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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50화 (450/556)

난 할 수 있어 450화

매끈한 얼음을 타고 흐르던 스톤은 따닥,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스웨덴의 노란색 스톤 두 개를 일거에 하우스 바깥으로 쳐냈다.

그리고는 왕위를 찬탈한 반란군의 수장처럼 떡하니 하우스 중앙을 꿰차고 앉았다.

“그렇지!”

“와아!”

그걸 본 관중들은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대찬과 윤이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무진 사람들은 준비해온 태극기를 마구 흔들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대한민국이 아시아 최초로 컬링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냅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장한 선수들이 버텨온 고통스러운 세월에 조금이나마 보상이 되는 그런 날이기를 바랍니다.”

감격에 차서 울먹거리는 캐스터의 목소리는, 이미 이어폰을 빼버린 대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의젓한 스웨덴 선수들은 한 줄로 도열해서 대한민국 선수들을 위해 박수를 쳐주었다.

선수들은 스웨덴 선수들과 포옹을 나눈 뒤, 손을 맞잡고 관중석을 향해 거푸 고개를 숙였다.

서로 손을 맞잡은 덕택에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거푸 이쪽을 향해 숙였다.

대찬은 뿌듯하게 웃으며 있는 힘껏 박수를 쳐주었다.

유성은의 시선이 대찬 쪽에 한참 머물렀다.

대찬과 유성은은 서로 뿌듯하고 벅찬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간이 메달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선수들에게로 몰려갔다.

“일단, 오늘 금메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바탕 고비를 겪은 다음의 수확이라 더 뜻깊으실 것 같은데요.”

유성은은 눈물을 손등으로 슥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렇게 저희가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건 다 국민 여러분의 성원 덕분입니다. 좋은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네, 이제 그 문제는 저희 손을 떠난 상태라 더 날 선 말들을 뱉고 싶진 않습니다.”

“예, 그러시겠죠.”

“다만, 이런 어려운 과정 속에서 도움이 됐던 분들께는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모든 분들이 감사하지만요.”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면 누구에게 하시겠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색하지 않고 저희를 묵묵히 믿어주신 부모님, 그리고 친구들한테 감사해요. 그리고 함께 이 어려움을 해쳐나간 우리 동료 선수들에게도 감사하고요. 그리고 또.”

“또?”

“특히 조대찬 씨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사태에서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말 자체는 간결했지만 말 속에 든 마음만큼은 충분히 전해졌다.

경기가 끝나고, 갈 길 바쁜 선수들을 굳이 대찬은 붙잡아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유난을 떨어가며 생색내봤자 스스로의 값어치가 떨어질 뿐이었다.

대찬은 퇴장하면서 우연히 선수들과 마주쳐 가벼운 눈인사만 했다.

선수들을 만나지 않아도 대찬은 충분히 바빴다.

대찬은 윤이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숙소 가 있을래?”

“왜, 경기 다 봤으면 좀 쉴 것이지 어딜 또 밖으로 새려고.”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나, 명색이 올림픽 공식 서포터 기업 대표거든요.”

“그래서?”

“우리 회사 광고가 잘 되고 있나 둘러보고 와야지.”

“나도 갈래.”

“선글라스에 후드 모자 푹 눌러쓰고 암행어사처럼 다녀올 거야. 근데 옆에 윤이영 끼고 있으면 그게 되겠어?”

윤이영은 피식 웃었다.

“빨리 갔다 와. 나 심심하니까.”

“나도 오늘같이 좋은 날에 회사 일 별로 안 보고 싶어. 슥 둘러보고만 올게.”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대찬은 추레한 행색으로,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경기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로튼 프룻츠의 흔적을 찾기는 그다지 쉽지 않았다.

가장 돈을 많이 낸 파트너 기업들의 광고로 채우기에도 모자란 실정이었다.

가장 급이 달리는 공식 서포터는 별 수 없었다.

생산단가가 낮았다면 시식 행사라도 해봤겠지만, 이미 선수들이 먹을 양을 조달하는 데만 해도 상당한 금액이 소요되었다.

경기장을 찾는 일반인들에게까지 비도축육을 풀었다면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였을 터였다.

유수의 대기업들로 도배된 틈바구니에서 대찬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로튼 프룻츠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로튼 프룻츠의 로고가 보이면 그게 또 그렇게 반가웠다.

