무가 토요일마다 서울로 가서 주말 내내 집을 비운다는 첩보가 입수되던 그때.
요리연구가 곽준정의 프라이빗 클라스에는 새로운 요리법이 도입되었다.
올해 칠순이라는 곽준정 선생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 뚝심이 있었다.
“오늘은 지금까지 못 보셨던 식재료를 소개할까 해요.”
곽준정의 앞에는 정재계의 사모님 여럿이 도열해 있었다.
여전히 가부장적 기풍을 유지하는 집안에 시집을 가서, 요조숙녀니 현모양처니 하는 케케묵은 도리를 다해야 하는 형편의 사모님들이었다.
혹은 그 요조숙녀, 현모양처와 공통분모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모님들이었다.
곽준정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특히 우리 홍승연 수강생.”
“네?”
“홍승연 수강생이 잘 들어두면 좋을 식재료예요.”
“제가요?”
홍승연이 시집간 집안은 가부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그녀가 요즘 공을 들이고 있는 낙희그룹 집안의 손주며느리가 그런 집안에 시집간 터였다.
홍승연은 팔자에도 없는 요리강습에 넌덜머리가 났다.
그래도 제 딴에는 꾹 참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곽준정은 웃음을 머금으며 홍승연에게 말했다.
“아직 애가 없죠?”
“네.”
서원웅과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않아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 2세 소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