경기장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잠깐 벤치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사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하는 소리에 주의가 끌렸다.

건너 건너의 벤치에 젊은 남자 둘이 엉덩이를 걸쳤다.

애인 없는 친구끼리 경기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둘은 한쪽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컬링 진짜 대박. 오기 귀찮았는데 오길 잘했네.”

“그러게 왜 안 온다고 똥고집 피웠냐.”

“그니까 말이야. 진짜 재밌네.”

“너 끝까지 안 간다고 했으면 진심 땅 치고 후회할 뻔했지.”

“쯧, 인정.”

“조대찬이 진짜 촉은 좋더만.”

대찬은 자기 얘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 세웠다.

“나는 하다하다 무슨 컬링에까지 숟가락을 얹나 했거든.”

“나도. 근데 이게 터지네.”

“지금이라도 로튼 프룻츠인지 뭔지 주식 사놔야 되는 거 아니냐. 여기에 올인 한 거 보면 진짜 뭐가 될 것 같으니까 한 거 아니냐고.”

“IPO를 해야 사든 말든 하지.”

“IPO가 뭔데.”

“공돌이 새끼랑 뭔 말을 하겠냐.”

“야, 여기서 공돌이가 왜 나와.”

“아무리 공돌이라도 기초적인 경제 상식은 좀 탑재하자.”

“미친, 누가 보면 경제학관 줄 알겠네. 철학과 주제에. 문돌이면 다 같은 문돌인 줄 아냐?”

“그래도 너보단 많이 알잖아.”

“그럼 뭐해, 취직도 안 되는 게.”

“여기서 취직 얘기가 왜 나와!”

“공돌이 얘기 먼저 꺼낸 건 너 아니냐?”

둘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지더니 어느새 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대찬은 그들을 흘끔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래서 남자 둘이서 여행 가면 안 된다니까.’

대찬은 둘의 우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들의 대화에서 한 가지 관심 가는 부분이 있었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허비할 줄만 알았던 컬링에 대한 ‘삽질’이 올림픽 공식 서포터 노릇보다도 더 큰 마케팅 효과를 누렸다는 점이었다.

올림픽이 폐막했다.

유성은을 비롯한 컬링 대표팀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같은 금메달이라도 그들이 따낸 금메달은 세간의 주목을 더 끌었다.

원래 주목받지 않았던 팀.

열악한 환경과 전대미문의 풍파를 겪고도 금메달을 따냈다.

대중은 그에 합당한 만큼의 관심과 격려를 보냈다.

‘하긴, 그때 은메달 따낸 것만으로도 그 난리였는데 지금 이 정도는 돼야지.’

돈 냄새를 맡은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그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그들은 날아오는 러브콜을 모두 마다했다.

그들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성은은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Y2Y에 자리 있나요?”

“선수 분들이 오시겠다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야죠. 물론 남는 자리도 많고요.”

유성은은 미소를 지었다.

“저희 좀 받아주시면 안 돼요?”

“받아주다뇨. 저희가 엎드려 모셔야 될 판에.”

“그럼 저희, Y2Y랑 계약할래요.”

“와주신다면야 다른 업체들이 제시하는 조건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모시겠습니다. 단…….”

“단?”

“꼭 저희랑 안 하셔도 돼요.”

예상하지 못한 대찬의 말에 유성은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없는 자리도 만들어주신다면서요.”

“네, 근데 저희랑 같이하면 선수님들 평판이 조금 떨어질 수도 있어요.”

“평판이 떨어지다뇨?”

“이번 사태에 제가 선수 분들 편에 서서 상당히 깊숙이 개입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렇죠.”

“그런 상태에서 선수 분들이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으면, 분명히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욕 먹을 일인가 싶지만, 욕 먹을 일이라고 해도 저희는 아닌데요?”

“잉?”

“욕을 먹으면 조대찬 씨가 먹겠죠.”

“네? 어…….”

“저희를 이용해서 이익을 챙긴다고.”

유성은은 짓궂게 웃었다.

“이제 알았다. 괜히 자기 이미지 버리기 싫으니까 우리 핑계 대면서 우리랑 계약 안 하려는 거죠?”

“오, 오햅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까.

유성은의 말마따나 욕을 먹을 일도 아니다.

욕을 먹는다 해도 계약으로 인해 얻어지는 이득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일 것이었다.

대찬은 그저 이런 부분도 염두에 두시라 염려하는 차원에서 말을 건넸다.

그러나 되레 유성은에게 한 방 먹고 말았다.

대찬의 입을 다물게 한 유성은은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피력했다.

“우린 Y2Y랑 계약할 거예요. 조대찬 씨가 거절하면 윤이영 씨 바짓가랑이 붙들고 부탁해보죠, 뭐.”

“아뇨… 그러실 건 없습니다.”

“진작 그러실 것이지.”

“네, 저희랑 계약하세요.”

대찬은 유성은의 확고한 의지가 고마웠다.

유성은을 비롯한 컬링 대표팀은 Y2Y와 전속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만약 함재기가 건재했다면 애초에 Y2Y와의 계약에 쌍수를 들고 반대했을 것이다.

너그럽게 이걸 허락했다 하더라도 주판알을 튕기며 골수까지 뽑아먹으려고 들었을 것이고.

중간에 유통업자가 끼지 않은 직거래는 값이 헐할 수밖에 없다.

Y2Y와 선수들 사이를 턱 가로막은 함재기의 존재가 사라지자, 양자는 서로 만족할 만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Y2Y는 올림픽이 낳은 최고의 스타인 컬링 대표팀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갖게 되었다.

Y2Y의 본격적인 첫 단추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게 꿰어졌다.

함재기 일당은 검찰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함재기 일당이 체육계에 널리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 그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법원의 판단 역시 검찰과 다르지 않았다.

함재기 일가족은 나란히 베이지와 올리브색의 중간 정도 되는 칙칙한 색깔의 유니폼을 입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새로운 컬링협회장의 선출은 아직 팔팔 끓는 여론이 주시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대찬은 선수들에 대한 매니지먼트에 조금의 불편함도 없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만 남기고, Y2Y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대찬은 다시 로튼 프룻츠의 일상 업무로 돌아왔다.

로튼 프룻츠 사무실로 출근하니, 다르샨 싱 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대체 흥읍에서 몇 시에 출발하시면 이 시간에 벌써 와계시는 거예요?”

“마누라도 없고 홀몸이라 새벽에 일찍 눈이 떠져요.”

“싱 전무님 한국어 실력은 나날이 느네요. 그 실력이면 한국 애인도 충분히 사귀시겠는데요?”

다르샨 싱 전무는 피식 웃었다.

“애인은 무슨. 다 늙어서요.”

“아, 왜요. 늙긴 뭐가 늙어요. 아직 팔팔한 40대시잖아요.”

“이 나이까지 결혼 안 한 여자 찾기 힘들어요. 이때까지 안 했으면 웬만하면 쭉 안 하려는 여자가 다수고요.”

“결혼 안 해본 여자는 흔치 않지만 안 한 상태의 여자는 많아요.”

다르샨 싱 전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한 번 갔다가 돌아오신 분들이 계시다, 이거죠.”

“돌싱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유, 돌싱도 아세요?”

다르샨 싱 전무는 불쾌한 듯 툴툴거렸다.

“뭐, 딱히 편견은 없지만 아직은 혼자가 편하네요.”

“왜요. 돌싱과 싱. 라임도 맞고 좋은데.”

“재미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르샨 싱 전무는 콧잔등을 씰룩거렸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표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당분간 누굴 만날 계획 없습니다.”

“그러시다면 저야 좋죠. 연구에만 몰두하실 테니까. 나는 과학과 결혼했다. 좋네요, 슬로건으로.”

“지금 빈정대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암튼, 대표님 재수 없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대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네? 제가 왜요.”

“자기는 윤이영 씨랑 사귀면서 남들 보고는 돌싱과 싱이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재수가 있을 수가 있습니까?”

“사장 보고 자기가 뭡니까, 자기가.”

“이럴 때만 권위 찾지 마시고요.”

대찬은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 아침 일찍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이제 슬슬 비도축육을 제품으로 출시하는 게 좋지 않나 싶어서요.”

“단가가 맞을까요?”

“현재 생산단가 100그람에 1만 5천 원 수준입니다.”

“여전히 너무 비싼데요. 물론 5개월 전인 아누가 때보다는 훨씬 줄어든 수준이지만요.”

“제품을 준비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나요?”

“그래봤자 몇 개월이에요.”

다르샨 싱 전무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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